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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은행들은 2등급 채권을 대량으로 매수한 상태야. 그런데 그 채권 가치가 떨어졌고, 농민에게 융자해 준 돈이나 부동산 대출도 담보 설정이 부적절했더군." - <케인스 하이에크> 168쪽

2008년 금융위기를 예고한 말이 아니다. 1931년 케인스가 자신의 친구 오즈월드 포크에게 미국의 위태로운 상황을 전하는 말이었다. 얼마 전, 미국 부동산가격 하락에 따른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 사태는 1930년대의 논쟁을 되살려 놓았다. 자유시장이 옳은가, 정부 개입이 옳은가. 결국 이 질문은 시대를 거슬러 두 거인 '케인스'와 '하이에크'를 불러낸다.

처음부터 그들이 갈라섰던 것은 아니었다. 하이에크는 케인스에게 흔한 책 한 권을 부탁하는 정중한 편지를 보냈고, 케인스는 친히 자신도 그 책이 없음을 답했다. 그러나 하이에크가 영국에 진출하며 본격적으로 맞붙기 시작했다. 햇병아리였던 하이에크는 케인스를 향해 다소 격한 언사를 동원했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오스트리아학파의 첨병 노릇을 하기 위한 것.
세계경제와 정치 지형을 바꾼 세기의 대격돌 <케인스 하이에크>
▲ 책표지 세계경제와 정치 지형을 바꾼 세기의 대격돌 <케인스 하이에크>
ⓒ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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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 둘의 논쟁은 그쳤지만, 경제는 그들의 그림자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흥미진진한 두 천재의 주장이 아직도 종지부를 찍지 못한 채 격돌하고 있다. 세계 경제와 정치 지형을 바꾼 세기의 대격돌을 영국의 언론인 니컬러스 웝숏이 <케인스 하이에크>를 통해 정리했다.

케인스는 실업 문제를 비롯해 민생을 좀 더 순탄하게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반면, 하이에크는 시장은 인위적으로 바꾸기 어려운 자연적인 힘에 따라 작동하며, 따라서 정부가 시장에 간섭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봤다. - <케인스 하이에크> 95쪽

좀 더 포괄적으로 본다면 케인스는 인간에게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고, 하이에크는 인간은 모든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경제의 자연법칙에 따라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삶과 정부를 서로 다른 시각으로 대변한 것이다.

이 책은 케인스와 하이에크 시대부터 그들이 떠난 뒤, 바로 최근의 일까지 아직도 영향력이 유효한 모든 논쟁을 다뤘다. 풍부한 사료를 통한 흥미로운 서사는 독자가 마치 그 세계를 살아가며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직접 남긴 대화를 최대한 인용해 전체적으로 객관적인 논지를 유지했다. 결국 판단은 독자의 몫이란 셈이다.

진정한 자본주의의 수호자 '케인스'

케인스는 자유방임의 원리대로 개인의 사리 추구가 공익을 보장해 준다면 "기업가가 자기 잇속을 추구하는 것만으로 정치철학자가 추구할 최고선(最高善)이 달성될 테니 정치철학자는 기업가에게 자기 일을 맡기고 속 편하게 은퇴하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달리 말해 자기 잇속에만 기대는 것은 그가 보기에 정치의 종말이었다. - <케인스 하이에크> 83쪽

케인스는 양 진영에서 공격받았다. 한쪽에서는 '망해 가는 시스템을 살려 낸 자본주의 옹호자'라는 비난을, 그 반대에서는 '겉으로는 온화한 화법으로 말을 걸지만 뒤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야금야금 끌어들이는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 식이었다.

하지만 웃기는 사실은 오히려 하이에크가 한동안 사회민주주의자였던 적은 있지만, 케인스는 어떤 부류의 사회주의에도 가담한 적이 없었단 점이다. 케인스는 적어도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경제적 풍요를 고민했다.

케인스는 모든 사람이 고용되는 사회가 사상과 행동의 독립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믿었고, 사상과 행동의 독립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보장해 준다고 생각했다. 마치 국가가 경제를 모두 통제하는 사회가 아니라, 배의 방향키를 살짝 조절함으로써 선원들이 풍요와 만족을 누리게 하자는 것이다.

그의 모든 고민은 세기의 명작 <일반이론>에 고스란히 담겼다. 케인스의 <화폐론>에 독설을 쏟아냈던 하이에크도 <일반이론>이 출판된 직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MIT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케인스의 <일반이론>을 이렇게 평했다.

"이 책은 엉망으로 저술된 책이고 짜임새도 엉성하다. 거만하고 심술궂으며 논쟁적인 어투, 심지어 감사의 글까지 너그럽지 못하다. 대단한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별것 아닌 너저분한 내용이 아주 많다. …… 번득이는 통찰과 직관이 지루한 수식과 섞여있고, 어색한 정의에 뒤따라 갑자기 뇌리에 꽂히는 화려한 언술이 등장한다. 결국 책의 내용을 모두 파악하고 나면 그 분석이 아주 당연하면서도 새로운 것임을 알게 된다. 한마디로 천재가 쓴 책이다." - <케인스 하이에크> 273쪽

결국 지난 금융위기에 대응했던 미국 정부의 방침은 철저하게 케인스의 이론에 따른 것이었다. 닉슨의 경제자문위원장을 역임한 허버트 스타인은 "자유 경제 체제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변화를 주창하는 심각한 도전이 일었을 때 그 자유 경제 체제의 구원을 도왔던 사람은 바로 케인스"라고 말했다.

자유로운 유토피아를 꿈꿨던 '하이에크'

고국의 젊은 병사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했던 하이에크가 고향에 돌아와 목격한 것은 초토화된 빈이었다. 곧이어 오스트리아 경제는 급격한 물가 상승에 시달렸고 국민들은 고초를 겪었다. 특히 하이에크는 물가 상승으로 인해 부모가 모아 둔 저축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이때의 아픈 경험은 그가 망가진 경제를 물가 상승으로 해결하자는 주장에 늘 단호하게 반대하게 만들었다.

하이에크는 까다로운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해법은 없다고 집요하게 주장했고, 실업을 해결하려고 정부가 거액을 지출하면 걷잡을 수 없는 물가 상승을 유발할 뿐 아니라 폭압적 정치를 초래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이에크가 케인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은 놀랍게도 케인스 치하의 영토인 영국이었다. 그러나 그의 초보적인 영어 회화와 오스트리아식 강세는 그의 열정에 큰 걸림돌이 됐다. 더군다나 그가 언급했던 개념들은 오스트리아학파에게는 당연시되던 것이었지만, 영국 경제학자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당시 영국 경제학자들은 대륙의 경제학자들을 기본적으로 매우 미심쩍어했다.

영국에 처음으로 진출한 하이에크의 불행한 출발을 '한심한 혼동 상태'라고 요약한 사람도 있었다. 그의 강연에 참석했던 한 청중의 소회를 들어보면 그의 첫 케인스에 대한 첫 포문이 기대와는 다르게 영점이 빗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그 냉랭한 분위기를 내가 깨야 할 것 같아 일어나 질문했다. '그러니까 귀하의 말씀은 내가 내일 외출해 새 외투를 사더라도 실업은 늘어날 거라는 뜻인가요?' 하이에크는 '그렇습니다'라고 답한 뒤 칠판에 그린 삼각형들을 가리키며 '하지만 왜 그런 것인지 설명하려면 수학적 논증을 아주 길게 해 나가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 <케인스 하이에크> 145쪽

그러나 그의 칼날은 점차 날카로워졌다. 케인스의 견해에 맞선 자유시장의 신봉자로, 훌륭한 맞수로 성장했다. 특히 든든한 지원군 프리드먼이 등장하며, 그는 날개를 달았다. 그의 저작 <노예의 길>은 금융위기 사태 때, 미국 도서 판매 순위 1위에 올라선 적도 있었다. 출간된 지 70년이 지났는데 말이다.

하이에크는 국가 권력이 최소한으로 축소되기를 원했고, 경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사적인 주체가 담당하기를 희망했다. 여기에는 심지어 화폐 발행까지 포함되는데, 하이에크는 화폐를 발행하는 권한을 국가가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케인스 대 하이에크' 승자는 누구인가

둘의 논쟁이 초기에는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치달았지만 (심지어 책에서는 '독을 뿜었다'고도 표현했다) 그들이 고민했던 것은 망가진 경제의 활력을 회복시킬 해법이었다. 경제가 살아나고 국민들이 고초를 겪지 않을 방법을 서로 다른 시각으로 제시했다. 지금 그의 후예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결국 케인스의 예언대로, 신자유주의가 대두됐어도 경제는 균형점을 찾지 못하고 좌초했다. 기존 고전파의 경제관에 따르면,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경제가 모든 사람이 고용되는 지점에 도달해 그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이 관념은 오스트리아학파의 주된 신조이기도 했고, 마셜이 케인스에게 가르친 '진리'이기도 했다.

균형은 '장기'에 의존한다. 케인스는 그 장기가 항상 미래의 불확정적 시점까지 지속되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시간이라고 봤다. 케인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나귀 앞에 당근을 매단 장대를 걸어 두고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난 케인스에게 한 표 던지겠다. 장기? 케인스는 이렇게 답했다지.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덧붙이는 글 | <케인스 하이에크> (니컬러스 웝숏 / 부키 / 2014.03 / 2만5000원)



케인스 하이에크 - 세계 경제와 정치 지형을 바꾼 세기의 대격돌

니컬러스 웝숏 지음, 김홍식 옮김, 부키(2014)


태그:#케인스, #하이에크, #니컬러스 웝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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