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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숙박비용 지출은 호주머니 사정이 좋은 사람들도 무시하기 힘들다. 해외 여행을 한다면, 숙박비 지출이 전체 비용 가운데 30% 안팎은 차지하기 마련이다. 짐작 하건대, 숙박비 부담은 수개 월씩 걸리는 장기 외국여행을 가로막는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아들과 아들 친구 두 명 등 모두 넷이서 북미대륙을 55일에 걸쳐 횡단여행 할 때 야영을 고집한 것도 따지고 보면 숙박비 때문이었다. 당시 네 명이 자는 데 지출할 수 있었던 숙박비 예산은 하루 15~20달러가 한도였다.   

나 홀로 10개월에 가까이 북미대륙을 떠돌아 다닐 때, 숙박비는 다 합쳐서 우리 돈으로 100만 원도 채 들지 않았다. 길가나 공터, 숲 속 같은 데다 차를 세우고 공짜로 잠을 잤기 때문이다. 그나마 플로리다의 한 섬에서 하룻밤을 난 대가로 400달러를 치르지 않았다면, 10개월 여행의 총 숙박비는 50만 원도 훨씬 안됐을 것 같다.

하룻밤 400달러는 지금까지 국내외 여행을 통틀어, 내가 숙박의 대가로 지불한 가장 큰 액수이기도 하다. 가난한 여행자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거금을 감당해야 했던 사연은 이렇다.

서부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 북미대륙 유랑여행을 시작한 지 4개월쯤 돼 마침내 미국 동남쪽의 땅끝이라고 할 수 있는 플로리다에 진입했다. '거지 여행자'였으니, 통장 잔고는 달랑달랑 할 수 밖에 없었지만, 미국 최고의 겨울 휴양지 가운데 하나인 '키 웨스트'(Key West)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플로리다의 친구 집 마당에서 며칠 밤을 보낸 뒤, 키 웨스트 여행 길에 올랐다. 친구는 방에 들어와 자라고 간청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차를 친구 집 마당에 세워두고 차 안에서 자는 게 훨씬 편했다.

키 웨스트는 플로리다 남부에서 쿠바를 향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는 섬들 가운데 서쪽 끝에 있는 섬이다. 키는 스페인 말에서 유래했는데, 그 자체로 작은 섬들이라는 의미가 있다.

플로리다 반도에서 쿠바 사이의 섬들은 흔히 '플로리다 키스'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는 주택이 없거나 땅 임자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섬들도 많다. 섬 하나를 독차지하고 하룻밤을 난 게 화근이었다. 

플로리다 키스는 하나같이 물 속으로 가라 앉을 듯 낮고 평평하다. 마침 차를 세우기 좋은 곳이 보이길래, 섬을 독차지하고 하룻밤을 났다. 쪽빛 바다, 감미로운 파도 소리, 12월인데도 목을 휘감는 따스한 미풍… 남국의 바다는 감미로운 애인의 모든 감성을 다 갖춘 듯 했다. 전신이 부드럽게 이완되면서, 달콤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은 불문가지다.

문제가 생긴 건 이튿날 아침이었다. 바닷가에서 라면을 끓여 먹을까 하고 차를 빼는데 헛바퀴만 도는 거였다. 후진 기어를 넣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더니 오히려 더 미끄러졌다. 넙적한 보도블록 같은 걸 바퀴 밑에 대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바퀴는 더 깊이 진흙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죽은 산호 등의 성분이 많은 섬 흙은 미끄럽기가 참기름에 맞먹을 정도였다. 

30분 넘게 갖은 재주를 부려가며 씨름했지만, 내 힘으로는 차를 끌어낼 수 없었다. 결국 견인차량을 불렀다. 헌데 내 차를 구하러 온 견인차량까지 미끄러운 흙 바닥에 빠져 꼼작 못하는 일이 생겼다. 운전기사는 쉬지 않고 'F(Fu**)' 워드와 'S(Sh**)' 워드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다혈질인지, 자기 차를 발로 차고 난폭하게 가속기어를 밟는 등 차를 오르락 내리락 하며 씩씩댔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가운데, 천우신조로 25톤 대형 트럭이 옆을 지나갔다. 윗니가 서너 개 빠진 트럭 운전기사는 얼굴에 "나 좋은 사람"이라고 쓰여 있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그는 우리 두 사람을 구조해 주고 떠났다.

견인차 운전기사와 내가 맞섰던 것은 그 직후였다. 그는 견인 비용으로 400달러를 내라고 했다. 허비한 시간이며, 자신의 차가 빠진 일 등을 감안할 때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거였다. 나는 그렇게는 내지 못하겠다고 버텼다. 보험증서에 보면 견인비용은 최대 150달러이기 때문에 그 이상은 지불할 수 없다고 맞섰다. 그러자 그는 내 차를 자신의 견인차량 위에 잽싸게 실어버렸다.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는 거였다. 어쩔 수 없이 그의 견인차량 조수석에 동승했다. 견인차 회사에 도착해, 보험회사와 통화하니 "예외적인 사항에 해당한다"며 400달러를 내 돈으로 지출해야 한다는 거였다. 마음 같아서는 경찰을 찾고 싶었지만, 외딴 동네에서 봉변이라도 당할까 봐 참았다. 사실 전날 밤 '숙박의 질'로 따지면, 최고급 호텔 못지 않았으니 그걸로 그냥 위안을 삼았다.
  
석양
 석양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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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의 석양은 절기상 한겨울인데도 따사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이애미 앞바다의 키 비스케인 섬 쪽에서 본 시내 방향 풍경이다.

키스
 키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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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에서 키 웨스트를 향해 가면서 흔히 볼 수 있는 쪽빛 바다(위). 플로리다 본토 남단에서 키 웨스트까지 약 200km의 길은 염주처럼 늘어서 있는 섬들을 꿰고 있다(아래 왼쪽). 키(Key)는 스페인 어원의 섬이란 말에서 유래한 단어로 플로리다 키스는 크고 작은 모래톱 섬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아래 오른쪽).

미국 땅끝
 미국 땅끝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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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최남단을 알리는 키 웨스트의 땅끝에 서 있는 표지판. 쿠바와 거리가 90마일이라고 쓰여 있다. 플로리다의 주도인 마이애미보다 쿠바가 키 웨스트에서는 훨씬 가깝다.

견인
 견인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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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산호 성분 등이 주를 이루는 진흙에 빠진 내 차(위 왼쪽). 미끌미끌하기가 참기름 같아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위 가운데). 내 차를 끌어내려 온 견인차마저도 같이 빠지고 말았다(위 오른쪽). 빨간 색깔의 25톤 대형트럭이 노란 색의 견인차를 끌어내고, 견인차가 다시 내 차를 진흙에서 꺼냈다(아래).

바퀴자국
 바퀴자국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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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 나온 내 차가 진흙 바닥에 남긴 타이어 자국. 미끌미끌해서 바퀴 자국을 보면 자동차가 좌우로 요동을 치며 몸부림한 흔적이 생생하다.
늪지대
 늪지대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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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반도는 한반도보다 면적이 조금 작은데, 중부에서 남부까지는 평균 해발고도가 10~20m에 불과할 정도로 평평하다. 플로리다 반도 대부분이 한국으로 치면 호남평야와 같은 들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남쪽에는 특히 거대한 늪지대가 형성돼 있다(위). 바람의 힘으로 늪지대를 돌아다니는 이 곳의 특유의 배(가운데). 늪지대에는 서식하는 악어가 새끼들을 보호하고 있다. 새끼 악어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면 어미 악어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덧붙이는 글 | 세종시 닷넷(sejongsee.net)에도 실렸습니다. 세종시 닷넷은 세종시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는 커뮤니티 포털입니다.



태그:#플로리다, #키 웨스트, #애인,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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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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