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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전 상임고문의 새정치민주연합 탈당으로 신당 창당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정 전 상임고문이 참여할 것으로 알려진 '국민모임'은 오는 4월 재보궐선거 참여까지 적극적으로 검토하면서 신당 창당을 추진중이다.

과거에도 이러한 도전은 있었다. 대권에 도전하기 위해 신당을 급조하거나, 당내 경선이나 공천에 불복한 뒤 또는 당내 세력다툼에서 패한 뒤 신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창당한 8개의 신당(진보정당은 제외)은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모두 소멸했다.

[국민당-국민통합21-창조한국당] 기업인들이 대권 위해 창당

지난 2012년 5월 대권도전에 나선 새누리당 정몽준 예비후보가 서울 종로구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 로비에서 열리고 있는 정주영 추모 사진 전시장을 찾아 선친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사진을 보며 선친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난 2012년 5월 대권도전에 나선 새누리당 정몽준 예비후보가 서울 종로구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 로비에서 열리고 있는 정주영 추모 사진 전시장을 찾아 선친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사진을 보며 선친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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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등 기업인들이 대권에 도전하기 위해 독자적인 신당을 창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주영의 통일국민당, 정몽준의 국민통합21, 문국현의 창조한국당이 대표적이다.

통일국민당(국민당)은 지난 1992년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작고) 전 회장이 주도해 창당한 정당이다. 국민당은 같은 해 2월 김동길 교수가 창당을 준비하고 있던 새한당을 흡수한 뒤 정식으로 출범했다.

국민당은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1명의 당선자를 냈다. 정주영 전 회장은 이를 바탕으로 대선에 출마했으나 16.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김영삼·김대중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이후 정 전 회장은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국민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잔류파는 지난 1995년 6월 김종필 총재가 이끌던 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 합당하면서 소멸했다.

국민통합21은 지난 2002년 11월 정몽준 전 새누리당 의원이 만든 정당이다. 정 전 의원은 '한국의 4강 진출' 등 월드컵을 성공시킨 뒤 그 인기를 몰아 지난 2002년 9월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아버지 정주영 전 회장에 이어 아들까지 대권에 도전하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국민통합21 후보로 출마한 정몽준 전 의원과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후보단일화를 추진했다. TV합동토론을 진행한 뒤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노 후보가 단일후보로 결정됐다. 하지만 투표일 개시 8시간 전 정 의원이 노 후보 지지를 철회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그럼에도 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국민통합21의 당세는 급격히 약화됐다.

특히 국민통합21은 지난 2004년 3월 개정된 정당법('정당은 전국 5개 이상의 시도당에 각각 1000명의 당원을 보유해야 한다') 기준에 미달해 법 개정 이후 180일의 유예기간이 끝난 뒤 자동 해산됐다.

창조한국당은 지난 2007년 10월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대표가 주도했다. 문국현은 '사람 중심의 진짜 경제'를 표방하고 대선 출마를 나섰다.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에게 후보단일화를 제안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결국 문 후보는 이회창(15.07%) 무소속 후보보다 훨씬 적은 5.8%의 지지율에 그쳤다.

대법원은 지난 2009년 10월 문국현 전 대표가 비례대표 후보에게 6억의 당채를 시중이자보다 낮게 발행해 경제적 이득을 얻은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결국 문 전 대표는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의 형을 확정받아 의원직을 상실했고, 이후 창조한국당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게 됐다. 지난 2012년 19대 총선에서 0.4% 득표에 그쳐 원내진입에 실패했고, 정당법에 따라 해산됐다.

대권을 위해 독자적 창당에 나선 이들은 대선에서 기존 정치세력으로부터 강하게 견제받아 모두 낙선했다. 신당 창당의 목적이 대권에 있었기 때문에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합당에 의해서든 정당법에 의해서든 모두 사라졌다.

[새한국당-국민신당-친박연대] 대선 경선이나 공천에 불복

지난 2008년 3월 24일 오후 여의도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친박연대 개편대회'에서 이규택·서청원 공동대표가 당기를 흔들고 있다.
 지난 2008년 3월 24일 오후 여의도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친박연대 개편대회'에서 이규택·서청원 공동대표가 당기를 흔들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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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내 경선은 항상 논란거리다. 경선 방식에 따라 후보의 승패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특히 본 선거 승리가 예상되는 정당에서 내부 경선은 본 선거보다 더 치열하다. 그렇다 보니 '경선 불복'이 적지 않게 일어났던 것이 한국정치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새한국당, 국민신당, 친박연대(미래희망연대)가 경선이나 공천에 불복해 창당된 신당들이다.

새한국당은 지난 1992년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든 이종찬 후보가 만든 신당이다. 이 후보는 김영삼 후보와의 대결에서 '불공정 경선'을 주장하며 경선 이틀 전 불참을 선언했다. 이후 3개월 뒤 탈당했고, 같은 해 10월 말 새한국당을 창당했다.

다만 이 후보는 같은 해 12월 14일 정주영 후보가 이끌던 국민당과 합당하면서 대통령 후보직에서는 물러났다. 그런데 국민당은 지난 1993년 1월 5일 합당 20일 만에 새한국당과의 합당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이후 새한국당은 지난 1993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 1석도 얻지 못하고 1995년 야당인 민주당과 합당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국민신당도 이인제 현 새누리당 의원이 경선에 불복해서 창당한 정당이다. 이 의원은 지난 1997년 9월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한 뒤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에 참여했다. 이 의원은 지난 201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도중에도 사퇴함으로써 '경선 불복'의 경력을 하나 더 추가했다.

하지만 이 의원은 제15대 대선에 3위로 낙선했다. 다만 그의 출마가 여권 표를 분산시켜 김대중 후보(새정치국민회의)의 당선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지난 1998년 9월 이 의원을 포함한 7명의 소속 국회의원이 새정치국민회의로 갔고, 당시 김학원 의원은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함으로써 국민신당도 그 짦은 역사를 마감했다.

친박연대는 지난 2008년 18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공천과정에서 탈락한 친박근혜 인사들이 공천에 불복해 만든 정당이다. 이들은 신당 창당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 기존에 있던 미래한국당에 입당한 뒤 당명을 친박연대로 변경했다. '박근혜'라는 특정 인물을 당명의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은 한국정당사에서 보기 드문 기록이다.

친박연대는 총선 직후 '한나라당 복당'을 목표로 설정했으나, 이후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위해 지난 2010년 2월 당명을 '미래희망연대'로 변경했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전당대회를 열어 한나라당과의 합당을 의결했다. 미래희망연대의 세금납부 문제로 인해 완전한 합당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지난 2012년 2월 한나라당과의 합당 절차를 마무리했다.

당내 경선이나 공천에 불복한 세력이 신당을 창당한 경우 양당 구도에서 어느 정도 캐스팅 보트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국민신당의 이인제 후보가 결국 김대중 후보의 당선에 기여했거나 친박연대가 한나라당 텃밭지역에서 승리한 점에서 그렇다. 물론 새한국당처럼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다른 정당에 흡수돼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경우도 있다.

[자민련-열린우리당] 계파 갈등이 분당으로 이어져

지난 2003년 11월 11일 오후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중앙당 창당대회에서 당 지도부가 창당선언문을 읽으며 선서를 하고 있다.
 지난 2003년 11월 11일 오후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중앙당 창당대회에서 당 지도부가 창당선언문을 읽으며 선서를 하고 있다.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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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에서 당내 계파 갈등은 당내 권력다툼을 넘어서 정당 분열로까지 치달을 때가 있다. 자민련은 민주자유당(민자당)에서 2선으로 밀려난 김종필 당시 민자당 대표가 창당한 정당이고, 열린우리당은 새천년민주당 내 개혁세력이 주도해 만든 정당이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2년차인 지난 1994년 YS계(범상도동계)는 세계화와 개혁을 추진한다는 명분으로 김종필 당시 대표의 사퇴를 주장했다. 이에 김 대표는 지난 1995년 1월 민자당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 3월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했다.

자민련은 충청도에 지지기반을 둔 보수정당으로서 오랫동안 각종 선거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맡았다. 지난 1997년에는 'DJP연합'(김대중-김종필연합의 영문 이니셜)에 참여했고,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공동정부를 꾸려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선거연합이 공동정부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정당사적 의미가 크다.

하지만 지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17대 총선에서 참패해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이후 지난 2006년 2월 한나라당에 흡수통합됨으로써 '충청 지역주의 정당'으로서 정치적 역할을 극대화하며 생존하던 자민련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열린우리당은 지난 2003년 11월 새천년민주당 내 신주류와 한나라당 탈당파 그리고 개혁국민정당이 모여서 만든 정당이다. 집권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의 신주류와 구주류 간의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와 지원을 받아 빠르게 세를 확장했다. 특히 지난 2004년 3월 구주류만 남은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공조해 노 대통령을 탄핵하려 했지만 이 위기가 전화위복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은 같은 해 치러진 총선에서 과반의석을 차지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크게 떨어졌다. 이에 민주당과 합당하자는 통합파 의원들이 집단으로 탈당해 과반의석이 무너졌다.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중도통합민주당을 거쳐 대통합민주신당이 창당되는 과정에서 열린우리당도 소멸됐다.

당내 계파 갈등으로 인해 신당을 창당한 경우 다른 유형보다는 그 역사가 깊다. 한국정당사가 계파 갈등의 역사이어서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독자적으로 살아남은 정당은 전무하다. 어지럽고 복잡한 정당 계보도만 양산했을 뿐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창당된 8개의 신당들은 시대적 요청와 사명 등을 명분으로 창당했지만, 흡수와 분열 등을 거치며 소멸했다. 이렇게 '제3신당'들이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은 제3신당들이 그만큼 허약했고, '여당과 제1야당'의 양당 독점구조가 강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국민모임' 등 현재 신당을 꿈꾸는 세력들은 앞서 실패한 제3신당들과 어떻게 달리 활동하며 생존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진혁 기자는 21기 <오마이뉴스>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태그:#신당창당잔혹사, #정동영, #국민모임, #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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