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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29일, 군산 개복동에 있는 유흥업소 아방궁의 무선전화기 전기선이 합선을 일으키며 화재가 발생했다. 이 불은 삽시간에 바로 옆 유흥업소 '대가'로 번졌다. 이날의 화재로 '대가'에서 일하던 성매매 여성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단한 영업을 마치고 2층에서 잠을 자던 이 여성들은 불이 난 사실을 알고 대피하려 했지만, 이들이 피할 곳은 없었다.

2002년 1월 29일, 개복동 유흥업소 '대가' 건물 화재를 진압하는 장면.
 2002년 1월 29일, 개복동 유흥업소 '대가' 건물 화재를 진압하는 장면.
ⓒ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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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개복동 화재참사 당시 희생된 여성들의 시신.
 군산 개복동 화재참사 당시 희생된 여성들의 시신.
ⓒ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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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난 '대가'의 2층은 좁은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고, 이 계단의 출입문은 업주의 잠금키로 굳게 잠겨 있었다. 밖에서 보면 창문으로 되어 있는 곳도 불이 난 후 안 사실이지만, 합판으로 막혀 있었다. 여성들은 밖에서 보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는 건물에서 감옥에 갇힌 삶을 살다 세상과 작별하게 되었다.

이 충격적인 죽음으로 성매매 여성들의 삶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여성단체들의 노력 끝에 2004년 성매매방지법 제정의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해마다 9월이면 반성매매 여성단체들이 화재 현장을 찾아 추모하고 반성매매 운동의 결의를 다짐하는 공간이 되었다.

지난해 2월에는 흉물처럼 남아있던 '대가' 건물이 철거됐다. 당시 철거에 앞서 11년 만에 공개된 현장 내부는 여전히 잿더미와 냄새로 화재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잔디만 무성하게 남은 처량한 곳이 되었다.

"여전한 성매매 착취, 성매매 여성에 대한 처벌 중단해야"

개복동 화재참사 12주기 추모식에 함께한 여성단체 활동가들.
 개복동 화재참사 12주기 추모식에 함께한 여성단체 활동가들.
ⓒ 문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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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성매매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연대 등 폭력에 노출된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반성매매 운동을 벌이는 여성단체들과 군산지역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40여 명은 28일 오후 현장을 찾았다. 이날 개복동 화재 참사 12주기 추모제가 열렸기 때문.

정미례 전국연대 대표는 "당시 고통의 현장이 지금도 절절히 느껴지기에 잔디로 조성된 이곳에 발을 딛기가 지금도 힘들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 현장을 찾은 것은 새로운 희망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14명의 영혼이 하늘에서 자유를 찾고 성매매 여성들이 더 이상 억압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는 말로 추모사를 대신했다.

추모식에 앞서 여성단체들도 성명서를 통해 "군산개복동 화재참사 이후 새로운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성매매 여성들이 절망과 폭력 앞에서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면서 "살고 싶다는 여성들의 외침에 우리 사회가 대답하는 것은 성산업 확산을 막아내고, 성착취 피해자인 성매매 여성에 대한 처벌이 아닌 비범죄화로 복지·지원체계를 확대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대안 마련에 힘을 쏟는 것임을 강조한다"며 다시는 개복동 화재참사와 같은 일이 재발되지 못하도록 하는 대책의 필요성을 밝혔다.

개복동 화재참사 12주기 추모식에서 군산 여성의 전화 민은영 대표는 직접 지은 추모시 '민들레꽃처럼'을 낭독했다.
 개복동 화재참사 12주기 추모식에서 군산 여성의 전화 민은영 대표는 직접 지은 추모시 '민들레꽃처럼'을 낭독했다.
ⓒ 문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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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식은 소박하게 진행됐다. 군산 여성의 전화 민은영 대표는 직접 지은 추모시 '민들레꽃처럼'을 낭독했다.

"칼바람 섞인 느린 햇살이 잿빛골목을 서성이던 그날/자유잃은 숨이 켜켜이 고꾸라지던 그날/일월 끝자락 멈춰버린 그날/잔소리꾼 진주언니가 쓰러집니다/수다쟁이 미란언니가 무너집니다/약골 수진이가 내 손을 잡습니다/손가락만한 구멍속으로 하늘은 여전한데 옥죄인 공간에 엉겨붙은 화마는 철계단 앞으로 주검을 선물합니다/속절없이, 까닭없이 나는 그만 눈을 감고 맙니다 <중략> 잊지 말아요. 입술 깨물며, 눈물 훔치며, 꾹꾹 다짐했던 시간들/착취의 사슬 앞에 무너지지 않게, 망각의 노예로 추락하지 않게, 스윽 스치는 무관심이지 않게."

참가자들은 추모시 낭독이 끝나고 각자 헌화를 하며 개복동 화재참사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개복동 화재참사 12주기 추모식에서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개복동 화재참사 12주기 추모식에서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 문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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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로 조성된 화재현장, 여성인권센터 만들어야

한편, 현재 잔디로 조성된 현장에 대해 군산시는 청소년 문화공간을 조성한다는 뜻을 밝혔지만, 현재까지 구체적인 계획이 발표되지 않았다. 여성단체들은 이곳을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여성인권 향상을 위한 교육과 소통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지난해 '개복동 여성인권센터(가)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해마다 9월이면 '민들레 순례단'이라는 이름으로 반성매매 운동을 하는 여성단체들과 활동가들이 개복동 화재참사 현장을 찾았다.
 해마다 9월이면 '민들레 순례단'이라는 이름으로 반성매매 운동을 하는 여성단체들과 활동가들이 개복동 화재참사 현장을 찾았다.
ⓒ 문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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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위 집행위원장을 맡은 송경숙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장은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현장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곳을 기억하고 있다"면서 "이제 수많은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삶과 인권의 문제가 알려져 성매매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면서 군산시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주문했다. 이어 송 센터장은 "군산시와 여성가족무가 이 문제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까지 여성단체들의 이런 요구가 구체적인 계획으로 수립되지는 않았다. 군산시는 이 문제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에 추진위는 잔디로 조성된 현장의 일부를 활용하여 지역 종교계와 함께 화재참사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만들 생각이다.

성매매경험당사자네트워크 '뭉치'의 활동가 여름(가명)씨는 "작년 건물 철거 당시 건물을 둘러봤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12년 전 그 아픈 날의 냄새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참 많이 울었다"면서 "더 이상 언니(희생자)들을 차가운 공간에 머물게 할 수 없다. 부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언니들의 고통과 아픈 기억이 숨 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북인터넷대안언론 참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개복동 화재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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