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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 차 나눔을 하고 있는 기자와 화가.
 작업실에서 차 나눔을 하고 있는 기자와 화가.
ⓒ 허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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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무성한 산골의 폐교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전남 곡성군 겸면 마삼분교장. 그는 학생들은 하나도 없는 폐교의 교장 선생님인가. 마삼분교는 현재 화가 유승우씨의 거처다. 현관을 들어서면 왼쪽 교실이 갤러리이고 오른쪽은 그의 작업실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 작가, 유승우

차 나눔을 하고 있는 유승우 화백과 기자.
 차 나눔을 하고 있는 유승우 화백과 기자.
ⓒ 허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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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데뷔 이후 지금까지 추상미술의 외길을 걸어온 화가. 1987년 중앙대를 사직하고 서울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았으며 지리산 자락에 들어가 노동으로 삶을 껴안고 목부 노릇도 하다가 장흥 관산의 폐교에 자리를 틀고 20년 만에 다시 개인전으로 돌아왔던 화가. 지난 10일, 그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한 일간신문과의 인터뷰를 본다.

"속에서 올라오는, 말로는 할 수 없는 그 무형의 덩어리 같은 것을 내놓고 싶었고, 그것이 추상화가 됐습니다."
"내면의 어떤 응어리 같은 것, 무형의 덩어리 같은 것, 말로 형상 짓기 어려운 실질적인 그 무엇, 그렇지만 쏟아내 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것 등이 붓 너울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부친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일제 강점기 동경제국대학에서 독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부친은 해방 조국에 돌아와 정치학 교수로 일하다 시대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그가 태어난 지 3개월 만이었다.

그의 모친은 경성사범을 졸업하고 나주에서 교편을 잡던 분이었다. 남편을 여의고 어머니는 방황했다. 타지로 돌기도 하고 몇 년씩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어린아이는 남의 손에 맡겨지고 보호자는 수시로 바뀌었다.

화가 유승우의 작업실이 된 곡성의 폐교 마삼분교
▲ 화가 유승우의 거처 화가 유승우의 작업실이 된 곡성의 폐교 마삼분교
ⓒ 신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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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할 대상이 없는 어린 시절은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결핍의 원형질이 아니었을까. 그의 작품 '붓-너울'에서 상처 입은 새의 형상과 사랑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을 본다. 유승우 화백의 지인인 정신과 전문의 고천석씨는 그의 작품세계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어른에 기댈 수 없는 아이들은 불안하다. 생의 초기에 주어진 정서적 결핍으로 인한 고통은 사람의 몸에 각인된다."
"그는 세상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기에 때 이르게 예민했고, 심하게 아팠고, 많이 두렵고 외로웠다."

천틀에 기름, 197.0×290.9cm.
▲ '붓-너울' 천틀에 기름, 197.0×290.9cm.
ⓒ 신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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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감히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그의 오랜 방황은 어린 시절 잠재해 있던 내면의 온갖 분노와 슬픔과 외로움과 그리움이 자신의 육체에 자학적으로 스며드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터져 올라오는 그 무언가를 가눌 길이 없어 벽에 온통 먹물로 낙서하기 시작했다.

붓으로 내면의 춤을 추며 고통의 예술적 승화를 체득한 것이다. 그런 그를 심상찮게 보던 미술 선생을 하던 외숙부가 그림을 그려보라며 부추겼다. 그의 추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당대의 현실은 그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전통에 갇혀 있고 협소했다. 대학은 사실 위주의 풍토여서 그에게 맞지 않았다.

끌어주는 선생이나 선배가 없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란 독학의 길이다. 외국 작가의 작품을 사진으로 보기 시작하며 그는 그렇게 척박한 추상의 땅에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예술적인 스승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음악이 들리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뜨거운 추상의 비조, 바실리 칸딘스키인지도 모른다.

복도에 전시된 화가의 기억들.
▲ 폐교의 복도 복도에 전시된 화가의 기억들.
ⓒ 신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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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는 외면보다 내면을 보는 사람이다. 세속적인 영예가 보장되는 제도권을 벗어나 왜 이런 유배의 땅에 둥지를 틀고 있는지 수긍이 갔다. 그 영혼이 순수하고 자유롭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생각이란 단어보다 '여김'을 좋아한다면서 그림은 그 그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가져가는 게 맞다고 그러지 못했던 아쉬움을 이야기해주며 내게 '여김'을 물었다.

나 또한 한 사람이라도 깊이 있게 들어주는 것이 기쁜 일이다며 노래를 부르다 보니 박용래 시인 따님과 연결된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내가 가장 좋아했고 애착이 가는 시에 붙인 노래를 그분의 유족들이 좋아해주셔서 행복했다는. 그와의 만남도 실은 우연하게 후배를 통해 내 노래가 그의 귀에 들린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는 앞으로 남은 작품 활동 기간을 몇 년 넘게 보지 않고 있었다. 작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작은 전시회가 주었던 감동을 이야기하며 작품 몇 개로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는 그림도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앞서면 자신의 순수한 내면의 말을 잃게 된다고 했다. 나는 내가 처음 노래를 만들고 불렀을 때의 마음을 떠올렸다.

"현재는 작은 현재와 큰 과거의 결합물" - 유승우

그는 2009년엔 광주에 문화 사랑방인 "잊고, 잇고, 있고"를 오픈하여, 인문학강좌, 음악공연, 미술 감상 등 바쁜 현대사회에 문화의 사랑방 역할을 자처하여 지역사회 주민들과 소통의 자리를 마련한 바 있다. 그가 명명한 "잊고(forgetting), 잇고(connecting), 있고(being)"란 아픈 과거는 "잊고", 현재의 인연은 "이어가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폐교의 교실과 복도까지 자신이 살아온 기억의 지층을 켜켜이 쌓고 있었다. 흡사 기억의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그는 그렇게 구체적 형상을 수없이 그리고 지우면서 내면의 본질인 추상으로 나아가는 지도 모른다.

"현실보다 더 초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것은 없다" - 조르조 모란디

우리는 곡성에 나가 저녁을 먹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물을 길었다. 아무리 차가 좋아도 그 맛을 드러내는 것은 물이 중요하다며 우연히 우체부를 통해 좋은 샘물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정성을 들여 차를 달였다. 귀한 손님이 올 때만 꺼낸다는 운남성의 보이차였다. 그가 차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술과 담배, 커피로 찌든 자신과의 절단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화가가 달여준 보이차, 찻물이 맑고 은은했다.
 화가가 달여준 보이차, 찻물이 맑고 은은했다.
ⓒ 신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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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차 나눔을 통해 좋은 사람들과는 소통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썼다는 '절연의 서'는 속된 인연들은 끊고 찻물과 같은 맑은 인연을 나누고 싶다는 의미로 들렸다. 차 나눔을 마무리하고 일어서려는데 그가 2005년 전시회 도록을 내민다.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마삼 분교는 한 예술가의 순수 추상의 처소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밖을 나서는데 검은 미루나무 위로 하늘 높이 반달이 청청 걸려 있었다.

"그의 작업에서 간취되는 야성은 보다 자유로운 숨결을 중시한다. 흡사 바짝 다가서면 거친 호흡이 후각을 간질이는 듯한 그런 풋풋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장식적인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길이다."
"정작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은 일체의 간섭으로부터 놓여난, 완벽한 진공의 상태와 같은 감염되지 않은 순수한 감정 및 정신을 구현하는 일이다. 그런 연후에 마침내 자연조차도 놓아버리고 홀연히 자유로운 초법의 경계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 - 신항섭(미술평론가)
"자연의 이미지를 무의식의 상태에서 캔버스에 담아내고 있다" - 장경화(광주시립미술관)

유승우(劉承宇) 화백 이력
1971 서라벌 예술대학 미술학과 졸업

개인전
2011 유승우-비움을 통한 '잇고',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 광주
2006 유승우의 작은그림전, 목지인전시관, 곡성
2005 금호미술관 초대 유승우의 '그림 펴 보임', 금호미술관, 서울
1984 유승우전, 관훈미술관, 서울

주요 단체전
2011 방방곡곡, 영은미술관, 경기도
2008 지루함의 미학 모노크롬, 광주시립미술관 금남로분관, 광주
2006 차향 속의 삶과 예술, 의재미술관, 광주
2005 회복-호남 추상미술의 원류를 찾아서, 우제길미술관, 광주
1989 관훈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 초대작가 89인전, 관훈미술관, 서울
1986 현․장 39인전, 우정미술관, 서울
정예작가 초대전, 서울갤러리, 서울
현대 미술 어제와 오늘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전
1985 한국현대미술전, 그랑팔레, 파리
1985 ~ 92 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84 임팩트 국제미술제, 교토시미술관, 교토
한국현대작가전, 한국문화원, 로스앤젤레스
1981 에꼴 드 서울, 관훈미술관, 서울
1977 아세아현대미술전, 우에노미술관, 동경
1975 현대작가 에뽀크전, 전일미술관, 광주
제3회 Independants 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74 현대작가 에뽀크전, 명동화랑, 서울
한국미술협회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73 현대작가 에뽀크전, 상공회의소 화랑, 광주



태그:#유승우, #신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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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리뷰어. 2013년 계간 <문학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명왕성 소녀>(2023), <물 위의 현>(2015), 캘리그래피에세이 <캘리그래피 논어>(2018), <캘리그래피 노자와 장자>, <사랑으로 왔으니 사랑으로 흘러가라>(2016)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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