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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군대에서 발생한 인권유린 사건들을 세상에 드러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전력해왔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군대에서 발생한 인권유린 사건들을 세상에 드러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전력해왔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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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종양에 두통약을 처방받고 숨진 병사, 상관의 성추행과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군 장교, SNS(사회관계망서비스)상에서 대통령을 비판했다가 상관모욕죄로 재판에 넘겨졌던 육사 출신 장교.'

잊을만하면 매년 되풀이 되는 군 의료사고, 성범죄, 인권유린 사건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군인권센터 소장 임태훈(37)씨다.

동성애자인권연대 대표를 역임했던 임씨는 지난 2004년 군대내 동성애 행위를 처벌하는 군형법 92조 계간조항,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분류하는 징병 신체검사에 저항해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구속됐다. 임씨는 병역 거부 소견서에서 "현행 징병신체검사에 성소수자를 가려내기 위한 항목이 있다"며 "이는 동성애를 정신병에서 제외한 세계보건기구와 국제정신의학회의 기준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동성애자를 차별하고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대한민국 군대를 시민불복종의 의미에서 거부한다"고 밝혔다.

증거인멸과 도주의 위험이 없음에도 구속 결정을 내린 재판부에 항의해 임씨는 구치소에서 46일 남짓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다. 최후진술권까지 박탈당한 그에게 재판부는 1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는 수감 중인 임씨를 양심수로 선정했고, 이후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Human Rights Committee)는 그가 국제인권규약을 위반한 한국정부로부터 인권침해 피해를 받았음을 인정했다.

출소 후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사업인 군인권실태조사 등에 관한 연구조사에 참여한 임씨는 육·해·공군 및 해병대 60여개 부대를 방문하면서 군대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부조리와 인권침해 상황들을 인식하게 됐다. 병사들과 함께 먹고 자며 이들로부터 병영생활의 어려움과 고민을 들었던 경험은 이후 2009년 12월 군인권센터 개소로 이어졌다.

센터를 열면서 임씨는 "군대는 지금까지 억압적인 문화 때문에 인권침해가 자주 벌어졌으나, 군대야말로 헌법을 수호하는 힘을 가진 기관으로 인권 수호의 첨병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설립 후 군인권센터는 군대에서 발생한 인권유린 사건들을 세상에 드러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전력해왔다.    

"<친구사이> 통해 본격적으로 활동 시작"

지난 4월 16일 <오마이뉴스>는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에 있는 군인권센터에서 임씨를 만났다. 다음은 임씨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인권에 대해 천착하게 된 계기는.

"우리는 '권리'라는 개념을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가르치질 않는다. 고등학교 다닐 때 두발단속이나 교복착용, 야간자율학습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어린나이였지만 아마도 목적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던 것 같다. 한 번은 나름대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학교에 갔는데 두발검사에 걸렸다. 체육선생님이 걸린 아이들을 모아놓고 '몇 cm 더 자르라'고 얘기하는데, 내가 그 앞에서 '이발비 주세요'라고 손을 내밀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그 선생님은 '울그락불그락' 하면서 올라가 버리고, 학생과장이 내려오더니 내 뺨을 때렸다.

운동장에 꿇어 앉혀 놓고는 수업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 나중에는 담임선생님이 내려오셔서 학생과장과 싸우셨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학교는 감옥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르친 게 아니라 우리에게 구속과 억압을 요구했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고 나왔다."

- 대학에선 무슨 공부를 했나.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원래 94학번이지만, 재수해서 95학번이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관심 있던 컴퓨터나 배우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다. 나중에는 담임선생이 찾아와서 '1년만 재수해보고 그래도 못 가거나 안가고 싶으면 그 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부모님과 선생님이 미리 작전을 짜놓으셨던 거다. 대구에서 재수생활을 했는데, 나는 재수를 하면서 세상을 배웠다.

재수학원 담임선생이 학생 운동하다가 학교를 두 번이나 잘린 분이셨는데, 그 분한테 존 로크의 저항권이 뭔지 배웠고, 맑스의 <공산당선언>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재수할 때 <종의 기원>, <역사란 무엇인가>, <군주론> 같은 책들을 읽었다. 그러다보니 철학에 관심이 생겼다. 학원에서는 '임태훈이 4년제 대학가면 기적'이라고 했을 정도로 입시공부를 안했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군대에서 발생한 인권유린 사건들을 세상에 드러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전력해왔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군대에서 발생한 인권유린 사건들을 세상에 드러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전력해왔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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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 인권운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게 되었나.   
"처음에는 과 학생회 활동을 했다. 2학년 때 총무부장을 했는데 학생회장이 학생회비를 유용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총무부장을 그만뒀다. 그만두면서 통장에 손 대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과대표 위임장 받아서 통장을 확인했더니 40-50만원이 비는 거다. 개인적으로 썼다더라. 당장 탄핵안을 제출했는데, '네가 좀 봐줘라, 쟤 인생이 어떻게 되냐'하고 운동권 선배들이 난리를 치면서 말렸다.

그 때가 YS 대선자금이 정국의 주요 이슈가 될 때였는데, 내가 선배들에게 그랬다. '아니 공금을 이렇게 개인적으로 써놓고 어떻게 YS에게 대선자금을 공개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거냐'고. 학생회장을 탄핵하고 나서 학교에서 왕따가 됐다. 자연히 학교 밖으로 눈을 돌릴 무렵 동성애자 모임인 '친구사이'를 알게 됐다."

-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 같다.
"'친구사이' 소식지만 받아 보다가, 이태원 게이바에서 동성애자 인권단체 협의회 1주년 행사를 한다길래 큰 맘 먹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게이들, 레즈비언들이 그렇게 많은 지 처음 알았다. 행사 끝나고 '친구사이'에 가서 회원가입 신청을 하는데 뭘 할 줄 아느냐고 묻길래 '학생회 활동을 했다'고 하니 일을 주더라. 동성애자 인권캠프 기획을 내가 맡았다.

1997년 초에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에 대한 민주노총의 투쟁이 있었는데, '정리해고의 1순위는 결혼하지 않은 독신 남녀일 가능성이 높고, 그 중에는 게이, 레즈비언이 많으니 우리도 적극적으로 동참해야한다'고 동성애자 연대투쟁본부를 만들었다. 그해 1월 14일 마로니에 공원에서 병원노조 집회가 있었는데, 그 집회에서 레인보우 깃발(레즈비언· 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깃발)이 처음으로 올라갔다.

그 때는 커밍아웃(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 하기 전이라 누구 알아볼까봐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유인물을 돌렸다. 집회가 끝나고 행진을 하는데, 금속노조 분들이 '환영한다, 동성애자면 어떠냐'고 하더라. 그날 레인보우 깃발이 서울시내에 처음 나부꼈는데, 동성애자들이 처음으로 바깥 세계와 소통했던 날로 기억한다."

- 원래부터 군대를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아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 '너 군대 가서는 말대꾸하면 안된다, 말대꾸하면 맞는다'하는 얘기는 많이 들었다. 군대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징병 신체검사 받으러 갔더니 동성애자가 아닌지 묻는 항목이 있었는데, 결국 체크하지 못했다. 그리고 고민을 했다. 군형법 92조가 동성애 성행위를 형사처벌하고 있고, 징병 신체검사 규정 자체가 이렇게 동성애를 성적 선호도 장애, 성전환자를 성주체성 장애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런 군대를 과연 가야되겠느냐하는 고민이었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거다." 

- 결국 그런 이유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것인가.
"성공회대 NGO대학원을 다닐 때인 2001년, 대만 내정부(우리 안전행정부에 해당) 장관 초청으로 대체복무 현지 시찰단으로 다녀온 후에 본격적으로 병역거부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오태양씨가 불교도의 불살생 교리와 평화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했다. 양심적 병역거부권과 관련한 병역법 위헌법률심판제청이 헌법재판소에 올라가 있을 때였는데, 내 변론을 맡은 분이 진선미 변호사(현재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였다.

법정에서 진 변호사가 헌재에 위헌심판 제청이 올라가 있으니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석방해야 한다고 했는데, 판사가 보석을 기각시켰다. 미리 준비했던 최후진술문을 읽는데 판사가 '이 재판과 관계없는 이야기'라면서 퇴정을 명령했다. 내가 '최후진술권은 법에 보장된 권리인데 무슨 이유로 막느냐'고 했는데, 교도관보고 끌어내라더라. 그 길로 구치소로 끌려가서 선고된 1년 6개월 형 중 1년 4개월을 살고 가석방으로 나왔다."  

- 당시 구속영장 발부에 항의하면서 꽤 긴 단식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입영영장이 나왔길래 입대하지 않겠다는 내용증명을 병무청에 보냈다. 병무청은 바로 경찰에 고발했고, 강남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영장실질심사를 받았는데 영장이 바로 발부되었다. 첫날부터 항의 단식을 시작했다. 1심 판결 때까지 46일 동안 단식을 했는데, 난처해진 구치소에서 어머니를 불러 '단식을 중단하게 설득해 달라'고 특별면회를 시켜줬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단식은 건강에 좋으니, 물만 꼬박 꼬박 마시라'고 당부하고 가신 거다. 구치소 보안과장이 '아니, 애가 밥을 안 먹으면 밥을 먹으라고 얘기를 해야지, 어떻게 단식이 몸에 좋다고 얘기할 수 있느냐' '혹시 계모 아니냐'면서 황당해 하더라. 사실 어머니가 철저한 채식주의자다. 식용유나 조미료도 드시지 않는 분이다."

"참여정부 당시 군 인권실태 조사, 군인권센터 설립하는 계기돼"

출소 후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사업인 군인권실태조사 등에 관한 연구조사에 참여한 임태훈씨는 육·해·공군 및 해병대 60여개 부대를 방문하면서 군대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부조리와 인권침해 상황들을 인식하게 됐다.
 출소 후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사업인 군인권실태조사 등에 관한 연구조사에 참여한 임태훈씨는 육·해·공군 및 해병대 60여개 부대를 방문하면서 군대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부조리와 인권침해 상황들을 인식하게 됐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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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인 인권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가지게 되었나.
"감옥에서 나온 후 왜 병역거부자들을 비난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군 복무를 마친 사람들이 쓴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비난의 글들을 읽어보면 틀린 말도 있지만, 맞는 얘기도 있다. 군 생활하는 동안 자신들의 권리가 너무나 실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군대를 갔다왔는데, 왜 너희들은 가지 않느냐'는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다.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은 잘못되었지만, 그 주장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군대가 얼마나 엉망이면 이런 얘기들이 나올까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난 궁금하면 못 참는다.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던 차에 참여정부 당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군인권실태에 대한 연구용역 사업이 나와서 공동연구자로 참여할 수 있었다. 윤광웅 국방장관이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어떤 부대이건 우리가 원하는 부대를 볼 수 있도록 공문을 내렸다. 두 달 동안 서부전선, 동부전선, 진해기지, 예천, 수원 비행장, 방공포 부대, 해병대 1·2사단 등 60여 부대를 방문했다. 병사들과 함께 식사하고 근무도 같이 서고하면서 이 친구들의 고민을 들었다. 영창까지 다 둘러보고 입창자들과 배석자 없이 면담도 했다. 이런 연구는 전무후무한 연구다."   

- 당시의 경험이 군인권센터 설립으로 이어진 것인가.
"큰 영향을 미쳤다.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군의 인권실태가 엉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문지를 받고 1:1로 심층면담을 했는데, '돌격 앞으로 하면 저 놈부터 쏴죽이겠다'는 얘기를 많은 병사들이 했다. 충격적이었다. 전우애가 상실된 조직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과연 안보에 득이 될까, 해가 될까. 그 해는 당연히 국민전체에게 가지 않겠나. 군대 안에 인권이 바로 서지 않으면 과거 장개석 군대가 되거나 유사시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장해제 되는 군대로 전락하지 않겠는가. 병사들의 처우가 나아져야만 나라를 위해 싸울 것 아닌가. 그 때부터 군인권센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안타까운 일이지만, 여전히 군에서는 의료 사고나 인권 유린 사고들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 같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기본적인 것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농노와 다름없다. 병사들을 노예처럼 취급하는 이러한 징병제로는 전쟁을 하면 질 수 밖에 없다. 병사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우리 군에서 정훈병과가 왜 생겼나. 베트남전에서 호치민 군대, 사회주의 군대의 정치장교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사상 무장과 사기 고취뿐 아니라 평등한 군대, 장군과 이등병이 평등한 군대를 실현함으로써 결국은 인민을 위한 군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이 베트남전 분석이다. 그래서 정훈병과를 만들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우리 정훈장교들은 반공교육만 시키고 있다.

야당을 주적으로 만들고 있고 과연 이런 군대가 국민을 위한 군대인지 회의를 느끼는 거다. 병사 하나하나를 소모품처럼 보는 인식으로는 제 2의 노우빈, 제 2의 신성민, 제 2의 오 대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근본적 대안은 독일식의 옴부즈만(국방감독관)이다.이것이 근본적인 제도적 장치인 것이고 군대내 인권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군사법원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이미 와 있다."   

- 일부 극우성향의 누리꾼들은 임 소장을 '종북 게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하겠다. 유엔에서 북한인권 조사위원회가 발족되었는데, 이 위원회의 마이클 커비 위원장이 호주의 대법관 출신이다. 그런데 이 분은 커밍아웃한 게이다. 북한에서 동성애자는 범죄자로 취급되고 교화소로 끌려간다. 북한과 동성애자 인권운동은 절대 양립할 수 없다. 군인권센터는 연평도 포격 당시 김정일 위원장을 전쟁범죄자로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하라는 성명을 냈다. 또 작년 장성택 처형 직후에는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를 포기하고 3대 세습에 따른 봉건적 농노제 왕국임을 자임한 꼴이 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유엔 특별보고관에게 긴급청원을 하기도 했다. 이런 나를 보고 종북 게이라고 한다면 아무 생각이 없거나 덜떨어진 사람들이다."


태그:#임태훈, #군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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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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