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셋째날(2014년 11월 8일)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로 이동하다. 용정은 연변에서 생계 이주로 제일 먼저 들어온 선배들이 들어오다. 만주족이 사용하던 우물을 사용하면서 용정이란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우물을 두레박을 사용하여 긷다.

대성중학교는 항일 독립 운동가를 많이 배출하였다. 연변지역의 넓은 벌판은 벼농사를 짓고 5월 초에 지금도 손으로 모내기를 하여 10월 초에 아가씨들이 색동 저고리를 입고 추수한다. 물론 이곳의 논밭은 이주민인 조선족이 개척하였다.

입구에 룡성시 청소년 애국주의 교육기지라 적혀 있다. 전에는 대성중학교란 이름에서 지금은 룡정중학교로 바뀌었다. 윤동주시인을 비롯해서  민족해방투쟁의 산실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 대성중학교 입구 입구에 룡성시 청소년 애국주의 교육기지라 적혀 있다. 전에는 대성중학교란 이름에서 지금은 룡정중학교로 바뀌었다. 윤동주시인을 비롯해서 민족해방투쟁의 산실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 신민구

관련사진보기


대성중학교는 1921년 7월 11일 만주 길림성 용정에 세워진 민족학교이다.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학교의 주도권을 잡아가면서 수많은 항일독립투사들이 배출하였다.

대성중학교 역사기념관에 들어서니 현재 이곳 여선생님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기념관에 전시된 사진들이 잘 설명해주었다. 윤동주와 문익환 그리고 장준하는 이곳 학교 출신이다.
설명을 듣고 나니 교육이 민족해방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더 확연히 알 수가 있었다.

룡정중학 력사 전시관에 있는 항일 유격대 활동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 항일 유격대 활동 사진 룡정중학 력사 전시관에 있는 항일 유격대 활동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 신민구

관련사진보기


옛 건물은 1996년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역사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는 항일운동과 관계되는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윤동주 기념관>코너가 설립되어 있다. 윤동주 기념관에서 전교조선생님들과 함께 이 시인의 학교생활을 엿볼 수 있는 기념물을 감상하면서 사진도 몇 장 찍다.  새로 지은 <이상설역사기념관>도 있다.

1906년 용정에 헤이그 밀사 3인 중 한 사람인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은 간도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이었고 서전서숙의 설립으로 연변 일대의 교육구국운동이 시작되었다. 연변에서도 서전서숙의 설립은 반일운동의 발단이었으며 서전서숙의 설립을 계기로 각지에서 사립학교설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후에 독립투사들이 건너오게 되었다.

룡정중학교 력사 전시관에 있는 철혈광복단의 활동상이 설명되어 있다.  철혈광복단이 연변일대를 중심으로 친일파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조선총독부가 15만원을 수송한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탈취하여 독립자금으로  사용하였다.
▲ 쳘혈광복단의 활동상 룡정중학교 력사 전시관에 있는 철혈광복단의 활동상이 설명되어 있다. 철혈광복단이 연변일대를 중심으로 친일파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조선총독부가 15만원을 수송한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탈취하여 독립자금으로 사용하였다.
ⓒ 신민구

관련사진보기


학교에 정부 지원금이 한정되어 있어서 일정 부분 운영비를 자체로 마련한다는 말을 듣고 전교조선생님들이 십시일반하여 얼마간 기금을 전달하였다. 생가로 가면서 안내원이 버스안에서 서시를 읊는다.  고교시절에 이 시를 읊은 내용을 녹음하면서 왠지 모를 정의감을 느끼곤 하였다.

윤동주시인 기념 교실에서 전교조 통일위원회 선생님들이 당시 교복을 입고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 윤동주시인 기념 교실에서 윤동주시인 기념 교실에서 전교조 통일위원회 선생님들이 당시 교복을 입고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 신민구

관련사진보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생가 입구 표지판에 중국 조선족애국시인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분히 이 제목에서 동북공정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 윤동주생가 입구 표지판 윤동주생가 입구 표지판에 중국 조선족애국시인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분히 이 제목에서 동북공정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 신민구

관련사진보기


학교로부터 얼마간 이동하니  민족시인인 윤동주 생가에 도착하였다. 입구에 중국 애국 민족 시인이란 표시속에서 동북공정 작업을 볼 수가 있었다.

명동교회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이며 민족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태어나서 15세까지 살았던 생가이다. 그가 <별 헤는 밤> 등의 시를 통해 그리워한 북간도의 집이 있는 곳이다. 함경도 전통가옥의 본채와 별채가 그대로 복권되어 있다. 사각 모양의 나무로 된 우물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윤동주생가를 복원하였다. 주변의 바위나 철구조물에 시인의 모든 시들을 아로 새겨놨다.
▲ 윤동주생가 앞에서 회원들 윤동주생가를 복원하였다. 주변의 바위나 철구조물에 시인의 모든 시들을 아로 새겨놨다.
ⓒ 신민구

관련사진보기


독립운동의 근거지이며 민족운동의 산실이 되었던 명동교회는 1909년 설립되었다. 이동휘 전도사의 부흥회 때에는 인근 수백리에서 1천여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해방 후 정미소로 사용되면서 그 본 모습을 잃고 폐허가 된 것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현재는 명동역사전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명동교회 독립운동의 근거지이며 민족운동의 산실이 되었던 명동교회는 1909년 설립되었다. 이동휘 전도사의 부흥회 때에는 인근 수백리에서 1천여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해방 후 정미소로 사용되면서 그 본 모습을 잃고 폐허가 된 것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현재는 명동역사전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신민구

관련사진보기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에 짧게 살다간 젊은 시인으로 어둡고 가난한 생활속에서 인간의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철인이었다. 일제에 의한 생체 실험의혹으로 젊은 나이에 죽다.

함경도지역의 계속된 흉년과 조선말기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피해 1899년 김약연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 이주하여 장계, 이주 등 10여개의 한인자연부락을 통합하여 조선을 밝게 하자는 취지로 명동이라 이름하고 명동촌 을 건설한 것이 오늘 날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시효라 할 수 있다. 많이 거주할 때에는 천 가구가 넘었단다
▲ 명동촌 함경도지역의 계속된 흉년과 조선말기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피해 1899년 김약연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 이주하여 장계, 이주 등 10여개의 한인자연부락을 통합하여 조선을 밝게 하자는 취지로 명동이라 이름하고 명동촌 을 건설한 것이 오늘 날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시효라 할 수 있다. 많이 거주할 때에는 천 가구가 넘었단다
ⓒ 신민구

관련사진보기


윤동주, 문익환, 장준하는 동년배다. 셋은 모두 1930년대 초중반 숭실중학교에 다녔다는 공통점도 있다.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폐교가 될 정도로 반일 민족의식이 강한 학교였다. 셋은 모두 자퇴를 결심하고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이후 행로는 달랐지만 모두 한결같이 굴종과 침묵을 강요당한 시대를 거슬렀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왼쪽부터 청년시절의 문익환, 윤동주,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장준하는 비슷한 나이에 모두 숭실중학교에 다녔다. 문익환과 윤동주는 죽마고우였으며, 문익환과 장준하 역시 친구였다.
▲ 문익환,윤동주,장준하 왼쪽부터 청년시절의 문익환, 윤동주,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장준하는 비슷한 나이에 모두 숭실중학교에 다녔다. 문익환과 윤동주는 죽마고우였으며, 문익환과 장준하 역시 친구였다.
ⓒ 신민구

관련사진보기


대가는 가혹했다. 윤동주는 불과 29세의 나이에 해방을 6개월 남겨놓고 생체실험의 의혹 속에 옥사했고, 장준하는 학병에 끌려갔다 탈출해 독립군이 되었지만 1975년 8월 약사봉 등산에서 의문사 한다. 윤동주와 장준하를 연결해주는 또 하나의 친구였던 문익환은 1989년 반세기 동안 견고했던 분단선을 넘은 후 생의 마지막을 모두 통일운동에 바쳤다. 그러나 그 역시 1994년 1월 사망 후 통일운동의 분열이라는 한 맺힌 상황을 하늘에서 지켜봐야 했다.

점심 후 버스타고 가면서 비암산에 위치한 일송정을 보다. 그 곳에 있는 소나무는 항일투쟁의 상징물이기에 계획적으로 일본이 고사시켰다. 항일 독립 운동을 더욱 느낄 수 있는 선구자를 누구라 할 것 없이 함께 불렀다.

항일렬사기념비는 항일투쟁과정에서 순국한 열사들의 기념비이다. 이번 답사과정에서 수 많은 기념비를 볼 수가 있었다.하단에는 순국한 열사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이 곳은 27분이 순국하신 곳이다. 연변일대에 3200여개의 기념비가 있다. 얼마나 자주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항일렬사기념비 항일렬사기념비는 항일투쟁과정에서 순국한 열사들의 기념비이다. 이번 답사과정에서 수 많은 기념비를 볼 수가 있었다.하단에는 순국한 열사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이 곳은 27분이 순국하신 곳이다. 연변일대에 3200여개의 기념비가 있다. 얼마나 자주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신민구

관련사진보기


선구자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지나가면서 발해의 공주 이름을 딴 평강 벌판이 나오고 인근에 발해의 성인 서고성 유적지가 보이다. 고구려 성은 산성 중심인데 반해서 발해 후기의 성은 넓은 벌판에 세워져서 지금도 그 흔적을 볼 수가 있다. 이곳이 우리 민족의 옛 터전이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청산리 전투 전적지

봉오동 전투의 대첩은 일제가 중국에 본격적인 침투를 계획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중국 출병의 빌미를 만든다. 독립 근거지를 옮긴 독립군 부대는(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1920년 21~26일 동안 만주 허룽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첩지이다.

항일 투쟁 중 3대 대첩 중 하나인 청산리 기념탑을 회원들이 오르고 있다.
▲ 청산리대첩 기념탑에 회원들이 오르는 모습 항일 투쟁 중 3대 대첩 중 하나인 청산리 기념탑을 회원들이 오르고 있다.
ⓒ 신민구

관련사진보기


포장되지 않은 길이어서 기사들이 가려고 하지 않아서 쉽게 가볼 수 있는 유적지가 아니다.

청산리 전투가 일제 침략자에게 대첩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은 우선 기습전이고 다음 포위전이다. 정면으로 맞서다가 잽싸게 뒤로 돌아서 후방에서 공격을 하여 일본군끼리 총질하게 하였다. 또한 겨울에 안개 자주 낀 점을 이용하여 자연 지형을 이용하였다.

청산리 대첩 기념탑앞에서 회원들이 통일에 대한 투쟁의지를 결의하고 있다.
▲ 청산리 대첩 기념탑앞에서 청산리 대첩 기념탑앞에서 회원들이 통일에 대한 투쟁의지를 결의하고 있다.
ⓒ 신민구

관련사진보기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침략자들의 머릿수가 3천여개여서 사망자수도 이 정도일 것이라 한다.

이도백하로 이동하면서 차 안에서 모둠별로 통일 관련 퀴즈를 맞히면서 통일의지를 더욱 높이다.

호텔방에 들어가기 전에 모둠별로 1명씩 오늘 소감을 발표하는데 모둠장이 나를 지적하여 이야기하였다. 선현들이 모든 것을 희생해서 자주독립국가를 만들려고 투쟁한  모습과 의지뿐만 아니라 통일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음을 말하였다.

저녁 후 호텔방에서 전교조 선생님 5명과 그 외 회원들과 술 한 잔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이도백하는 백두산 아래 첫동네로 해발 500m 지점에 자리잡은 작은 도시이다. 백두산의 길목이며, 송하강의 상류지역이다. 이도백하란 백두산의 물길 둘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태그:#대성중학교, #윤동주생가, #명동촌, #청산리전투, #이도백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직에 몸담으면서 교사.교육활동은 현장단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에서도 변혁이 되어야만 참교육에 이른다고 봅니다.그래서 짧은 소견을 대중적인 전자공간을 담보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전달하고 합니다. 저서로 [자본론노트],[청소년을위한백두선생경제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