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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
 오체투지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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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한 지난 2013년이었다. 선배들과 처음 접하게 된 노동자 집회가 바로 쌍용차 노동자들의 집회였다. 낯선 구호들, 민중의례 그리고 20명이 넘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천막을 두고 경찰들과 노동자들이 벌이는 처절한 싸움.

나는 몸싸움이 일어나는 그 중심에 있었다. 얼떨떨했던 첫 집회였다. 이후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서 쌍용차 노동자들이 겪게 된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한국 자동차 공장의 기술을 자국으로 가져갈 목적으로 쌍용자동차를 매입한 상하이 자동차, 그리고 이를 안전하게 빼돌리기 위해 한 회계조작과 이를 눈감아 준 정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3천 명의 노동자(물론 최근 대법원은 이같은 회계조작에 의한 정리해고가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이 나라를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수많은 노동자들을 길바닥으로 몰아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저절로 일어났다.

노동절 맞이 대학생 기획단을 꾸려서 학교에서 쌍용차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알리고 서명을 받아보기도 했다. 서명 운동을 하면서 충격을 받았던 것은 서명운동이 의외로 효과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 주었다는 것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이었다. 박근혜씨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 쌍용차 문제에 관한 국정조사를 약속했는데도 말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싸움은 그 당시에 5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2년 후 오늘(1월 8일)은 그 쌍용차 노동자들과 함께 오체투지를 진행했다. 정리해고-비정규직 철폐를 절실하게 원하는 스타케미칼, 유성기업, 기륭, LGU+, 콜트콜텍, 학교비정규직 등 여러 노동자들과도 함께하였다. 사실 오체투지라는 것을 이번 투쟁을 통해서 처음 접해 보았다. 온몸을 내던져서 하는 투쟁이라니. 상황이 갈 때까지 갔다고 느낄 수 있었다.

오체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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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복을 입고 가장 낮은 자세로 북소리와 함께 천천히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가는 길 내내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자회견에서 나온 발언처럼 약간은 치욕스럽기도 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길바닥에 수도 없이 자신들의 몸을 던져야만 국회에 있는 의원들이, 정부가, 기업이, 그리고 사실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걸까.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횡단보도에서 자기 갈 길 바쁘다고 경적을 울려대거나 욕했던 사람들이 미웠고 한심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같이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은 묵묵히 자신들의 갈 길을 갔다. 그리고 사람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믿으면서 한 발 한 발 나아갔을 것이다. 같은 문제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이, 이 문제에 공감하고 발 벗고 나서는 신부님, 스님, 그리고 다른 학생들까지 함께해서 나도 조금이나마 안심하지 않았나 싶다.

가장 낮은 자세로 길바닥을 기어서 갔던 오체투지를 마치고 '자세'에 관하여 좀 더 생각해보았다. '가장 낮은 자세'는 나에게 있어 현 정권과 기업들이 노동자민중을 탄압하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 발 한 발 북을 울리면서 우리들은 나아갔다. 당장에 희망은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위해 스스로 나아갔다. 옳은 것을 위해 천천히 싸워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짧게 참여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이번 오체투지의 정신이 아닌가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장길남(동국대학생) 시민기자가 썼습니다.



태그:#쌍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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