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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만난 영화 <변호인>의 부림사건 피해자 모델이 된 송병곤(55)씨.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지금까지 노 전 대통령이 만든 법무법인 부산의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다.
 27일 만난 영화 <변호인>의 부림사건 피해자 모델이 된 송병곤(55)씨.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지금까지 노 전 대통령이 만든 법무법인 부산의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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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이는 62일 동안 불법 구금되어 있었다. 그 어머니는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시신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던 김주열을 생각하면서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겠다고 영도다리 아래부터 동래산성 풀밭까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헤매고 다녔다.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혹시 아들이 아닌지 가슴을 졸이며 뛰어갔다. 그 청년의 이름은 송병곤이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 중

청년의 머리에는 백발이 내려앉았다. 30여년이 흘러 이제 50대 중반의 나이가 됐지만 그날들의 기억만큼은 세월을 피해나가 있었다. 27일 저녁 부산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송병곤(55)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은 벌써 영화 <변호인>을 세 번이나 본 상태였다. 몇 번 더 볼 생각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가 영화 한 편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변호인>에 나온 고문을 받던 대학생이 바로 32년 전 자신이기 때문이다.

곰이 100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것은 신화지만, 부산대학교 법대생이었던 평범한 학생이 62일만에 '빨갱이'가 된 건 실화다. 이유도 모른 채 눈이 가려져 붙들려간 대공분실에서 그가 처음 받은 질문은 "너 평양 갔다왔지"였다.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피식 웃음이 났다. 돌아온 건 매질이었다. 매질은 끊이지 않았다. 먹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통닭구이가 고문임을 알게 됐을 때보다 그를 힘들게 한 건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거짓으로라도 불러야 한다는 양심의 가책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고문 이야기를 하며 간혹 한숨을 쉬었다.

"영화 통해 주목 받아야 할 분은 다른 분"

그즈음 만난 노무현 변호사가 부림사건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찾은 것처럼 그 역시 노무현 변호사와의 만남이 다른 인생의 시작이 됐다. 노 변호사는 거의 매주 구치소를 찾아왔고 그의 어머니에게도 깍듯했다. 사건이 끝나고 난 뒤에 그는 노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었고, 노 변호사의 부인 권양숙씨의 친척과 결혼도 했다. 주례는 노 변호사였다. 지금도 그는 노 변호사가 만든 법무법인 부산의 사무장을 맡고 있다. 법무법인 부산은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대표 변호사로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문 의원 역시 부림사건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송 사무장과 만난 날은 문 의원의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의 북콘서트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북콘서트장을 찾은 그를 문 의원은 무대로 올렸다. 이날 문 의원는 "부림사건은 대표적 용공조작사건"이라며 "이제 와서 가해자를 처벌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명예회복 하고 보상해야 진정 민주화된 사회가 되는데 안 되고 있는 걸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래서 송 사무장과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만약 노무현 변호사가 돌아온다면 무엇을 할 것 같나"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재심사건의 변호인을 해달라고 하면 기꺼이 해주실 것 같다"고 말했다.

송 사무장에게 평생의 변호인인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들의 인생을 긁고 지나간 부림사건에 대해 들어봤다. 참고로 <변호인>에서 진우로 대변됐던 당시 부림사건 피해자의 모습은 송 사무장을 비롯한 당시 실제 학생들의 사례를 함께 녹여놓은 모습이다. 때문에 송 사무장은 인터뷰를 시작하기 앞서 "나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 관심이 집중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영화를 통해 정말 주목을 받아야 할 분은 다른 분(노무현 전 대통령)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송병곤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과의 인터뷰가 있었던 27일은 문재인 의원의 북콘서트가 부산에서 열리는 날이기도했다. 이날 북콘서트에 참석한 송 사무장을 문 의원은 무대로 올려 부림사건에 대한 재심 필요성을 역설했다.
 송병곤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과의 인터뷰가 있었던 27일은 문재인 의원의 북콘서트가 부산에서 열리는 날이기도했다. 이날 북콘서트에 참석한 송 사무장을 문 의원은 무대로 올려 부림사건에 대한 재심 필요성을 역설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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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언제 봤나?
"세 번 봤다. 개봉 다음날 사무실 직원들한테 내가 영화를 보여줘야 해서 같이 보고, 다른 장소에서도 한번 더 봤다. 시사회까지 하면 세 번 봤다. 몇 번 더 봐야할 거 같다. 가족들과도 봐야하고 어머니랑도 보고싶지만 마음이 아프실 것 같아서 고민이다."

- 영화를 봤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
"처음에는 당사자의 이야기라고 하니깐 객관적으로 보기가 힘들었다. 어떤 것이 각색됐고 어느 것이 사실인지 구별하느라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잘 만들고, 상식에 맞춘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초기의 변호사 노무현에 집중한 잘 만든 인권영화다."

- 영화 속 진우는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하지만 바위는 죽어 있고 달걀은 살아 있다. 달걀은 깨어나서 바위를 넘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데. 혹시 실제로 그런 말도 했나?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 영화에서 어떤 부분이 제일 감동적이었나?
"다 좋았다, 그 울림이. 국밥집에서의 싸움 장면이나 모친으로 나오는 김영애씨 장면들, 처음 노 변호사와 만나는 장면. 계란 봉변을 당한 노 변호사에게 기자 친구가 양복을 바꿔주는 장면도 인상에 깊었다. 차동영으로 연기한 곽도원씨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 이 영화가 왜 인기를 끌고있다고 보나?
"지금 현실하고 그때 상황이 맞물려있고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그 분의 가장 치열했던 시기를 통해 가장 보편적인 인권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현 상황과 맞물린다. 지금 통하는 것이 있나. 철도파업과 대선개입까지 시국 자체가 사람들이 영화를 찾는 이유인 것 같다."

- 당시 경찰에 잡히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달라. 
"부림사건이 터지기 전에 부산대 학내 시위가 있었다. 부마항쟁과 12·12사태, 광주를 거치면서 81년도에 부산대에서 학내시위가 두 차례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정권초기고 군부 쿠데타로 정권 잡았기에 당연히 철권통치나 공권력을 통한 공포정치, 공안정치 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런 시점에 호철이(=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가 잡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걸 확인하러 호철이 어머니께 찾아갔다. 모친은 자기가 알기론 아니라고 빨리 가라해서 나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경비실에 누군가 오면 알려달라고 얘기가 됐던 거 같다. 내려가는데 사복경찰이 둘이 와서 잡았다. 그러고는 동래경찰서로 연행해서 하루이틀 정도 보냈다.

당시 경찰이 '지금 누가 오는데 거기로 가면 너는 죽는다, 지금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래도 가만있었더니 대공분실에서 사람이 왔다. 지금이야 알지만 그때는 그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들인지 몰랐다. 나가서 차를 타려니 눈을 가리고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끌고갔다. 기차 소리가 들렸고 부둣가 인 것 같았다."

고문 경찰의 첫 질문 "너 평양 갔다왔지?" 

송병곤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은 32년 전 62일간 불법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는 27일 오후 기자와 인터뷰 하면서 고문 이야기를 할 때마다 표정이 어두웠다.
 송병곤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은 32년 전 62일간 불법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는 27일 오후 기자와 인터뷰 하면서 고문 이야기를 할 때마다 표정이 어두웠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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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에서 고문을 받았던 건가?

"군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지금 생각에는 옷에 피가 묻거나 찢어지거나 해서 고문 증거가 남을 수 있어 갈아입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옷을 갈아입으라니 갈아입었다. 조사가 시작될 때 첫말이 '너 평양 갔다왔지'였다. 너무 황당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뜬금없이 이게 뭔소리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매질을 했다. 경찰봉으로 무조건 때리고 넘어져도 계속 때렸다. 며칠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잠을 재우지 않았다. 앉혀놓고 내가 살아온 일생을 다 쓰라고 했다. 졸면 경찰봉으로 머리를 때렸다. 나중에는 정신이 혼미해져서 꿈에서 본 걸 적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들이 바라던 내용이 영 아니었나보다. 자기들 마음에 안 든다고 때리더니 영화에서 진우가 당했듯이 '통닭구이' 고문을 했다. 봉에 통닭 굽듯이 몸을 거꾸로 묶어 매단 다음 경찰봉으로 무릎과 발, 손을 마구 때렸다."

- 그렇게 고문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 하던가?
"언제부터 사회주의자였나를 물었다. 그리고 읽은 책과 사회주의자 친구들을 꾸며서라도 불라고 했다. 당시 사회과학책을 읽는 학내 모임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을 알아내려고 했던 거 같다."

- 무엇이 가장 참기 어려웠나? 
"그때 평생 맞을 거 다 맞았다. 통닭구이 고문을 얼마나 당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더니 '도저히 너는 안되겠다'며 태종대로 간다고 했다. 거기서 수갑을 채운 채 바다로 떨어트리면 배가 대기하고 있다 죽을만 하면 건져 올린다고 했다. 간첩들도 항복하는 거라며 눈을 가리고 시동을 걸더니 차가 출발했다. 엄포를 줄려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다 이야기 하겠다고 말해서 가는 길에 차를 돌렸다. 그렇게 친구들과 선배들 이름을 댔는데 그게 제일 괴로웠다. 굴복했다는 것, 친구들을 불었다는 것이 괴로워서 평생 미안함을 갖고 살고 있다. 친구들은 이해하겠지만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60일 만에 할머니가 되어 나타난 엄마...서로 알아보지 못한 모자

영화 <변호인>에서 송우석 변호사가 구치소에서 진우를 면담하는 장면.
 영화 <변호인>에서 송우석 변호사가 구치소에서 진우를 면담하는 장면.
ⓒ (주)위더스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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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 구치소로 옮겨지고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다. 기억이 나는가?
"사실 처음봤을 때 인상은 기억에 없다. 처음에 오셨을 때 제가 그랬다. 이런 사건에 변호사가 필요하겠냐고. '사회과학책으로 재판 받아야 하는데 변호사들도 잘 모를 거다, 변호사가 필요없다'고 했다.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렇게 고문을 받고 나면 포기상태가 된다. 경찰에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다 써줬지, 검찰에서도 언제든지 (대공분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는데 그 공포감 때문에 포기상태였다.

그래서 재판에서 내가 나를 변론하겠다고 철없이 이야기 했다. 지금보면 피고인이 형사법정에서 변호사 도움없이 자기를 변론한다는 것이 어렵다. 그때는 젊은 혈기로 철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살이 쏙 빠지고 죄수복을 입고 초라한 모습이었는데 노무현 변호사는 그것에 충격받았나 보다. 거기다 변호인이 필요없다고 했으니 자기를 못 믿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훗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을 통해 송 사무장 등과의 만남에서 "상상치도 못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며 "얼마나 고문을 받았는지 초췌한 몰골을 한 청년들은, 변호사인 내가 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하는 기색이었다"고 회상했다- 기자주)

- 그래도 노무현 변호사가 결국 변호를 맡았다. 법정에서 변론이 기억나는가?
"법정에서 한 다툼은 잘 기억이 안 난다. 법정에서 변론을 들었던 사람들은 상당히 열정적으로 변호했다고는 하는데 정작 나는 기억이 안 난다. 난 그때 무죄를 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어차피 정해진 대로 판사들이 선고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소위 시국사건에 무죄판결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을 못했다. 그런데 노무현 변호사는 거의 매주 구치소로 면회를 왔다. 와서는 문제가 된 책이 어떤 내용이냐고 물었고 나는 답을 했다. 한번은 '통닭구이' 고문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 어머니도 노무현 변호사를 많이 찾아갔다고 하는데,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
"연세가 있어서 지금은 산청에 계신다. 잡혀가고 난 뒤 어머니를 처음 본 것은 중부경찰서에서 호송되면서다. 구치소로 가는 차가 출발하려는데 어떤 할머니가 차를 막았다. 그 할머니가 어머니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니(당시 50대)는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하셨던지 살이 완전히 빠져서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 역시 처음에 나를 못 알아봤다. 나중에 어머니는 변호사가 노무현이란 이야기를 듣고 계속 사무실을 찾아갔다. 지금도 어머니가 당시 이야기를 하시는데 어머니가 찾아가면 노무현 변호사는 다른 손님이 있어도 그 손님들 내보내고 어머니께 먼저 앉으라고 했다고 한다."

- 그렇게 한 재판은 결과가 어떠했나?
"모두 20명이 재판을 받았다. 밤 12시 넘어서까지 재판을 한 적도 있다. 나는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받았는데, 2심에서는 3년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수감돼 83년 광복절특사로 나왔다. 연행부터 시작하면 수감생활을 2년 정도 했다."

노무현이 던진 뜻밖의 제의 "같이 일하자"

송병곤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제안으로 그가 만든 법무법인 부산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만난 여직원이 지금 그의 부인이다. 동시에 그의 부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씨의 친척이기도 하다. 이들의 결혼식에는 당시 40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례를 맞았다.
 송병곤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제안으로 그가 만든 법무법인 부산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만난 여직원이 지금 그의 부인이다. 동시에 그의 부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씨의 친척이기도 하다. 이들의 결혼식에는 당시 40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례를 맞았다.
ⓒ 송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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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로도 노무현 변호사와 인연이 계속 이어진 걸로 알고 있다.
"내가 석방된 뒤 3년이 안 돼 모두 석방 됐다. 선배들하고 호철이는 크리스마스 때 마지막으로 석방이 됐는데 연말에 당감성당에서 송기인 신부가 환영회를 열어줬다. 그 자리에서 호철이가 노무현 변호사한테 인사를 하러 가자고 해서 노재열까지 3명이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러자 맛있는 점심을 사주고 사우나 가서 사우나도 했다.

그러던 차에 노무현 변호사가 저를 보고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 뜻밖의 제의였다. 그때는 전두환 시절이었고 전두환은 타도해야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난 운동을 해야하고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제안하니까… 친구들하고 의논했다. 친구들은 들어가라고 했고 84년 4월에 노변 사무실에 주사로 근무하게 됐다. 내가 법대란 것도 있을 거고 집안이 어려워 내가 돈벌이를 해야한다는 것도 노 변호사가 안 것 같다. 어머니가 노 변호사에게 부탁했다는 말도 들었다."

- 권양숙씨 친척과 결혼했고, 노무현 변호사가 주례도 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부인이 권양숙 여사랑 친척인지 몰랐다. 집사람은 내가 변호사 사무실에 입사하고 조금 있다 입사를 했고 사무실에서 같이 만났다. 알고보니 권 여사님과 먼 친척이었다."

- 후에 노무현 변호사가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도운 이유는 뭔가?
"나는 정치를 한다는 것에 찬성했다. 직선제 쟁취 이후에도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분들의 정치적인 입지나 합법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국회의원이나 제도권 내에 진입해서 정치활동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노무현 변호사는 정치에 입문해서 상당히 외로웠던 거 같다."

- 부산에서는 정작 벽을 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
"그만한 분이 없다. 그 정도의 뜨거운 가슴과 인식이 있고 노동법률을 상담하며 살아온 노동자에 대한 애정이 있다. 정치를 잘 할 수 있는 분이다."

- 그래서 결국은 대통령까지 됐다. 그날 기분이 어땠나?
"좋았다. 민주당사에서 개표상황보고 6시 출구조사 발표 나올 때 환호하고 더 지켜보다가 서면 나와서 사람들과 맥주 마셨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동시에 워낙 혈혈단신이라서 정치적으로 대통령직을 하는데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그래서 더욱 남달랐을 것 같다.
"(한숨) 그날 아침에 모친이 자고 있는 나를 깨워서 노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순간적으로 무슨 소리냐고 짜증을 냈다. 어디서 또 쓸 데 없는 거 들었나 보다 하고 넘기려는데 뉴스에 나온다고 해서 TV를 켜니 서거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무작정 집을 나왔다. 어떻게 하나 고민을 하는데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전화와서 일단 사무실로 들어가있으라 해서 사무실로 왔다. 정말이지 너무 멍했다."

"깨어있는 시민이 조직되지 않으면 힘이 안 된다"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 (주)위더스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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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변호사 뿐 아니라 송 사무장에게도 부림사건은 인생을 바꾸어놓은 사건인 것 같다.
"학교에서 독서모임을 갖고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잡혀갈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런 사례가 워낙 많았다. 만약에 다른 삶을 꿈꿨더라면 힘들었겠지만 앞으로 삶은 편안하게는 안 되겠다는 각오는 그때도 했다. 고시나 대기업 취업은 생각도 안 했고…. 뜻하지 않게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왔고 그걸 이어받은 문재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노동법률 상담하고 있으니 다른 선후배에 비하면 편하게 살아온 것이라 생각한다"

-부림사건은 일부 무죄를 받았고 지금 재심이 또 진행 중인데 어떻게 되고 있나?
"재심에 문재인 변호사가 당사자들보다 관심이 많다. 날 만날 때마다 재심신청하라고 말했다. 2007년 재심을 청구했는데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괜히 부담을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퇴임 이후에 하기로 바꾸었다. 대법원에서 일부 재심을 허락했고 광주 5·18과 관련된 혐의는 무죄가 됐다. 아직 국가보안법 위반은 재심을 받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고문 사실을 입증하기도 어렵다. 저쪽(공안당국)에서 인정 안 하면 우리가 밝혀내기에는 힘든 사건이다."

- 왜 이 사건을 공안 조작이라고 보나?
"사람의 사상이나 이념, 생각을 처벌하면 안된다. 나는 북한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동족이며 화해하고 협력해서 평화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이 있다고 용공이나 종북, 빨갱이로 만들어서야 되겠나. 정부가 북한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떠나 혐의를 덮어씌우고 북한의 지령을 받은 종북으로 몰고가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 만약 노무현 변호사가 돌아온다면 무엇을 할 것 같나?
"지금 계셨으면, 재심사건의 변호인을 해달라고 하면 기꺼이 해주실 것 같다. 전임 대통령으로서 실질적으로 변론은 못 한다고 하더라도 선임계는 해주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에게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감동은 감동이고, 힐링은 힐링이지만 깨어있는 시민이 조직되지 않으면 힘이 안된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처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태그:#송병곤, #변호인, #부림사건, #노무현,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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