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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삿날마다 반짝반짝 빛나게 닦아야 했던 놋그릇
 제삿날마다 반짝반짝 빛나게 닦아야 했던 놋그릇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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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고 있으려니 '맞아, 그때 이런 것들이 있었어'하는 생각이 들며 그것들 모습이 하나둘 연상됩니다. 글을 읽고 있으려니 '멍석을 깔고 누웠을 때 느꼈던 까슬까슬한 촉감, 숨바꼭질을 하다 숨었던 장독 뒤 적막함'이 그리운 추억 빛으로 변해 가슴에서 일렁입니다. 잠자고 있던 추억이 슬금슬금 일어나는 것으로 봐 그때가 그리운가 봅니다.

소위 '7080세대' 이상이라면 다들 공감할 겁니다. 오줌을 싸 이불에 지도를 그린 꼬마가 이웃집으로 소금을 동냥하러 나갈 때 뒤집어쓰고 가던 키, 제삿날마다 반짝반짝 빛나게 닦아야 했던 놋그릇에 비쳤던 모습들이 제기에 쌓아 올리던 제물들처럼 수북하게 떠오를 거라 장담합니다.   

스위치만 누르면 금방 고운가루로 만들어 내는 믹서를 대신하던 절구, 물동이 위에 동동 떠 있던 바가지, 씨망태기가 돼 대청마루 한 쪽에 걸려있던 뒤웅박, 아파트 거실 바닥에 깔려있는 카펫처럼 푹신하지는 않지만 마냥 편하기만 했던 멍석…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넉넉하게 하는 생활 속 도구들입니다.

30여 가지의 식도구에 얽힌 이야기로 아련하게 꾸린 <식기장 이야기>

<식기장 이야기> (지은이 송영애 / 펴낸곳 채륜 / 2014년 12월 20일 / 값 1만 5000원)
 <식기장 이야기> (지은이 송영애 / 펴낸곳 채륜 / 2014년 12월 20일 / 값 1만 5000원)
ⓒ 채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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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기장 이야기>(지은이 송영애, 펴낸곳 채륜)에는 중년 나이쯤 되는 사람이라면 할머니 댁이나 외가,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어려서 직접 사용했을 수도 있는 30여 가지의 식도구들이 식생활과 관련한 이야기로 아련하게 꾸려져 있습니다.

밥을 다 푸고 어머니가 닥닥 긁어 주던 누룽지만큼이나 맛나기도 하고, 물 한 바가지를 퍼붓고 다시 끓여서 우려낸 누룽지만큼이나 구수한 맛도 납니다.

책에서는 아련한 추억만을 우려내는 건 아닙니다. 알지 못하고 사용했던 그것들이 만들어 지는 과정을 설명하기도 하고, 사연처럼 품고 있는 애환도 하나둘 들려줍니다.

새우젓독이 역삼각형으로 만들어진 건 서로 부닥뜨려 깨지는 것도 방지하고, 배에 싣고 다닐 때 독과 독 사이로 손을 집어넣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밋밋한 모양이야 말로 과학이 깃들어 있는 지혜의 산물입니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가마니, 절구, 새우젓 독, 바가지, 멍석, 신선로, 쌀뒤주, 제기, 체, 떡살, 옹기, 조리, 식칼, 가마솥, 도마, 돌확, 채반, 맷돌, 광주리, 놋그릇… 그 어느 것 하나 낯설 게 없습니다. 보고, 듣고, 사용하며 자라온 물건들이라서 친숙함마저 느껴지는 추억 속 식도구들입니다.

책을 읽는 재미를 맛으로 표현한다면 사진을 읽는 재미는 아삭거리는 식감만큼이나 신선하고, 식도구들을 우려서 내는 글맛은 마음과 가슴에 착착 감기는 아련한 감칠맛입니다.

광명단 항아리를 옹호하는 쪽의 입장은 이와 사뭇 다르다. 구워내는 과정에서 인체에 유해한 납 성분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명단은 산과 열에 특히 약하다. 그걸 발라서 구워낸 그릇에 신김치를 담아 두거나 열을 가했더니 납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광명단 항아리는 500∼880℃ 낮은 온도에서 굽는다. 제작에 소요되는 연료비가 절감될 수밖에 없다.  -<식기장 이야기> 95쪽-

옹기표면에 피는 소금 꽃, '숨 쉬는 그릇'이라는 비밀 

책의 내용이 지나간 추억만을 뒤돌아보게 하는 건 아닙니다. 삶의 지혜가 될 수 있는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배가 불뚝한 겉모양 때문에 같은 독(단지)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독이라고 해서 다 같은 독이 아닙니다. 요즘 흔하게 보이는 항아리, 표면이 유리알처럼 매끈매끈한 붉은빛 광택이 나는 항아리는 우리가 말하는 전통 항아리와는 많이 다릅니다. 

표면에 소금 꽃을 피워 ‘숨 쉬는 그릇’이라는 비밀을 은근슬쩍 드러내는 옹기들
 표면에 소금 꽃을 피워 ‘숨 쉬는 그릇’이라는 비밀을 은근슬쩍 드러내는 옹기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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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옹기가 900∼1300℃라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내는 데 반해 납이 주성분인 광명단(Pb3O4)이라는 유약을 발라 표면이 반짝 거리는 광명단 항아리는 비교적 낮은 온도인 550∼880℃에서 구워냅니다.

구워내는 온도에 따라 제작단가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각각의 독에 숨어있는 기능 또한 다릅니다. 광명단 항아리가 거반 그릇(용기) 역할이 전부인 데 반해 전통 옹기는 표면에 소금 꽃을 피워내는 현상 등으로 '숨 쉬는 그릇'이라는 비밀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주령구의 14면에는 각기 다른 벌칙이 적혀 있다. 거기에 적힌 글귀대로 벌칙을 수행하면서 잔치의 흥을 돋워나갔을 것이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보자.

공영시과空詠詩過 : 신 한수 읊기
삼진일거三盞一去 : 술 석 잔을 한 번에 마시기
금성작무禁聲作舞 : 소리 없이 춤추기
음진대소飮盡大笑 : 술을 다 마시고 큰소리로 웃기
임의청가任意請歌 : 사람을 지목해 노래 청하기
농면공과弄面孔過 : 얼굴을 간지럽혀도 가만히 있기
자창자음自唱自飮 : 스스로 노래 부르고 알아서 마시기
유범공과有犯空過 :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참고 가만히 있기
곡비즉진曲臂則盡 : 팔뚝을 구부린 채 다 마시기

이중 '음진대소'는 오늘날 술자리에서 외치는 '원샷' 아닐까. '삼잔일거'는 또 '후래자삼배後來者三杯(술자리에서 늦게 온 사람에게 권하는 석 잔의 술)'의 원조격일지도 모른다. '곡비즉진'을 '러브샷'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식기장 이야기> 224쪽-

위 내용은 경주에 있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주령구와 관련한 내용입니다. 주령구는 14면으로 가공돼 있는 일종의 참나무 주사위로, 각 면마다 이와 같은 벌칙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술을 마시며 주령구를 던지고, 던져진 주령구에 적힌 글귀에 따라 '음진대소'도 하고 '곡비즉진'도 하며 흥을 돋워나갔을 신라시대의 풍류객들 모습에 '원샷'과 '러브샷'을 하는 모습이 자연스레 덧씌워 연상됩니다.

밥을 다 푸고 나면 어머니가 닥닥 긁어 줄 누룽지를 두툼하게 끌어안고 있던 가마솥
 밥을 다 푸고 나면 어머니가 닥닥 긁어 줄 누룽지를 두툼하게 끌어안고 있던 가마솥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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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기장 이야기>에서 읽은 이야기들이 투박하지만 모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건, 배불뚝이 모양을 한 장독같은 사진, 박박 긁어 낸 누룽지보다도 훨씬 더 구수하게 우려낸 숭늉 같은 글맛이 거무튀튀한 가마솥, 얼기설기 엃힌 광주리, 보글보글 끓고 있는 신선로에서 안에서 그 맛을 더해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덧붙이는 글 | <식기장 이야기> (지은이 송영애 / 펴낸곳 채륜 / 2014년 12월 20일 / 값 1만 5000원)



식기장 이야기

송영애 지음, 채륜서(2014)


태그:#식기장 이야기, #송영애, #채륜, #광명단 항아리, #누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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