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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황금리의 폐가의 창에서 바라본 가을 풍경
▲ 양평 황금리 양평 황금리의 폐가의 창에서 바라본 가을 풍경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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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가을비가 내렸다. 가을비에 무거워진 은행나무 노란 이파리들이 거리를 수 놓았다. 도심의 가로수로 심은 은행나무의 이파리들은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짓밟히며 소멸한다. 은행나무는 은행잎을 떨구기 전, 나무마다 무성하게 열린 열매의 냄새로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지 오래됐다.

언제부터인지 은행나무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처음 열매가 열렸을 때는 도로에 떨어진 열매를 줍느라 교통사고를 유발하기도 했고, 국가 소유의 것이므로 허락을 받지 않고 따면 절도죄에 걸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청소하시는 분들이 은행을 모아 팔기도 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떨어진 은행들을 줍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러다 너무 흔해지고, 도시의 은행에 중금속이 섞였네, 어쩌네 하는 뉴스가 한 번 나온 이후로 그들은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도시의 나무는 단풍이 들어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러나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흙에 떨어진 낙엽들은 쌓이고 쌓여 낙엽 밟는 소리를 선물하고, 가을 햇살과 바람에 잘 말라 바스락거리며 흙으로 돌아간다. 게다가 남은 것들은 겨울을 나는 지의류 식물에게 따스함을 선물해 준다.

똑같은 낙엽이고 단풍이지만 뿌리 내린 곳이 어딘지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다. 양평의 폐가 창문에서 바라본 가을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을씨년스럽게 보였던 창은 프레임이 되었고, 그 안에 가을이 들어와 있으니 한 폭의 그림 같다.

조금 더 서울 쪽으로 올라오다 하남시의 춘궁동 동사지에 들렀다. 보현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고, 그 곳에는 보물 12호와 13호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동사지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13호)과 오층석탑(보물 12호).
▲ 광주 춘궁리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동사지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13호)과 오층석탑(보물 12호).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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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매섭게도 분다. 단풍든 나무들이 저마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점점 가벼워진다. 차마 미안해서 떨구지 못하던 나뭇잎들을 바람을 핑계 삼아 떨구기도 한다. 이른바 명분일 터이다.

햇살은 맑은데 차가운 바람이 불어 가을도 끝자락에 서 있음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 가을 햇살은 맑은데 차가운 바람이 불어 가을도 끝자락에 서 있음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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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붙잡고 싶지만, 보낼 수밖에 없어."

어떤 나무는 이미 이파리를 다 놓았고, 어떤 나무는 절반을 놓았으며, 어떤 나무는 이제 막 시작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사철 푸른 나무가 아닌 바에는 이파리를 다 놓을 터이다. 스스로 떨어뜨리지 못하는 마음 약한 나무를 위해 가을바람이 부는 것이리라. 마음이 약해 내내 이파리를 달고 있으면, 결국 나뭇잎에게도 나무에게도 좋지 않음이니 마음 약해 결단하지 못한 나무를 위한 배려가 가을 바람일터이다.

간혹 살면서 명확하게 '예'와 '아니오'를 할 수 없을 때가 있으며, 이것인지 저것인지 선택하기가 모호한 때가 있다. 그 망설임 앞에서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최선의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최악도 아니라는 것은 삶을 살아가다 보면 안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가을빛
▲ 가을바람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가을빛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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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모습은 그 많은 선택의 시간 속에서 선택한 것들이 만들어 놓은 자화상이다. 누구나,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했으며 간혹 떠밀려 선택했다고 할지라도 떠밀리길 바랐던, 그래서 조금은 자기만의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소심함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며, 간혹 우리는 연약하여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므로 인간이다. 가을바람이 가을빛을 만난 것일까, 가을빛이 가을바람을 만난 것일까?

그 어느 것이면 어떤가? 지금 찬바람이 불고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시린 현실은 같을 터인데.

'바람 한 점'이라고 바람은 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 점들이 모여 강풍이 되고 태풍이 되어 온 세상을 뒤엎어 버리기도 한다. 그것이 점의 힘이다.

차마 미련이 남아 놓지 못한 이파리들을 바람따라 날려보내는 나무들
▲ 가을바람 차마 미련이 남아 놓지 못한 이파리들을 바람따라 날려보내는 나무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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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점이다.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들에 침묵하지 말고, 한 사람의 점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한결 사람 사는 세상다울 것이다.


태그:#가을빛, #은행나무, #가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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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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