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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 직원 인터넷 불법선거운동 의혹을 받고 있는 서울 역삼동 한 오피스텔에서 지난 2012년 12월 11일 오후 수서경찰서 권은희 수사과장이 "문을 열어 달라"며 협조를 요청하고 있으나, 안에 있는 국정원 여직원이 문을 잠근 채 협조를 거부하고 있다.
▲ 경찰 협조 요청 거부하는 국정원 직원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 직원 인터넷 불법선거운동 의혹을 받고 있는 서울 역삼동 한 오피스텔에서 지난 2012년 12월 11일 오후 수서경찰서 권은희 수사과장이 "문을 열어 달라"며 협조를 요청하고 있으나, 안에 있는 국정원 여직원이 문을 잠근 채 협조를 거부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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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1일 강남구 역삼동 A오피스텔  607호 앞, 기자는 반신반의하며 밤을 지새웠다. 18대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터진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은 쉽사리 믿기 어려웠다. 그렇게 1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선 시계는 멈춰버렸고, 기자생활 2년차에 접어든 기자는 여전히 '역삼동 A오피스텔  607호 앞'에 서 있다. 기자가 1년 전에 미처 몰랐던 진실이 서서히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대통령 사퇴' 요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1년 만에 꺼내든 기자의 취재수첩에는 '박·그·네'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다.

[박] 박영선 똥볼 : "'국정원 사건, 똥볼 아니다'? 글쎄?" 했는데...

A오피스텔 앞에서 밤샘 취재를 마친 뒤, 다음날 오전 몽롱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털썩 소리를 내며 극세사 이불 위로 꽁꽁 얼어붙은 몸을 던졌다. 순간 박영선 민주당 의원의 말이 떠올랐다.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메모를 했다.

"박영선 의원은 '국정원 사건은 똥볼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글쎄…"

사건의 시작은 '국정원 직원이 불법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민주당 쪽 제보였다. 사안이 심각한 만큼 많은 취재진들이 A오피스텔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제보 내용 이상의 뭔가가 나오지 않았다. 오피스텔 607호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와 경찰·민주당 관계자 등이 대치하는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기자들은 민주당측에 "제보 내용만이라도 더 상세히 알려 달라, 물증은 있냐"고 물었지만 침묵 또는 원론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박영선 의원을 만난 기자들의 입에서는 "민주당이 똥볼 찬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박 의원은 "국정원 사건은, '똥볼'은 분명히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11일 밤 아무런 성과없이 오피스텔 현장을 지켰던 기자로선 박 의원의 말에 '글쎄'란 반응이 절로 나왔다(관련 기사 : 박영선 "대선은 10만~30만 표 싸움").

그러나 2013년 1월 국정원 직원 김씨가 온라인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 11개 아이디로 정치 관련 글 91건을 작성하고, 찬반클릭 244회를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뒤이은 검찰 수사에선 그가 속한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직원들이 온라인상에서 조직적으로 대선과 정치 관련 글을 작성했음이 드러났다. 11월 28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공소장에는 국정원 트위터팀의 범죄 혐의 121만여 건이 추가됐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별수사팀이 2200만 건이 넘는 트위터 글을 찾아냈지만 그 양이 너무 방대해 일부만 추려낸 것이 121만여 건이라는 것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똥볼'이 아니라 '골든볼'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 그 집 앞 : 역삼동에서 남현동으로... 국정원·원세훈 모두 부인했지만

'어린 송아지가 얼음 위에 앉아 울고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역삼동 '그 집 앞' 차가운 복도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채 생각했다.

의지할 것은 패딩점퍼뿐이던 2012년 12월 12일 새벽, 어딘가에서 구해온 '종이상자'를 깔고 앉은 사람들을 새벽 내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옷깃을 여몄다. 분기탱천한 모습으로 607호 앞에 버티고 선 민주당 관계자들도 슬슬 지쳐가는 모습이었다. 수많은 취재진과 민주당 관계자들이 폭 1m 안팎 복도에 뒤엉켜 있던 그날 밤은 유난히 길고 시리게 느껴졌다. 국정원과 김씨는 '그 집 앞'을 지키는 사람들에 의해 감금 등 인권유린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몇 달 후 '그 집 앞'은 남현동으로 바뀌었다. 지난 3월 18일 진선미 민주당 의원은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을 뒷받침하는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을 공개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국정원장직을 퇴임한 원세훈 전 원장이 해외로 출국 예정이란 소식이 들려왔다. 아직 동장군이 물러가지 않았던 3월 25일, 남현동 '그 집 앞'으로 달려갔다. 원세훈 전 원장의 집 앞에서 그의 부인을 만나는 '행운'을 맛 본 것은 끈질긴 취재의 결과라기 보다는 '우연'이었다. 그의 부인은 "원장님은 이임식 후 계속 집에 계셨다, 다른 곳에 가실 이유가 없다"며 "그 분은 (정치에) 개입하고 싶지도 않은 분"이라고 말했다(관련 기사 : 원세훈 전 원장 부인 "일본에 가려고 했다").

기자들만큼이나 그의 부인도 남편을 잘 몰랐을까? 지난 6월 14일 검찰 특별수사팀은 원세훈 전 원장을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결백을 주장하던 국정원 직원 김씨는 "지시에 따른 범행"을 저질렀지만, '상명하복' 관계를 감안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 윤석열 전 수사팀장은 직무배제라는 불이익까지 감수하며 '트위터 공작' 증거들을 찾아, 원 전 원장을 추가 기소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자택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자택
ⓒ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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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탓이오 : '권은희 왕따'시킨 경찰, 책임 떠넘기는 대통령

그날 밤 역삼동 A오피스텔 6층 복도는 꼭 '돗떼기시장(온갖 상품을 몰래 거래하는 시끌벅적한 시장을 뜻하는 속어)' 같았다. 그 틈을 헤집고 607호 앞에 선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연신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너무 정중한 것 아니냐'는 느낌이 들 정도로 권 과장은 조용했고, 차분하게 적법절차를 밟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반면 국정원 직원 김씨는 권 과장의 협조 요청을 계속 거부했다. 기자는 당시 현장 기사를 쓰면서 권 과장을 '수서서의 한 간부'라고 기록했다. 물론 그 때는 미처 몰랐다. 몇 달 뒤 권 과장의 실명과 사진이 주요 신문의 1면을 장식할 줄은(관련 기사 : "국정원 직원 댓글 사건, 경찰 고위층이 강한 외압").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과정에서 경찰 고위층으로부터 강한 외압을 받았다"고 폭로한 권 과장은 곧 경찰 사이에서 '왕따'가 됐다. 다른 경찰 관계자들은 국회와 법정에서 "그런 기억이 없다", "권은희 과장 발언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체 없는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외압 논란이 불거진 것은 권은희 탓'이라는 태도였다.

박근혜 대통령도 '네 탓' 대열에 가세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6월 24일 처음으로 국정원 댓글 사건을 언급하며 "국정원으로부터 그 어떤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래도 국정원에 문제가 있다면 국민들 앞에 의혹을 밝힐 필요가 있지만 그 절차는 대통령이 나설 문제가 아니다"고 했다. '내 탓'은 아니니까 애초에 문제를 제기한 국회가 해결하라는 뜻이다. 9월 10일에는 "지난 정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이명박 정부 탓'도 했다. 최근 '대통령 사퇴' 요구까지 등장하자 그는 더욱 '네 탓'을 하고 있다.

"지금 국내외의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는 행동들이 많습니다. 앞으로 저와 정부는 국민들의 신뢰를 저하시키고 분열을 야기하는 이런 일들은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을 것입니다(11월 25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국정원 댓글 사건' 1년. 2년차 새내기 기자의 취재수첩에도 적혀 있는 '박·그·네'를 박근혜 대통령만 정말 모르는 걸까.


태그:#국정원 대선 개입, #원세훈, #국정원, #권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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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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