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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 과학기술계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됐던 이슈가 있다. 50%에 이르는 정부 출연 연구기관(아래 출연연)의 비정규직 인력을 어떻게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박근혜·문재인 두 후보 모두 해결 의지를 보였으며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연달아 관련 대책이 발표됐다. 지난해 4월 고용노동부는 2015년까지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정규직(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힌 바 있지만, 정작 추가 예산에 대한 계획이 없어 사실상의 비정규직 해고 방안이 아니냐는 우려가 많았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현재, 각 출연연에서는 자체적인 방침을 세워 비정규직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준비가 안 된 정책과 시행과정에서의 혼선으로 인해 곳곳에서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사례] 한 출연연에서 박사 후 연수연구원(통칭 포닥)으로 근무하고 있는 A씨는 계약 만료를 한 달 앞둔 올해 1월, 연구책임자로부터 재계약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최근 해당 출연연에서는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해 근무한지 3년 이내의 직원에게는 정규직 대비 70%, 3년 이상인 직원에게는 별정직 전환 후 정규직 대비 85%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방침을 세운 바 있는데, 이것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혼선이 생겨 근속 3년이 지나면 해고한다는 것으로 와전된 것이다.

A씨가 인사팀에 계속 문의한 결과 착오였음을 알고 1년 계약 연장에는 성공한 상태이지만, 현재 방침이 유지되는 한 내년에도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현행 제도에서는 대부분의 비정규직 연구원 임금이 개별 연구책임자의 연구비에서 지출되는데, 연구책임자 입장에서는 한정된 연구비에서 인건비 지출을 늘리는 것이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상당수의 연구책임자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3년 이상 근무한 연구원들을 해고하고 신규 인력을 채용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핵심연구분야 우수인력" 신청 자격
 "핵심연구분야 우수인력" 신청 자격
ⓒ 기초기술연구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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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신규 인력 채용도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우선은 선발 기준이 까다로워졌다. 연수연구원 중 처우가 가장 좋은 편에 속하는 '핵심연구분야 우수인력'의 경우 지난해부터 '학위 취득 후 3년 이내, 고용보험 6개월 이상 미가입'이라는 조건이 추가됐다.

문제는 대학원 과정에서 조교로 일한 경우에도 고용보험에 가입되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학업을 이어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러한 이들은 지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핵심연구분야 우수인력에 지원하는 인원이 정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논란이 생기자 '학위 취득 후 3년'이란 기준을 '나이 제한'으로 바꾸는 등 몇 가지 변화가 있었으나 대부분 말바꾸기에 지나지 않고, 다른 직장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은 지원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은 여전하다. 비정규직 연구원의 비율을 낮추기 위해 신규 인력 채용을 억제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정규직 늘리는 건 좋은데, 문제는 꼼수"

[사례] 얼마 전 박사학위를 받고 출연연 연수연구원으로 일하게 된 B씨는 자신의 근로계약서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일반적인 호칭인 연수연구원, 위촉연구원이 아니라 '인턴'이라고 기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을 알아본 결과 인턴의 경우 노동자로 보지 않기 때문에 통계상 비정규직 비율을 늘리지 않기 위해 인턴으로 채용한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꼼수였던 것인데 B씨의 입장에서는 사전에 연구책임자로부터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황당하고 불쾌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당장 임금이나 계약 기간에서 손해를 보는 것도 문제이고, 나중에 정규직으로 지원하거나 이직할 경우에 경력 면에서도 손해를 보지 않을지 불안하다는 것이 B씨의 심정이다.

사용자라고 할 수 있는 연구책임자들의 입장에서도 현재 방침에 불만이 많다. 당장 연구비에서 인건비 지출이 많아지는 것도 부담이고, 숙련된 인력을 계속 고용할 수 없는 점도 연구 역량 면에서 손실일 수밖에 없다.

출연연 선임연구원 C씨는 "비정규직 대신 정규직을 늘려야 한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그 부담을 각각의 연구책임자에게 돌린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면 인건비가 늘어나는 것이 당연한데, 예산 확보나 연구비 인상 없이 비정규직 숫자만 줄이려는 현재의 정책 아래서는 현장에서 꼼수만 나올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출연연 정규직 및 비정규직 노동자 수의 변화 (출처: 정부출연연 비정규직 실태 보고서, 19대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자료집)
 출연연 정규직 및 비정규직 노동자 수의 변화 (출처: 정부출연연 비정규직 실태 보고서, 19대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자료집)
ⓒ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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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자료집에 따르면 2014년 3월 현재 출연연 비정규직 비율은 30.5%로 2년 전에 비해 많이 감소한 것처럼 나타났다. 그러나 2012년 자료와 비교해보면 정규직은 1만123명에서 1만860명으로 소폭 증가한 것에 비해, 비정규직은 1만149명에서 5126명(간접고용 포함)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아니라 대량 해고에 의해 비정규직 비율이 줄어든 것임이 확인된다.

A씨는 이번 일을 겪은 후 "솔직히 이제 소속감도 많이 떨어지고 연구에 대한 의욕도 약해지는 게 사실"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정책이 지속된다면 숙련 연구 인력의 감소는 물론이고 일선 연구 인력의 사기도 저하돼 총체적인 연구 역량 저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눈에 보이는 숫자를 줄이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현장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고 제대로 된 예산 확보를 통해 근본적인 비정규직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진철님은 청년과학기술자모임(YESA)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YESA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바른 과학기술자의 길을 고민하는 젊은 과학기술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메일: joinyesa@gmail.com, 카페: cafe.daum.net/yesa2014)



태그:#출연연 비정규직, #정부출연연구기관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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