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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비 그친 뒷날이지만 봄 햇살 따사롭고 하늘은 맑았다. 창원시 용지동에 사는 처제네에 놀러 온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느긋하게 자는 가족들과 처제네들 뒤로하고 슬며시 일어나 동네 산책에 나섰다.

창원은 아득한 옛날 공룡과 함께 살아온 화석나무인 '메타세쿼이아'가 미끈한 자태를 드러내는 가로수로 함께하는 도시다. 마치 미인대회 심사위원인 양 메타세쿼이아를 아래, 위로 살피며 걸어가는 아침 공기가 시원했다.

처제네 아파트를 벗어나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벗 삼아 20여 분 걸으니, 작은 언덕 위 나무 속 집을 발견했다. 입구에는 '경남도민의 집'이라는 이름표가 보인다. 부산에서 도청이 창원으로 신축 이전한 이듬해인 1984년 4월부터 2003년 11월까지 경상남도 도지사 공관이었던 곳이다.

경남 창원시 용호동 <경남도민의 집> 전경
 경남 창원시 용호동 <경남도민의 집> 전경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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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경남 도민의 집' 문 여는 시간이 오전 9시인 줄 알았다. 현재 시각 오전 8시 40분. 건물 주위 작은 산책길이나 돌아볼 참이었다. 아뿔싸 개방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다(매주 월요일과 설·추석 연휴는 휴관 일이다). 다행히 일찍 출근한 공무원이 공관 문을 열어주었다.

호랑가시나무
 호랑가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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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 건물로 들어서기 전 오른편에 호랑가시나무가 서 있다. 부산에서 도청이 옮겨온 기념으로 그곳에서 이식한 나무다.

호랑가시나무. 서양 사람들이 크리스마스트리로 즐겨 사용하는 나무다. 늘푸른나무인 호랑가시나무의 진녹색 잎은 추운 겨울, 크리스마스트리로 손색이 없고 더구나 십자가를 멘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갈 때 가시관에 쓰인 가시를 온몸으로 쪼아 빼내려 했던 '로빈'이라는 새가 좋아하는 빨간 열매를 가진 나무니 크리스마스에는 딱 맞다.

그러나 내게는 크리스마스트리로 즐겨 사용하는 서양보다 호랑이가 등 가려우면 잎에다 문질러 대었다는 호랑가시나무 이름이 더 정겹다.

호랑이처럼 무서운 권력을 가진 도지사가 도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길 바라는 의미에서 혹 이 나무를 심은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도정역사실
 도정역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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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가시나무를 뒤로하고 공관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난 전시회와 함께 <푸른 눈으로 바라본 120년 전 경상남도 사진전>이 함께하고 있다.

공관을 가로질러 들어간 곳은 도정역사실. 경상남도의 역사를 주요 변천 과정 연표를 곁들여 소개해 100년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볼 기회였다.

잊힌 왕국이라는 가야문화의 발상지, 경상남도. 경상남도라는 이름의 유래는 어디에서 왔을까. 먼저 경상남도라는 이름은 경상도에서 갈라져 나왔다.

경상도는 지금의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를 합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고려시대 이 지방의 대표적 고을인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지명이다. 995년(고려 성종 14년) 9월 전국을 처음으로 10개 도로 나눌 때 상주 지역 일대는 영남도, 경주와 금주(지금의 김해) 지역 일대는 영동도,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산남도라고 명명하였다.

1890년대 경남 지역 관가의 포졸들(경남 근대 사진전 중에서)
 1890년대 경남 지역 관가의 포졸들(경남 근대 사진전 중에서)
ⓒ 경남 근대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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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도와 경상우도는 조선시대에 경상도 지방을 동서로 나누었을 때 부른 행정구역 이름이다. 1407년(태종 7년) 9월 군사 행정상의 편의를 위하여 경상도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낙동강 동쪽을 경상좌도, 서쪽을 경상우도라 하였다.

지금의 행정구역인 경상남도는 조선시대 말엽인 1896년(건양 1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지방제도 관제 등을 개정하며 종전 23부를 13도로 개칭할 때 경상도를 남·북 2개 도로 나누면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

경상남도청 소재지인 관찰부를 진주에 두고, 최고 책임자를 관찰사로 하였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관찰부는 도청으로, 관찰사는 도장관으로 바꿔 부르다가 다시 도지사로 불리게 되었다. 초대 관찰사는 진주 부사로 재임하던 이항의를 경상남도 관찰사로 승진 임명하였다.

경상남도 청사는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는 1925년 3월까지 지금의 진주성터에 있었다. 건물 이름은 선화당이라 하였다. 부산 도정은 창원 도정이 시작되는 1983년 6월까지 58년간 지속되었다.

'영남포정사, 진주교, 경남문화예술회관'은 진주사람에게는 옛 영광의 쓰라린 추억이 깃든 곳이다. 경남도청의 정문이었던 영남포정사. 도청의 부산 이전에 반대하는 진주사람들을 달래주기 위해 당시에는 최첨단이었던 철교로 만들었던 진주교(현재는 새 다리가 놓였다).

역대 도지사 집무실
 역대 도지사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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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홍보실을 나와 둘러본 곳은 역대 도지사 집무실. 도지사 의자에 앉아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의자에 앉으니 검은 전화기 한 대가 눈에 띈다. '용건만 간단히'. 요즘도 어르신들은 "전화세 많이 나온다. 빨리 끊어라"는 말씀을 종종 하신다. 전화기 귀하던 시절의 풍경이 떠올라 절로 입가에 웃음이 머문다. 해외순방 기념품 전시실, 도정홍보실 등을 둘러보았다.

공관 아래 쪽, 뜨락에 심어진 대나무들
 공관 아래 쪽, 뜨락에 심어진 대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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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걸었다.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곧게 자라기는 누가 시켰으며
 또 속은 어찌하여 비어 있는가?
 저러고도 사계절 늘 푸르니,
 나는 그것을 좋아하노라.'

이렇게 읊었던 윤선도의 오유가 속에 나오는 대나무가 쭉쭉 뻗었다.

작은 뜨락이다. 바깥에서는 대나무에 가려 여기가 잘 보이지 않으니 휴식 공간으로 사용하기 그만인 셈이다.

작은 대나무 무리를 나와 걸었다. 공관이 보이는 곳에 긴 의자가 놓여 잠시 다리품을 쉬었다.

공관 앞 호랑가시나무를 지나 뒤로 걸었다. 작은 분수가 있다. 물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공관 후원에서 만난 산수유
 공관 후원에서 만난 산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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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 옆에는 노란 산수유가 꽃망울을 한껏 안고 있다. 지난해 가을부터 오늘 이 따사로운 계절을 위해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새생명을 잉태하고 간직한 열정이 보인다. 저렇게 잉태한 새생명인 열매는 조루증과 야뇨증에 좋다고 한다.

특히 산수유 열매로 만든 술은 유명하다. 꽃도 아직 피우지 않은 나무 아래에서 벌써 열매를 찾고, 열매로 담근 술을 기다리는 상상하는 나 자신이 즐겁다.

'경남도민의 집'에서도 경남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도 미래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산수유 열매로 술 담가 먹는 즐거운 상상처럼 경남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도, 미래도 살펴볼 수 있는 작지만 넉넉한 공간이다. 산수유 열매가 붉게 익을 무렵, 다시 찾아야겠다.

덧붙이는 글 | 경상남도 인터넷 신문 <경남이야기> http://news.gsnd.net/



태그:#경상남도, #도지사 공관, #경남 도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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