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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철 시집 <오월> 표지
 이승철 시집 <오월> 표지
ⓒ 지식을 만드는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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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초순 어느 날인가 내 손 전화에 문자가 도착했다.

이승철 시인의 등단 30주년기념 육필시집 <오월> 출판기념회에 초대합니다.
때 : 12월 20일 오후6시
곳 : 인사동 ㅇㅇ면옥

육필시집 <오월>

나는 삶의 근거지를 강원도로 옮긴 뒤 가능한 서울 나들이를 자제하고 있다. 이즈음 나이가 들수록 더욱 삼가고 있다. 서울 한번 다녀오면 그 후유증이 몸으로는 2, 3일 갔다. 정신은 다시 제자리를 찾으려면 훨씬 여러 날이 걸렸다.

그런데 왠지 그의 청을 받고는 즉각 가겠다고 답신을 보내자 그도 다시 고맙다는 문자를 보냈다. 나는 그날의 약속을 잊지 않고자 컴퓨터 모니터 옆 달력에서 12월 20일자 빈칸에 '이승철 출판기념'이라고 붉은색 볼펜으로 썼다.

그 뒤 감기로 된통 앓았다. 한 사나흘 앓고 나자 슬그머니 물러간 듯했다. 그런데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고 눈도 제법 쌓였다. 내가 사는 아파트 언저리는 온통 빙판이다.

그날 아침, 급한 원고를 쓴다고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리다가 보니 오후 3시였다. 찬 날씨에, 빙판길에,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원고에 게다가 쫓기는 열차 시간에 손 전화 폴더를 열고 불참 사과 문자를 누르려다가 그게 아니라고, 옷장에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거리로 나갔다. 그 흔한 택시가 왜 이 날은 보이지 않는지.

몇 차례 거리에서 만세를 부른 끝에 간신히 택시를 타자 열차 출발시간 7분 전이었다. 원주 역 주차장에 내려 역사로 들어가자 청량리 행 열차가 막 플랫폼에 들어서고 있었다. 차표도 사지 않고 100m 단거리를 달리듯 구름다리를 오르고 내린 끝에 막 출발 직전의 열차에 올랐다. 승무원에게 자진 신고하자 그래도 50%의 벌과금을 내야한다고 하여 이를 감수하고 숨을 고르며 차창 밖 겨울 풍경을 즐겼다.

출판기념회 장소는 내 고교 휴학시절 아침 저녁 드나들었던 경향신문 낙원동보급소가 있었던 낯익은 인사동 골목 한 밥집이었다. 2층 행사장에 이르자 그가 반기면서 '오월' '이승철' '지식을 만드는 지식'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깨끔한 미색 표지 시집을 건넸다. 나는 자리에 앉아 시집을 펼치고서 목차를 훑고 몇 편의 시를 읽다가 앞의 속표지를 펼치자 "존경하는 박도 선생님 2013. 12. 20. 이승철 拜上"이라는 이 시인의 사인이 나왔다. 나는 이 글씨를 대하자 갑자기 쥐구멍을 찾고 싶도록 부끄러웠다.

그해 오월과 여름

그해(1980년) 오월, 나는 서울시내 한 고등학교 교사였다. '서울의 봄'을 맞아 18년 만에 민주의 꽃 만개를 기다리는 데 갑자기 일진광풍이 휘몰아쳤다. 오월 하순 어느 날 저녁, 텔레비전에 불쑥 나타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불타오르는 광주 MBC 건물 화면과 함께 남도의 폭도 소식을 일방으로 전했다. 그 시절 나는 새가슴으로 동료들과 어울려 기껏 마포 최대포집에 가서 돼지갈비나 우직우직 씹으며 광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신군부는 광주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한 뒤 그 여세를 몰아 전국을 공포 분위기 로 몰았다. 그런 뒤 선무당 칼춤 추듯이 숙정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공무원, 교직원을 직장에서 내쫓았다. 그해 여름방학 시작 다음날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서도 무능 부패와는 전혀 거리가 먼, 한 선배교사가 그들이 친 숙정의 올가미에 걸려 돼지 멱따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 소식을 듣고 몇 선생들이 학교 음악실에 몰래 모였다. 모두들 신군부의 칼질을 성토하다가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보위에 진정서를 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그날 모인 동료들은 그 문안집필 책임자로 나를 지목했다.

그때 나는 단호히 거부하며 그냥 여러분과 같이 도장이나 찍겠다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후배 역사 선생 정아무개 선생이 자기가 쓰겠다고 나서서 나는 그 짐에서 벗어났다. 국보위로 보낸 그 진정서는 서울시 교육위원회로, 경찰서로, 다시 재단으로 돌아와 어느 날 그 진정서에 서명한 교사들은 교장실로 호출당했다. 교장실을 차지한 두 장학사 앞에 우리는 그 진정서에 서명을 취소한다는 시말서를 썼다. 그리고 그 후배교사는 우리보다 한 단계 위로 또 하나의 시말서를 썼다.

영화 <변호인>에서 아버지를 만나다

사실 그전 1980년 설날 다음날 2월 17일 새벽, 그때 부산에 사는 나의 아버지가 형사들에게 연행되어 40여 일간 갖은 고문을 당하며 신문을 받은 뒤, 그 무렵에는 대구화원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올 12월 18일 <변호인> 개봉 첫날 그 영화를 보면서, 특히 국밥집 아들 진우의 고문 받는 장면에 나는 아버지 주검 앞에서보다 더 많이 울었다. 

그때 나는 학교 동료들 모르게 토요일 밤차를 타고 부산에 가 변호사를 만나자 그는 아버지가 쓴 1000쪽 가량의 자술서를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그것을 쓰기까지 얼마나 매를 맞았겠는가. 한 관계자의 입을 통해 들은 말은 "영감 나이에 비해 몸이 좋다"는 말이었다. 그말은 여간한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형기를 다 마치고 나온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이 고문당한 얘기는 일체 입 밖에 내지 않고 날마다 그림만 그리셨다. 그 그림(달마상)과 공소장 판결문은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유이한 재산이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남은 가족의 안위를 걱정했기에 그들(신문 수사관)과 약속한 바를 지키신 듯, 그 숱한 고문과 치욕의 나날의 기억들은 그대로 무덤으로 가져가신 듯하다.

나는 그렇게 보신하며 그 시절을 살아왔는데 맨몸으로 수난을 당한 그에게 '존경하는'이라는 말을 듣기가 차마 부끄러웠다. 모두 4부로 나뉜 <오월> 시집은 54편의 시를 담고 있다. 전편이 가슴에 와 닿는 가슴 아픈 시이지만, 그 가운데 '울 아버지 생각' 한 수를 다시 읊으면서 오대산 전나무 밑둥에 잠들고 계신 나의 아버지에게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와 함께 띄어 보낸다.

울 아버지 생각

울 아버지 생각하면 떠오른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때였다.
광주의 젊은 것들은 모두 공수대원의 각목과 총칼에 난자당해
금남로, 충장로가 피바다, 피곤죽이 되었다는
그 흉흉한 소문을 듣고서 울 아버지,
매일 밤 뜬 눈으로 잠 못 이루시다가
오일팔 그 핏빛 10일간의 봄날이
탱크와 M60 기관총을 앞세운 계엄군의 진압으로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싹쓸이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그날 새벽길 따라 내 고향 함평서 광주까지
짱짱한 100리 길을 산 건너 물 건너서
밥 한 끼 안 잡수시고는 2대 독자 아들놈 찾아
한달음에 달려온 울 아버지. 광주 상무대 옆 마륵리
외딴 내 자취방을 찾아 울 아버지, 광주 진입로를 차단 중인
송정리역 앞 계엄군 공수대 앞으로 다짜고짜 다가가선,
2대 독자 내 아들놈 찾아야 한다고, 만일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염해줘야 한다고 내 자취방 주소 적힌,
딱 한 번 내가 아버지께 보낸 문안편지 겉봉을
계엄군들 앞에 들이밀고서 몇 겹의 바리케이드를
기어이 뚫고 오신 아아, 울 아버지…….
그날 오후였다. 햇살 한번 오지게 울창하던 날
쥐죽은 듯 골방에 숨어 지내는 나를 골목길 물어물어 찾아오셔서
한참동안 날 이윽히 쳐다보시던 울 아버지.
"정말 인공 때도 이런 고생 안했다." 며 날숨 거칠게
몰아쉬다가, "너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조상님들 뵐 면목 서서
다행이다." 무심히 그 한마디 불쑥 던지시더니
살아생전 처음으로 " 아버지, 용돈 좀 주십시오." 라고
말하기 전에 옛다, 하며 지갑째 돈을 털어주시더니
곧바로 고향땅 향해 발길을 돌리시던 울 아버지…….

울 아버지 생각하면 떠오른다.
한 집 건너 울지 않은 집이 없었던,
쫓겨가 살아남은 내가 감히 맨 정신으론 광주 산하를
치어다볼 수 없는 그 아침이 오고, 또 가고 그리하여
또다시 전국적으로 '삼청교육대'라고 이름 붙여진
허울 좋은 인간사냥이 시작되어, 그 당시 한국일보 함평지국장으로
일하시던 울 아버지는 입바른 소리 잘한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 정화대상자'로 낙인 찍혀 있었고
한번 찍히면 전두환 빽이 아니고는 빠져나올 수 없는
그 시절, 울 아버지 함평경찰서 유치장에서 몇 날 며칠
사상검증에 시달리다가 광주 31사단 삼청교육대 행
트럭에 압송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천하에 법 없이도 살 이진호 같은 사람을 잡아가면 어떡허냐!"
지역 유지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들고 일어난 끝에
용케도 그 지옥 같은 삼청교육대 입교 대상자에서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던, 울 아버지.
입 있어도 말 못하고, 그저 죽은 듯이 개불알꽃처럼
납작 엎드려 짐승의 시간으로 살아야 했던,
1980년 그 여름날 밤, 군홧발에 짓밟히는 악몽에
끝없이 가위눌리던 울 아버지,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울 아버지, 전두환이 때려잡겠다고 느닷없이 택시 대절해
목포 째보선창가로 달려 가셔서 땡볕 시들어가는 그 늦여름
선창가에 걸터앉아 전두환 이마빡 닮은 세발낙지 스무 마리
단숨에 목구멍 깊숙이 잡수시고는 "거참 기분 개운타, 개운타!"라고
몇 번이나 큰소리로 외치며 째보선창이 들썩거리도록
온밤 내 주유천하하셨다던, 그해 그날의 울 아버지여!

밥 좀 먹게 해 주세요

그날 이승철 시인 등단 30주년 육필시집 <오월> 출판기념식 하객들은 예순 분 남짓 오신 듯한데, 여러 사람의 축사 중에 유독 양성우 선배 시인의 말이 가장 아프게 들렸다.

"우리 이승철 시인, 밥 좀 먹게 해 주세요."

시인 이승철

 시인 이승철
 시인 이승철
ⓒ 범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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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전남 목포 산정동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나다. 서울과 함평에서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함평초등, 함평중, 학다리고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호남대를 다니다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충격으로 대학을 그만두다.

1983년 12월 김규동, 김봉근, 박몽구, 박선욱 시인의 추천에 힘입어 시 전문 무크 <민의> 제2집 <시와현실>(일월서각)에 5월의 진실과 그 상처를 형상화한 <평화시장에 와서>, <용봉동의 삶> 등 7편으로 등단하다.

1984년부터 2012년까지 나남, 인동, 산하출판사 편집장과 황토출판사 대표, 화남출판사 편집주간으로 활동하다.

1993년 1월부터 2년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 이후 이 단체의 이사와 청년문학인위원회 및 자유실천위원회의 부위원장 등을 지내다.

2004년 10월 <한국문학평화포럼>의 사무국장, 2007년 <한국작가회의>의 이사, 광주전남작가회의 부회장 등을 역임하다.

주요 시집으로 <세월아, 삶아>(두리출판사, 1992),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실천문학사, 2000), <당산철교 위에서>(솔출판사, 2006) 등을 펴냈으며, 공동 산문집으로 <이 시대의 화두·58 개띠들의 이야기>(화남출판사, 2006) 등을 출간하다.

현재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승철 육필시집 / 오월 / 지식을 만드는 지식 / 15,000원



오월

이승철 지음,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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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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