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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 경복궁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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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乙未)년. 새해가 밝았다. 돌이켜보면 좋은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많았던 양의 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을미년 10월 8일. 초승달이 하얀 눈썹을 드러낸 어두운 밤. 일단의 무리들이 경복궁 담장을 넘었다.  검은 복면을 한 그들은 닛뽄도(日本刀)를 차고 있었다.

당시 경복궁을 경비하는 병력으로는 시위대와 훈련대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 군관에 의해 교육받고 있는 군대였다. 특히 무리를 안내하는 조선인이 있었다.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이었다.

당시 시해사건을 지켜봤던 편액이다
▲ 건청궁 편액 당시 시해사건을 지켜봤던 편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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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경복궁에 침입한 그들은 건청궁에 난입했다. 놀란 궁녀들이 소리를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궁궐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왕비가 있는 곳이 어디냐?"

침입자들이 궁녀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다그쳤다.

"모른다."

시퍼런 칼날이 춤을 췄다. 옷이 갈갈이 찢어졌다. 은밀한 곳을 손으로 가리고 웅크리고 있는 궁녀들을 바라보는 음흉한 눈빛이 이글거렸다.

"왕비가 있는 곳을 말하면 살려주겠다."
"모른다하지 않았느냐."

죽음을 각오한 궁녀들의 목소리는 경멸에 차 있었다. 낭인들의 칼이 번쩍였다. 피가 튀고 궁녀들의 목이 나뒹굴었다. 살륙극을 마친 무뢰배들이 어디론가 튀어나갔다. 길을 막는 궁내부 대신들도 처참하게 학살했다.

복원한 건청궁내에 있다
▲ 옥호루 복원한 건청궁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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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호루. 경복궁 가장 지밀한 곳에 시녀들을 거느린 여인이 앉아 있었다. 단정한 모습이 범접하기 어려운 기풍이 풍겼다. 무뢰한들이 칼을 빼어들고 다가섰다.

"네가 민비냐?"
"나는 이 나라의 국모다."
"무엇이라고? 네가 국모라고? 하하하, 망하는 나라의 국모라니 개가 웃겠다."

칼날이 어깨를 스쳤다. 선홍빛 핏줄기가 튀어 올랐다. 왕비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칼날이 두 세 차례 더 춤을 추었다. 왕비의 왼쪽 어깨와 등허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마침내 무뢰배의 칼날이 목덜미를 향했다. 칼이 번쩍였다. 왕비의 죽음을 확인한 그들은 시신을 끌어내어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왕비를 살해하고 시신마저 불태운 그들은 우범선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왕비의 죽음은 조선인들의 소행이다."

왕비 시해사건이 극동지역 중요현안으로 떠오르자 일본 공사는 사건을 왜곡하기에 급급했다.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자 일본 공사 미우라는 '범인은 일본 낭인이다, 법에 따라 조치하겠다'라고 발표하고 관련자 47명을 히로시마 법원에 넘겼으나 '증거불충분'이란 이유로 전원 석방되었다.

만행을 저지른 무뢰배는 일본 정부의 변명처럼 시정잡배로 꾸려진 낭인이 아니라 주한 일본 공사가 조직적으로 동원한 일본 우익 사무라이였다는 것이 훗날 밝혀졌다.

명성황후 시해에 적극 가담했던 우범선은 사건 직후 비호세력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여자 사까미와 결혼하고 도쿄에 신방을 차렸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가 씨 없는 수박을 발명했다고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우장춘이다.

우범선의 매국에 분노를 느낀 사람이 있었으니 고영근이다. 고영근은 히로시마에 숨어살고 있던 우범선을 추적하여 살해했다.

체포되어 살인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고영근은 1909년 조국으로 송환되어 사면되었다.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나 홍릉에 묻히자 스스로 능참봉이 되어 생이 다하는 날까지 고종과 명성황후릉을 지켰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잠들어있는 곳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기때문에 왕릉처럼 정자각이 아니고 일자각이며 호석도 황제릉 양식을 따랐다.
▲ 홍릉 고종과 명성황후가 잠들어있는 곳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기때문에 왕릉처럼 정자각이 아니고 일자각이며 호석도 황제릉 양식을 따랐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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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일제에 침탈당하여 백성들이 힘들어할 때, 조국을 침략한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겠다며 혈서(血書)를 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살해하고 떳떳이 교수대로 향한 사람이 있다.

조국 광복을 위하여 만주벌판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독립군이 있는가 하면, 독립군을 소탕하겠다고 일본 제국주의 토벌대 군관이 되어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해방 대한민국에서 계급장 떼고 옷 갈아입고 변신했다.

독립군 후예는 못 먹고, 못 입고, 못 배워 하층생활을 하는데 일제에 빌붙어 작위와 재물을 하사받은 매국노의 후손은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잘 먹고 잘 사는 나라. 건국초기, 정권에 급급한 위정자의 정략으로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것이다. 

후손에게 연좌의 죄를 묻는다는 것은 역사의 퇴행이다. 하지만 2차 대전 종전 후, 프랑스처럼 조국을 배반한 자들에겐 응분의 죄를 물어야 역사의 준엄함에 경건해지고 똑같은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교훈이다.


태그:#을미년, #건청궁, #매국노, #명성황후,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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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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