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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를 겪으면서 앞으로의 세상은 인간적인 삶과는 더욱 멀어지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불온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삶으로 귀농을 결심했지만 아내의 완강한 반대로 10년 후를 약속받고 기다리기로 했다. 마음은 평온을 되찾은 듯 했지만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월급쟁이의 삶은 내 살을 갉아먹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결국 서른 살 초입 굳은 결심으로 사표를 쓰고 외국 잡지에서 봤던 '컴퓨터튜닝'이라는 생소한 직종의 자영업을 시작했다.

도시농업은 농사를 짓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이론과 실습 교육을 하여 농사와 함께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리기도 한다.
 도시농업은 농사를 짓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이론과 실습 교육을 하여 농사와 함께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리기도 한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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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을 준비하면서 시작한 도시농업"

아내가 허락한 10년간의 긴 유예기간이 끝났지만 본격적으로 귀농을 준비하는데 몇 년간의 시간을 스스로 더 만들었다. 그동안 준비 부족과 충동적인 귀농으로 실패한 경우를 봤었고, 나 역시 끝없이 소비만 강제하는 도시에서 일단은 벗어나고 싶었던 피난처가 농촌이었으므로. 귀농으로 단순 소박하게 살고자 했던 것은 현실 도피를 위한 고육지책이었기에 새로운 마음 자세와 준비가 필요했다.

5년 전, 텃밭이라도 가꾸면서 귀농 준비를 하자는 생각으로 인천의 도시농업시민단체를 알게 되면서 농사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기초와 전문가 과정을 거치면서 도시농업활동을 시작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귀농을 하기 전 경험을 쌓는 과정이었다. 점차 흙을 만지고 땀 흘리는 농사를 통해 무아지경에 이르는 신기(?)를 몇 번 경험하면서 생활비라도 벌던 자영업을 폐업하고 농사와 관련된 일에만 집중하였다.

2년 전, 도시농업이 전국적으로 유행하면서 내가 활동하는 단체가 여러 곳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더불어 사업영역도 커졌지만 비영리단체로서 할 수 있는 사업에 한계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영리 목적의 사업단에 대한 필요성이 생겼고, 공공의 이익이 되는 일을 한다는 사회적기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시간에 쫓기듯 일사천리로 준비를 하여 예비사회적기업을 인증받고 대표가 되었다.

"사회적기업의 목적은 일자리?"

"빵을 팔기 위해서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기 위해 빵을 파는 기업."

사회적기업에 관심이 있거나 교육을 받아본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받아들이는 말이기도 하며 정부가 사회적기업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호다. 사업을 시작한 후에 그것은 양날의 칼과 같아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자체고용 인력을 제외하고 사회적 일자리로 다섯 명을 배정받았다. 그 중에 세 명 이상(50%)은 사회적약자인 취약계층을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하며 만약에 취약계층 고용유지율이 50% 이하로 떨어지면 배정받은 고용인원 전체에 대한 지원금이 중단된다.

채용공고를 노동부 워크넷에 올리자 몇 시간 만에 이력서를 보낸 메일이 다섯페이지(100개 이상)를 넘어섰고, 회사가 있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작성한 수백통의 이력서를 다 읽었다. 절절한 사연을 담은 자필 편지를 보낸 사람도 있었고, 무작정 찾아와서 인정에 호소하는 사람까지…. 되도록 젊은층의 청년이나 뜻이 맞는 사람들과 도시농업의 미래를 만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청년들이 취약계층일 리는 거의 없었고, 도시농업을 통해서 농촌과 농업에 대한 중요성을 이해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

체념하듯 배정된 인력을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했다. 사회적기업을 하고 있는 주변에서는 매우 우려스러운 염려를 했지만  비정규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내가 그럴 수는 없었다. 급여도 일자리 창출로 지원해주는 최저임금에 20~30만 원을 더 올렸다. 실질임금을 생각하면 턱없이 적었지만 앞으로 열심히 해서 많이 받자고 다독거렸고 나 역시 직원들과 같은 급여를 책정했다.

도시농업은 콘크리트 도시안에서 사람이 만나고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 휠체어와 목발을 사용하는 장애인도 농사를 지을수 있게 만들어진 인천 송도의 도시공원안에 만들어진 장애인텃밭
 도시농업은 콘크리트 도시안에서 사람이 만나고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 휠체어와 목발을 사용하는 장애인도 농사를 지을수 있게 만들어진 인천 송도의 도시공원안에 만들어진 장애인텃밭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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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로 한 철 벌어 일년 먹고 살 수 없는 현실"

도시농업도 농촌처럼 봄부터 여름까지는 매우 바쁘다. 가을부터 조금씩 한가해지면서 겨울에는 할 일이 거의 없다. 회사에서 매출이 일어나는 날들을 따져보면 불과 6개월도 안 되고 겨울을 포함해서 6개월은 농사(농자재포함)에서 매출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들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 그나마 농사 관련 교육 사업에서 안정적인 수입원이 발생할 수 있었지만 이런저런 문제들로 인해서 가장 기대를 했던 매출 부분이 크게 축소되고 말았다.

농사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부족한 직원들이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었다. '1년 동안 내부역량을 키워서 다음해부터는 사업을 잘 하면 되지'라는 생각은 점차 "이건 아닌데…"라는 회의가 들었고 예상치 못한 직원들간의 갈등까지 계속해서 터져나왔다. 그야말로 엉망이 된 회사 분위기를 빨리 바꿔내지 못하고 고민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회사의 자금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상 예견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잔고가 줄어들수록 눈앞이 캄캄했다. 직원들도 다 알고 있었지만 진심으로 논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모든 게 다 나의 무능으로 다가왔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태우고 술을 폭음하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아내에게 내 속마음을 들키고는 했다.

"당신이 지금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는 거야? 그런거 아니면 당장 때려치워. 뭐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사업을 하냐고. 내가 처음부터 반대했지? 당신은 마음이 약해서 사람들을 세게 부리지 못한다고."

주변의 친구와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대표들과 전문가들을 찾아가기도 했지만, 결정은 내 몫이었다.

농사에 많은 청년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농사에 많은 청년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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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난 운영자금, 염치불구하고 아내에게"

"대표님, 당장 급여나갈 돈이 부족해요. 부가세도 내야하고, 농장 임대료와…."

어두운 표정으로 회계직원이 앞으로 지출해야 할 큰 몫의 자금들과 회사의 운영경비내역을 내밀었다. 항목마다 적힌 숫자들을 읽어 내려갈 때 마다 숨이 막혔다. 일자리 창출로 급여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회사가 부담해야 하는 급여와 각종 보험료, 사무실임대료, 식비 같은 단순경비들까지 월 500만 원 가량의 고정 비용이 발생되었다.

첫해 매출은 천만 원이 넘는 손해가 발생했고 내년 사업이 시작되는 4월까지 필요한 운영자금도 최소 천만 원이 넘었다. 당장 큰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항목도 없었다. 일단 내 월급을 중단시키고 지출해야 할 비용의 일부도 내 통장에서 처리를 했다.

당장 기댈 언덕은 아내밖에 없었다. 적은 월급이나마 갖다주지도 못하면서 초기 출자금에 이어 또 사업자금을 빌려달라는 염치없는 남편에게 아내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말린다고 해서 들을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때 기억에 남는 말이 지금도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다한 아빠, 애들도 이제 커서 지금 집이 작다고 더 큰 집으로 이사가자고 해. 옛날에 살던 아파트로 이사가면 안 되냐고 작은놈이 자꾸 말해. 빨리 월세 벗어나서 전세라도 가야 하지 않겠어? 나도 힘들어."

"다시 새출발 했지만 아직도 살얼음판"

다음날, 아내는 돈을 입금해줬고, 나머지 필요한 돈은 친구의 도움으로 한숨 돌렸다. 그리고 뜻이 맞지 않는 직원들을 설득해야 했다. '억지로 일하는 것은 회사나 개인에게 불행하다'는 말들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작은 다툼은 있었지만 마무리는 잘 되었다.       

2013년을 시작하면서 회사의 구성원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모두 바뀌었다. 지난 일년을 돌아보면 무척 바쁘고 정신없이 일을 했음에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허무함이 밀려온다. 특히 사람을 남기지 못한 것은 나의 무능함이라고 자책한다. 지금의 회사 상황도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모든 면에서 작년보다 조금 나아졌을 뿐, 여전히 살얼음판을 지금의 동료들과 건너야 한다. 작년 이맘때를 기억하는 아내가 종종 묻는다.

"회사는 잘 돌아가? 나라를 구하는 일도 아닌것 같은데 이젠 그만하지. 내가 뭐 준비해야 할 것은 없는 거지? 난 이제 절대로 못해준다."


태그:#도시농업, #사회적기업, #농사, #귀농, #취약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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