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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생> 
낙하산 인턴 '장그래'역의 임시완과 워커홀릭 '오상식'역의 이성민
 드라마 <미생> 낙하산 인턴 '장그래'역의 임시완과 워커홀릭 '오상식'역의 이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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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미생> 주인공 장그래의 눈빛은 어딘가 불안하다. 낮게 깔리는 고요한 배경음악과 어우러지면 한없이 가엽게 느껴질 정도다. 불안함의 근원은 그가 처한 상황에서 비롯된다. 하루 열 시간, 바둑만 두었던 그는 어느 날 세상에 내던져졌다. 프로 입단에 실패한 후 먹고 살기 위해 인턴사원이 된 것이다. 최종학력은 고졸, 그 흔한 '스펙' 하나 없는 채로.

"장그래씨, 고졸 검정고시가 끝이던데 직장생활 경험이나, 제2외국어 할 줄 아는 거 없나? 스물여섯 먹을 동안 뭐 하고 살았길래...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네?"

같은 팀 상사 김동식 대리의 말대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별 볼일 없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극의 주인공으로 삼은 건 '영웅'이나 '성공'을 그리는 기존 '오피스 드라마'의 문법과 다르다. 상사가 장그래의 능력을 평가절하하고 업무를 맡기지 않는 장면이나, 다른 인턴들이 그를 업신여기는 장면을 덤덤하게 그려내는 것도 기존 드라마에선 보기 힘들다.

"우리 모두 다 미생이야"... 불완전함을 위로 하는 드라마

tvN <미생>의 한 장면.
 tvN <미생>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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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로 시청자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해야 하는 드라마의 기본 원칙을 정면으로 어겼음에도 <미생>은 승승장구 중이다. 케이블에서는 보기 힘든 시청률인 평균 4.6%(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가구 기준)를 기록했고, 드라마에 힘을 입어 원작 만화는 지난달 26일에 누적 판매 100만 권을 돌파했다. '예스24' 집계에 따르면 구매자의 절반 가까이(49.5%)가 30대 남성이다.

인기의 가장 큰 비결은 '공감'이다. 비유하자면 시청자들은 '완생'이 되라고 채찍질 하는 자기계발서를 잠시 내려두고 미생을 펼친 것이다. '미생'은 바둑에서 대마가 아직 완전히 살아있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완전히 죽은 바둑돌인 사석과 달리 완생으로 거듭날 여지가 있다. 미생은 완생으로 나아가는 과정 중 하나이지만 무한 경쟁 사회는 모두가 처음부터 '완생'이길 요구한다.

취업준비생들의 '고 스펙' 경쟁은 이런 세태가 반영된 결과다. 대부분의 구직 과정은 내 안의 불완전한 점을 찾아내 다른 무언가로 끊임없이 채우는 일의 반복이다. 이 일은 취업 후에도 이어진다. 헤아릴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자기계발서와 '직장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00가지 특징' 따위의 기사가 범람하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신입사원이 된 장그래에게 오상식 과장이 건넨 말은 이런 세태 속 모든 미생을 위로한다.

"난 솔직히 너 돌아온 거 반갑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우린 일당백이 필요하다고. 그래도 이왕 들어왔으니까 한번 버텨봐.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아간다는 거니까. (중략) 넌 잘 모르겠지만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 미생, 완생.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일 좀 못할 수도 있지"... 완벽함만 강요하는 세태 꼬집어

지난 7월 만들어진 '일못하는사람유니온' 회원들은 직장 생활 실수담을 공유하고 서로를 위로한다.
▲ 일못하는사람유니온 페이지. 지난 7월 만들어진 '일못하는사람유니온' 회원들은 직장 생활 실수담을 공유하고 서로를 위로한다.
ⓒ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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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해도 괜찮다'는 메시지가 비단 브라운관에서만 들리는 건 아니다. 지난 7월에 만들어진 페이스북 그룹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도 그 중 하나다. 신입사원, 단체 활동가 등 20~30대의 사회초년생으로 구성된 이 그룹에서는 11월 현재 2700여 명의 회원이 서로의 실수를 공유하며 위로한다.

이곳에서 회원들은 대놓고 '나 일 못함'을 인증한다. 예컨대 "단체 후원 주점 티켓을 만들었는데 디자인도 발로 한데다 날짜까지 틀렸다" "두 시간째 보도자료 붙잡고 있는데 이렇게 해도 오타가 계속 나온다"는 식이다. 시청자가 장그래에게 위안을 얻었던 것처럼 이들 역시 서로의 실수를 공유하며 '일못(일 못 하는 사람)'이 나만이 아님을 확인한다. 그리고 "일 좀 못하면 어때"라며 당당히 '미생'임을 선언한다.

이 커뮤니티를 처음 만든 대학원생 여정훈(30)씨는 지난 6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마땅히 회사가 일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음에도, 일처리를 능숙하게 하지 못하면 그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리는 세태를 꼬집고 싶었다"고 밝혔다. 또한 여씨는 "이는 불완전함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온라인으로 만난 '일못'들은 9일 오프라인 모임을 한다. 이들은 스트레스를 날린다는 뜻으로 '분노의 초'를 태우며 애환을 나눌 예정이다.


태그:#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불완전, #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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