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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관련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11월은 천주교회의 '위령의 달'이다. 세상 떠난 영혼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를 많이 바치는 달이다. 많은 신자들이 세상 떠난 이들을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하기도 하고, 묘소를 찾기도 한다. 더불어 계절이 가져다주는 쓸쓸함 속에서 죽음과 상실, 덧없는 시간, 인생과 세상의 궁극적 의미 등에 대해 깊은 묵상을 하기도 한다. 늦가을의 음울함과 적막함은 우리에게 '슬픔 상념'을 선사해주는 셈이다. 

11월이 시작되는 지난 1일 오후 충남 태안에서는 제6회 '한국전쟁 태안민간인 희생자 제64주기 합동위령제' 행사가 있었다. 오후 2시 태안군청 대강당에서 열린 이 행사에 나도 참석했다. 나는 간접적인 유족이다. 가운데 백부께서 '보도연맹'에 이름이 오른 처남 탓에 좌익으로 몰려 희생되셨기 때문이다.

2014년 11월 1일 충남 태안군청 대강당에서 열린 제64회 한국전쟁 태안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 행사에서 유족 대표들이 1041명의 이름이 적힌 제단 앞에 절을 올리고 있다
▲ 제6회 합동위령제 2014년 11월 1일 충남 태안군청 대강당에서 열린 제64회 한국전쟁 태안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 행사에서 유족 대표들이 1041명의 이름이 적힌 제단 앞에 절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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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백부님은 딸 넷과 두 아들을 두셨다. 그들 6남매 중 막내는 유복자였다. 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하고 태어나서 자란 막내는 나보다 2년 연하였다. 그는 자라서 군에 입대한 후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다. 서울에서 자수성가하여 재산도 제법 생겼지만, 병을 얻어 오래 고생하다가 이태 전에 부친 곁으로 갔다.

백부님의 장남은 나보다 6년 연상이다. 일찍부터 타지로 나가 살았고 어언 70대 초반 노인이 되었는데, 지금은 병상 생활을 한다.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다. 소년 시절에 본 아버지에 대한 기억 몇 조각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두 사촌 중 형님 되는 분은 타지의 병상에 있고 동생 되는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합동위령제에 나가 절을 올릴 사람은 간접유족인 나밖에 없다. 간접유족이 아니더라도 내 성품상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에는 꼭 참석할 위인이지만, 간접유족인 탓에 의무감 같은 것을 갖게 되었다.

매년 위령제에 참석을 해왔으니 내리 여섯 번 참석을 한 셈이다. 위령제에 참석할 때마다 애처로운 마음이 되곤 한다. 64년 여 전에 타계한 이들에게 제를 올리는 행사인데, 그때로부터 무려 60년 가까이 흐른 시점에서야 제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뼈아픔을 갖게 한다. 60년 가까이 흐르는 동안 합동위령제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으니, 그것을 생각하면 천만다행이지만, 그 수십 년의 공백이 더욱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애처로움은 유족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다. 대개는 60대와 70대들이다. 그들 중에는 내 사촌동생처럼 유복자로 태어났거나, 젖먹이 시절에 아비를 잃어 아버지의 모습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터이다. 또 내 사촌형님처럼 소년 시절에 보았던 아버지에 대한 흐릿한 기억 몇 조각을 겨우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합동위령제에 나와서 64년 여 전에 타계한 아버지를 회억하고 그 시절의 참혹했던 일들을 반추하며, 1041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자리에서 함께 절을 올린다. 60여 년은 내가 살아온 세월이기에 결코 길지 않은 세월이다. 내 아버지 세대들의 청년 시절이었는데, 불과 60여 년 전이 그토록 참혹한 '야만의 시대'였다니, 공연히 믿고 싶지 않은 마음도 생긴다.

2013년 합동위령제에 대한 기억

지난 1일의 일을 가지고 열흘이나 지난 지금에 글을 쓰는 데는 까닭이 있다. 지난해 11월 9일의 '생활일기'를 어제 9일 아침에 읽어본 탓이다. 나는 매일 아침 컴퓨터 앞에 앉으면 내 하루의 삶과 오늘 짓는 모든 글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뜻으로 '봉헌기도'를 한 다음 맨 먼저 하는 일이 지난해 오늘의 '생활일기'를 읽어보는 일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지난해 오늘의 일들을 1년 만에 다시 돌아보는 것은 재미도 있다.

2013년 11월 9일 충남 태안군청 대강당에서 열린 제63회 한국전쟁 태안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 행사에서는 내가 추도시를 낭송했다
▲ 추도시 낭송 2013년 11월 9일 충남 태안군청 대강당에서 열린 제63회 한국전쟁 태안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 행사에서는 내가 추도시를 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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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9일에는 제5회 '한국전쟁 태안민간인 희생자 제63주기 합동위령제' 행사가 있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그 행사에 참석했고, 추도시를 낭송했다. 그리고 진실화해위원장이었던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시행된 과거사 정리를 위한 노력들이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흐지부지되고 만 사실을 들으며 가슴 아파해야 했다. (관련기사: 60여 년 전의 피울음을 뜨겁게 위로하자)

그런데 지난해 11월 9일의 합동위령제 행사장에서는 특별한 일이 하나 있었다. 행사 전에 행사장 입구에서 한 취객의 이상한 언동 때문에 소동이 빚어진 일이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한 사람이 잔뜩 술에 취한 듯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어 고성이 오가는 상황이라 나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집행부 사람들에게 "제대로 조사를 한 거냐?"는 질문을 계속 했다. 그의 질문에 집행부 사람들은 명확한 답변을 회피하면서 그의 행동을 제지하려고만 들었다. 결국 그는 행사장 밖으로 쫓겨났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그는 누군가에게 이끌려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가 거듭 내질렀던 질문을 계속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대로 조사를 한 거냐?" 그는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주변의 몇 사람에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물었으나 속 시원한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가 과거 한국전쟁 전후에 좌익 쪽 사람들에게 피해를 본 우익 쪽 사람의 자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2013년 11월 9일 충남 태안군의 군청 대강당에서 열린 제63회 한국전쟁 태안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 행사에는 진실화해위원장을 지낸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가 강연을 했다.
▲ 안병욱 교수 강연 2013년 11월 9일 충남 태안군의 군청 대강당에서 열린 제63회 한국전쟁 태안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 행사에는 진실화해위원장을 지낸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가 강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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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행사 후 지하식당으로 내려가 보니 그가 여러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는 많이 진정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데, 그는 나를 보자 내 이름을 부르며 대뜸 시비조의 말을 던졌다.

"명색 시인이요 작가라면, 글을 똑바로 써야지. 오늘 추도시를 들었는데, 시를 똑바로 쓰란 말이야!"

나는 그가 앉은 곳으로 가서 앉았다. "나를 잘 아십니까?" 물으니 태안중학교 13회라고 했다. 나보다 1년 선배였다. 나는 태안중학교 14회지만 초등학교 졸업 후 1년 쉬었다가 중학교에 들어갔음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내 초등학교 동창 친구들이 그와 중학교 동창 관계였다. 그는 내 말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좀 더 험상궂은 얼굴로 말을 내질렀다.

"나는 조금도 억울할 게 없는 사람이야. 우리 아버지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아니라고! 우리 아버지는 인공 시절에 완장 차고 우익 쪽 사람들을 여럿 죽였기 때문에 처단된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억울할 게 없어. 그리고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많아. 그런 사람들을 제대로 조사를 해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속에 한 묶음으로 넣어서는 안 된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런 것을 제대로 알고 시를 똑바로 쓰란 말이야!"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도 주위 친구들의 제지를 받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곧 자리를 떴고, 잠시 후 몹시 무거운 마음으로 식당을 나와 차에 올랐다.   
    
피해자 유족의 놀라운 발상

그때로부터 거의 1년이 지난 때 나는 다시 그를 만났다. 1일 오후 2시 태안군청 대강당에서 거행된 제6회 '한국전쟁 태안민간인 희생자 64주기 합동위령제' 자리에 그도 참석한 덕이었다. 그는 지난해와는 달리 전혀 술을 마시지 않은 말쑥한 본새였다.

2014년 11월 1일 충남 태안군청 대강당에서 열린 제64회 한국전쟁 태안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 행사에 전 민주화운동동지회 부이사장인 유영래 선생이 강연을 했다. 유영래 선생은 태안읍 출신으로 1970년대 고려대 재학 중 민주화 투쟁으로 옥고를 겪었다.
▲ 유영래 선생 강연 2014년 11월 1일 충남 태안군청 대강당에서 열린 제64회 한국전쟁 태안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 행사에 전 민주화운동동지회 부이사장인 유영래 선생이 강연을 했다. 유영래 선생은 태안읍 출신으로 1970년대 고려대 재학 중 민주화 투쟁으로 옥고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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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금세 친숙한 사이가 됐다. 중학교 1년 선후배 사이지만, 내 초등학교 동창들이 그의 중학교 동창들이므로 그냥 말을 놓고 지내기로 했다. 행사장 안에서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그가 내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했다.

"국군과 경찰, 또는 한국청년단 등 우익 사람들에게 목숨을 잃은 억울한 이들에게 위령제를 지내는 것은 그렇다 치고, 좌익 사람들에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위령제도 있나? 그들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졌나?"

"우익 쪽 희생자들에게는 이미 옛날에 이런저런 형태의 보상이 이루어졌을 걸. 그 보상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테고…. 그건 확인이 어렵지 않을 거야. 하지만 합동위령제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아."

"인민군이나 좌익 쪽 사람들에게 목숨을 잃은 이들도 많은데, 그분들에 대한 합동위령제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쪽의 위령제가 있다면 오늘 여기 있는 사람들도 참석을 하고…. 그러다가 어느 시기에 가서는 양쪽이 다 함께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금 멍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은 진지하고도 엄숙해 보였다. 그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것 같았다. 일찍이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런 말이 그 친구의 가슴에서 만들어지고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그 과정이 어떤 장강(長江)처럼 내 가슴에 안겨지는 듯싶었다.

한 소시민의 발상이야 그렇다 치고, 개인의 그 발상이 공의(共議)를 얻게 되는 시절이 과연 올까? 정말 실현 가능한 생각일까? 나는 돌연 막막해지는 심정이었다. 막막함 속에서도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실현가능성 따위는 차후 문제로 치고, 오늘 한국전쟁 민간인 피해자 유족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이 무한한 감동으로 내 가슴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태그:#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 #충남 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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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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