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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주(11월 17일) 남한 산성의 가을단풍나무가 불탄듯 붉다.
▲ 단풍 지난 주(11월 17일) 남한 산성의 가을단풍나무가 불탄듯 붉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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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남한산성을 지나며 가을빛을 만났습니다. 영하의 날씨가 이어진다는 예보에 겨울이 오기 전 아직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가을이 보고 싶었습니다.

계절이 가고 온다는 사실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무겁게 다가옵니다. 어쩌면, 당연히 맞이하리라 생각하던 계절을 맞이하기 전에 내 삶도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서리가 내린 후 피어난 용담, 보랏꽃 사이에 하얀꽃이 고난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퇴촌 11월 17일).
▲ 용담 서리가 내린 후 피어난 용담, 보랏꽃 사이에 하얀꽃이 고난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퇴촌 11월 17일).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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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 용담이 추위에 더는 보랏빛 꽃을 피우지 못하고 하얀 빛깔의 용담을 피워내더군요. 보랏빛의 상징은 고난인데, 그보다 더 큰 고난의 빛은 흰색인가 봅니다.

차라리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욕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부활의 예수를 부르짖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예수의 이름이 욕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죽는 것으로 그의 삶이 끝났더라면, 맹자나 공자처럼 그렇게 추앙받을지언정, 그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 모욕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히려 고난의 빛깔은 보라가 아니라 흰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반 나뭇잎을 떨어뜨린 가을, 찬바람이 남은 나뭇가지들을 흔든다.
▲ 단풍 거반 나뭇잎을 떨어뜨린 가을, 찬바람이 남은 나뭇가지들을 흔든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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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바람이 차갑고 세찼습니다. 남은 나뭇잎들을 다 떨구겠다고 다짐하듯 바람이 불어옵니다. 사실, 나무에게 나뭇잎을 놓는다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쉼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바람이 이기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바람을 나무가 이용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찬바람, 세찬 바람을 오히려 이용하는 지혜를 우리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다시 '겨울공화국'을 맞이하고 있는 이 어둠의 시대, 그것이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관문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밤나무의 단풍이 가을빛에 형형색색의 자기 빛을 드러낸다.
▲ 가을빛 밤나무의 단풍이 가을빛에 형형색색의 자기 빛을 드러낸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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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들은 이제야 제철을 맞이했다는 듯이 가을빛을 뿜어냅니다. 가을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가을빛을 노래하지도 못하고, 그냥 스러져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계절의 빛깔이 아름답지만, 가을에 뿜어내는 빛이 가장 신비스러운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을은 아직도 우리 곁에 오래 남아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신비스러운 빛을 놓기에는 너무 아쉬우니까요.

11월 18일 아침에 만난 지리산의 풍경, 노고단 쪽으로 하얀 눈이 쌓였다. 가을이 아닌 겨울임을 증명하듯 첫눈이 내렸다.
▲ 지리산 11월 18일 아침에 만난 지리산의 풍경, 노고단 쪽으로 하얀 눈이 쌓였다. 가을이 아닌 겨울임을 증명하듯 첫눈이 내렸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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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을빛을 본 날, 저기 남도, 지리산 자락이 보이는 곳으로 출장을 갔습니다. 남원역에서 구례로 들어가는 길에 빗발인듯 눈발인듯 헷갈리게 하더니만, 완연한 눈발이 날립니다. 가을 뒤에 만난 첫눈입니다.

첫눈, 괜시리 좋습니다. 그러나 이젠 가을과 이별하는 것이구나 생각하니 슬프기도 합니다.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지리산 자락을 바라보니 정상 부분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있습니다. 이렇게 첫눈이 온 것입니다. 저 하얀 눈 속에 가을이 잠자리에 든 것입니다.

아직 남은 가을단풍나무의 붉은 빛에 하얀 눈이 채색을 하듯 내린다.
▲ 첫눈 아직 남은 가을단풍나무의 붉은 빛에 하얀 눈이 채색을 하듯 내린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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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합니다. 아직 평지에는 가을빛이 남아 있는데, 채색을 하듯 하얀 눈이 내립니다. 가을빛과 겨울빛의 만남, 그 묘한 분위기는 일주일 전 수술한 뒤 깨어나지 못한 친구 어머니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생과 사가 혼재된 시간들을 넘어서는 순간 삶에서 죽음으로 옮겨갑니다. 가을과 겨울이 혼재된 시간을 넘어서는 순간 겨울이 옵니다. 그 기점이 첫눈일 것입니다. 그리고 삶에 았어서는 그 죽음이라는 기점이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이겠지요. 그 혼재의 시간이라도 조금은 더 길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길지는 않게, 그러나 너무 아쉽지도 않을 만큼.

구례 산동면의 마을에서 만난 농가, 나무대문과 마당과 빨래와 이 모든 것들이 고향을 잃어버린 도시인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 구례 산동면 구례 산동면의 마을에서 만난 농가, 나무대문과 마당과 빨래와 이 모든 것들이 고향을 잃어버린 도시인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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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로 나섯습니다. 잠시 큰 길에서 벗어나 시골의 작은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엔 잃어버렸던 고향의 풍경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당도 있고, 돌담도 있고, 툇마루도 있고, 빨래도 널려 있습니다. 그냥, 낭만일까요? 다들 도시로 몰려들게 만들어 우리의 고향엔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노인들만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철없는 낭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돌담은 제주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집터를 닦으려면 그렇게 많은 돌들이 나왔을 것이다.
▲ 구례 산동면 돌담은 제주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집터를 닦으려면 그렇게 많은 돌들이 나왔을 것이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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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뀔 때면 저를 괴롭히는 것이 천식입니다. 그런데 공기가 맑아서인지 이곳에서는 약물 없이도 호흡이 편안합니다. 출장 사흘째가 되어서야 약물을 안 가져왔다는 것을 알았고, 그 사이 아무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출장을 마치고 도시로 돌아온 날 저녁, 가빠지는 호흡에 약물을 흡입하고 나서야 호흡은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미세한 공기의 차이를 몸이 먼저 아는 것이겠지요.

돌담이 색이 확연히 다르다. 한 쪽은 말라있고, 한 쪽은 젖어있다. 젖어있는 곳에는 초록생명들이 자랐다.
▲ 돌담 돌담이 색이 확연히 다르다. 한 쪽은 말라있고, 한 쪽은 젖어있다. 젖어있는 곳에는 초록생명들이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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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마을 돌담 중 한 곳은 보시는 바와 같이 색이 분명하게 갈렸습니다. 물 때문입니다. 검은 곳은 물이 나오는 곳인가 봅니다. 그곳엔 이끼류의 식물들이 초록의 빛깔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생과 사, 삶과 죽음. 자연도 저 돌담도 그 둘의 경계는 없어 보입니다. 생과 사의 경계가 없음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단지, 섭섭하고, 더 잘해줄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 이별할 시간을 내가 정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을 두렵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는 가을을 보면서 이미 온 겨울을 보면서 가을빛 속에서 겨울빛을 보면서 삶의 끝자락을 생각합니다. 삶의 끝자락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부질없어 보입니다. 그 부질없음을 알지 못하고, 끝내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 아집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염을 마친 후, 관에 모셔진 시신을 보며 삶의 끝자락을 본다(염쟁이 유씨 연극 중 촬영).
▲ 염 염을 마친 후, 관에 모셔진 시신을 보며 삶의 끝자락을 본다(염쟁이 유씨 연극 중 촬영).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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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결국은 이렇게 돌아갈 것인데 말입니다. 유순웅 님의 일인극 <염쟁이 유씨>를 봤습니다. 대학교 선후배의 인연이 있어 행사에 초청을 했지요. 염쟁이 유씨가 마지막 염을 합니다. 염쟁이만은 시키지 않으려던 아들의 시신을 염하는 염쟁이 유씨의 마지막 염.

그렇겠지요. 누구나 인간은 죽으면 저렇게 염되어 좁은 관에서 이 세상의 빛과 이별을 하겠지요. 눈으로만 이 세상의 빛과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이 이 세상의 빛과 이별하고 어둠으로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한 주 사이, 가을과 겨울 사이를 오갔습니다. 가을빛과 겨울빛이 공존하는 계절에 삶의 끝자락을 생각했습니다. 별 것 없지요. 그래서 허무한 것이 아니라, 별 것 없기에 남에게 상처주는 삶은 살지 말아야겠다 다짐을 합니다.


태그:#가을, #겨울, #돌담, #첫눈,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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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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