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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키나와 수도 나하(那覇)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신도심이라고 한다면 오모로마치(おもろ町)를 가리킨다. 나는 오모로마치에 있는 오키나와 현립박물관·미술관(沖繩県立博物館·美術館)으로 가기 위해 모노레일인 유이레일(ゆいレール)을 타고 오모로마치역(おもろ町駅)에서 내렸다. 역에서 내려 걸으면서 보니, 나하 구도심의 좁고 번잡함과는 달리 도로들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현대적 디자인의 건물들이 자연친화적인 녹지대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서 새로운 도시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오키나와 현립박물관·미술관은 오모로마치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온다. 주변에는 재개발지답게 DFS 갤러리아, 나하 메인 플레이스, 애플타운 등 초대형 쇼핑몰들이 가득한데, 메인플레이스 바로 맞은편에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나와 아내는 오키나와의 강렬한 햇볕을 피해 그늘을 찾아가며 길을 걸었다. 흐린 날이 지나고 해가 나오는 날이 되자 남국의 햇볕이 너무 부담스럽다.  

오키나와 현립박물관은 1945년에 미군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승리하여 오키나와를 점령한 후, 미국인들에게 오키나와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서 만든 '오키나와 진열관'이 뿌리가 되는 박물관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이동을 거쳤던 오키나와 현립박물관은 수장고가 유물로 넘치게 되자 2007년 현재의 위치로 이동하여 새롭게 개관하였다. 당당한 한 국가를 이루었던 오키나와의 역사를 둘러보기 위해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경외감을 주는 곳이다.
▲ 오키나와 현립박물관·미술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경외감을 주는 곳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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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현립 박물관은 건축물 자체로도 꽤 유명하다. 박물관에 가까워질수록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장중한 박물관의 외관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이 박물관 건물을 처음 만났을 때, 오키나와의 다른 건축물과는 차원이 다른 건축 디자인의 힘을 느꼈다. 오키나와의 성, 구스쿠(城, グスク)를 이미지화한 박물관의 외관은 성벽과 같은 스케일과 압도적인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한참 동안 노력을 들여 지은 거대한 아이보리색 시멘트 건축물은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의 저력을 느끼게 한다.

전통이 녹아든 이 현대적 건축물의 거대한 외관을 딱딱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외관에 규칙적으로 수없이 슝슝 뚫려 있는 구멍들이다. 이 독특한 격자무늬 같은 구멍을 통해서 햇볕의 조각들이 들어와서 건물의 바닥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림자들을 만들어낸다. 콘크리트 외벽에 구멍을 내었을 뿐인데 이렇게 징그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신기하다. 항상 보아오던 햇볕이 괜히 마음 속의 닫혀 있던 감성을 건드린다.

구멍 뚫린 벽면을 통해 햇빛이 아름답게 들어온다.
▲ 박물관·미술관의 이중벽체 구멍 뚫린 벽면을 통해 햇빛이 아름답게 들어온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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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박물관의 중첩된 2개의 외벽은 '더블 스킨(Double Skin)'이라고 불린다. 이 하얀 더블 스킨은 남국의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실내의 유물을 보호할 뿐 아니라 배수, 배관을 위한 친환경적인 공간으로도 이용된다. 그리고 이 더블 스킨은 여름의 여행자들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두 외벽 사이의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는 기하학적이면서도 햇빛을 이용함으로써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박물관 건물 외부의 정갈한 잔디밭에는 오키나와 전통민가와 함께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 중이다. 오키나와 전통 민가 내부에는 불단과 부뚜막, 전통 방적기와 불단을 둘러볼 수 있다. 서민의 가옥에 차려놓은 불단은 오키나와 인들의 불교가 집 안에까지 들어온 가내 종교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옆에는 오키나와 현청을 새로 지으면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와쿠타코(わくたこ, 湧田古) 가마터를 그대로 가져다가 전시하고 있다. 도자기를 주력 관광홍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오키나와에서는 이 도자기 가마터의 발견이 너무나 반가웠던 일이었고 그래서 박물관 정면에 이 가마터를 복원해 놓은 것이다.

곡물을 보호하기 위해 바닥을 아주 높인 창고이다.
▲ 타카쿠라 곡물을 보호하기 위해 바닥을 아주 높인 창고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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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높은 곳에 바닥을 만든 타카쿠라(高倉)는 그 용도를 알고보기 전에는 창고같이 보이지 않는다. 창고가 마치 우리나라의 오두막이나 정자같이 보인다. 초가집의 지붕 같은 지붕 아래에 5개의 나무 기둥으로 만든 타카쿠라는 더운 여름날의 휴식처같이 시원해 보인다. 오키나와의 민가에서는 그들이 지켜야 할 곡물을 이와 같은 초가지붕 바로 아래의 높은 곳에 두었다. 시원하고 습기가 적으며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곡물을 보관하고 쥐와 같은 동물의 침입에서도 곡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바닥이 한참 높은 창고를 만들었을 것이다.

나무 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을 형상화하고 있다.
▲ 박물관·미술관의 중앙홀 나무 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을 형상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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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치 도리이(鳥居)를 연상시키는 입구를 통해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중앙입구로 들어서니 로비 중앙이 시원스럽게 뚫려 있고 천장과 벽면은 온통 하얀 세상이다. 로비의 천장은 높기만 한데 천장에서 태양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 로비 중앙부는 나무 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라는 이미지를 구현한 공간이다. 소철을 연상하여 디자인한 나무 형상의 15m  철골 기둥에서는 마치 나뭇잎을 통과한 것 같은 햇빛이 들어오고 있다. 천장의 둥근 원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과 온통 하얀색의 벽면이 시원하다. 마치 버섯을 닮은 기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넓은 공간에 신비스러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오키나와 현립박물관·미술관의 내부 관람코스는 박물관 상설전시, 미술관 상설전시, 특별전시의 3가지로 나뉜다. 나는 3가지 코스의 표를 모두 구매하였다. 1층 중앙홀의 양쪽에 박물관과 미술관이 배치되어 있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미술관이고 왼쪽으로 가면 박물관이다. 나는 오키나와의 미술관을 구경하고 싶다는 아내의 바램에 따라 미술관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오키나와 출신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 미술관 오키나와 출신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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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 함께 미술관 입구를 상징하는 붉은 벽을 지나 미술관에 들어섰다. 오키나와 현립 미술관은 주로 오키나와 출신 작가나 오키나와에 연고가 있는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남국의 화려한 햇살과 따스함을 화폭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미술관으로서 전시작품의 질로 보면 오키나와 최고의 여행지이다.

박물관 입구의 짙은 푸른색은 오키나와 바다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생각나게 한다. 박물관 입구를 들어서면 유리 바닥 아래에 마치 수족관 입구같이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바닷 속과 모래사장이 있고 오키나와 근해에서 서식하는 해양생물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입구의 양 옆 벽면과 정면에는 오키나와의 바다사진과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역사를 상징하는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나는 오키나와의 바다 속으로 들어서는 듯한 감흥을 느꼈다.

오키나와 현립박물관에는 역사 전시물과 함께 오키나와의 식생 자료를 함께 전시하는 자연사 전시실이 있다. 식생 자료관에 들어서면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숲 속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숲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지는 곳이다.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공룡을 비롯한 원시 동물들의 화석과 오키나와 본섬 및 부속 섬들에 살고 있는 여러 동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형 와이드 스크린에서는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오키나와인들의 삶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은 공간이지만 전시물들을 꾸민 이들의 정성과 노력이 느껴지는 훌륭한 공간이다.

바닷물에 침식된 오키나와의 석회암 바위들이 절경을 만들고 있다.
▲ 오키나와 석회암 지형 바닷물에 침식된 오키나와의 석회암 바위들이 절경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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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지리환경 모형과 디스플레이 스크린을 따라 가면 오키나와의 아름답고 역동적인 자연환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관광명소로 이름난 오키나와 바닷가의 석회암 지형은 기묘한 형상으로 눈길을 잡아끈다. 산호가 쌓여 만들어진 석회암 지대는 바닷물과 지하수로 인해 침식되고 녹아내리면서 오키나와의 절경을 만들고 있다. 아무래도 이 훌륭한 박물관에서 오키나와의 자연환경에 대한 공부를 하고 오키나와 해변의 명소를 둘러본다면 더 풍성한 여행이 될 듯 싶다.

온 태평양을 무대로 주유하는 바다거북의 행동반경이 신비롭기만 하다.
▲ 바다거북 온 태평양을 무대로 주유하는 바다거북의 행동반경이 신비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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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전시실에는 7월~8월이 되면 오키나와의 넓은 백사장과 울창한 숲으로 산란을 하러오는 오키나와 바다거북의 생활반경이 상세히 드러나 있다. 온 태평양을 넓게 주유하는 바다거북들이 꼭 오키나와 바닷가까지 찾아와 알을 낳고 가는 것은 아직 인간의 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자연의 신비이다. 나이 많은 바다거북의 박제는 오랜 세월동안 바다를 유유히 누볐을 한 바다생물의 삶을 머리 속으로 상상해보게 한다.

화려한 전통복식의 모형을 통해 류큐의 화려한 문화를 실감한다.
▲ 중앙홀 전시유물 화려한 전통복식의 모형을 통해 류큐의 화려한 문화를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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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중앙의 넓은 홀에는 오키나와 역사를 주제로 한 대형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중앙 홀을 둘러싼 5개의 전시실에는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부터 류큐 왕국, 사쓰마(薩摩, さつま)의 지배, 오키나와 전투, 미군 통치시대 그리고 현대까지의 오키나와를 고고학, 미술공예, 자연사, 역사, 민속 등을 주제로 하여 전시하고 있다.

특히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왔던 오키나와 인들의 생활상이 구석기 시대부터 미니어처 모형으로 사실적으로 전시되어 당시의 모습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의 생활사는 류큐 왕국 귀족들의 복식으로도 재현되어 당시의 화려한 문화의 면면을 보여준다. 류큐왕국의 문화의 다양성은 놀라우며, 화려했던 류큐 왕국의 몰락이 아쉽기만 하다.

고고학 전시실에는 연마된 평평한 돌의 뒷쪽에 무늬 같은 기호가 새겨진 각화석판이 앞뒤에서 볼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다. 요미탕(読谷)에서 발견된 연대불명의 석판은 도대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오키나와의 문자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바퀴, 배, 제사장, 숫자를 표현했다고 생각되어지는 무늬도 있고, 새를 표현한 것 같은 도장같이 생긴 기호도 있다. 이 기호들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고 있을까?

성지의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박물관 내에서도 느껴진다.
▲ 우타키 성지의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박물관 내에서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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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홀의 중앙에서는 오키나와 남서제도 각 마을의 성지인 우타키(御嶽)와 그곳에서 기도하는 카민츄(神人)의 모형이 나를 보고 있다. 16세기부터 우타키에서 국가행사였던 제사를 주관하던 카민츄는 이곳에서 신내림 의례를 거행하고 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예지력이 높은 여성이 제사장을 맡았듯이 오키나와에서도 왕이 임명한 여성들만이 세습제로 제사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박물관 안이지만 우타키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전해지는 것이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오키나와 바다로 나아가던 통나무 목선이다.
▲ 전통목선 사바니 오키나와 바다로 나아가던 통나무 목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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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홀을 한 바퀴 돌다가 류큐 왕국 지도 모형을 배경으로 류큐 왕국의 활발했던 해상교통 루트를 보여주는 전시물 앞에 멈춰 섰다. 류큐 왕국은 해상무역으로 생존해나갔던 국가로서 동아시아 해상국제교역의 중심국가였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어선인 사바니(サバニ) 전시물이 마치 실물처럼 전시되어 있다.

과거 류큐인들은 이 통나무배를 타고 오키나와 앞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났을 것이다. 대양을 헤쳐나가던 배는 마치 오키나와의 바다 앞으로 흘러 내려갈 것 같이 보인다. 마치 바다가 박물관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통나무 배를 보면서 바다를 향해 나아가던 오키나와 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13년 5월 20일~5월 23일의 일본 오키나와 여행 기록입니다.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태그:#일본여행, #오키나와, #나하, #현립박물관, #현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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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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