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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연 김다흰(김시완역), 전석호(임주혁역), 권준엽(권준엽역) 등
 출연 김다흰(김시완역), 전석호(임주혁역), 권준엽(권준엽역) 등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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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가 연극이 그리운 날이 있습니다. 

제게 10월의 마지막 주말이 그런 날이었습니다. 아마 가을 탓인가 봅니다. 노랗게 변한 느티나무 잎이 이제는 하나둘 땅으로 내려앉고 있습니다. 이 느티나무에 단 하나의 잎도 남지않았을 때 저는 더 늙어있겠지요.  

"우리는 해가 가면서 늙어가는 게 아니라 매일 매일 새로워지는 것이다.(We turn not older with the years, but newer every day.)"라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말을 그대로 받아 들이기위해서는 사실 좀 훈련이 필요합니다. 

위로가 필요한 시간에는 왜 영화보다 연극이 생각날까요? 영화는 대로변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 같고 연극은 뒷골목 시인의 부인이 운영하는 북카페같다는 선입견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서리가 좋은 것은 한 면이 끝나는 지점이지만, 또 다른 면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변경(邊境)이 좋은 것도 그런 탓일 것입니다. 올 3월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때에 터키를 찾은 것은 터키가 아시아의 변경이고, 현대의 변경이며, 문명의 변경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연극 <터키블루스>로 다시 추위가 시작되는 시점의 제게 변경을 여행하는 위로를 기대했습니다.  

#2

대학로 스타벅스 앞의 인파를 비켜서 큰 주유소 뒤쪽의 작은도서관 '호모북커스'를 지나서 비스듬히 기울어진 길을 오르면 '연우소극장'이 있습니다.

스타벅스가 있는 도로의 대학로 인파.
 스타벅스가 있는 도로의 대학로 인파.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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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리의 모서리건물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에 극장이 있습니다.

연우소극장은 인파를 비켜서 한적한 골목의 지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연우소극장은 인파를 비켜서 한적한 골목의 지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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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파레트(pallet)를 깔고 쌓은 것이 무대의 모두인 작은 극장. 그 무대만한 8~90명석의 관객석이 그 무대를 향해 자리해있습니다.

나무 팔레트를 깔고 세운 무대
 나무 팔레트를 깔고 세운 무대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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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맨 앞자리로 안내되었습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 꼴찌에게 힐난 대신에 격려를 안겨주었습니다.

작은 관객석은 맨 앞좌석의 관객은 발을 뻗으면 무대에 닿을 수 있습니다.
 작은 관객석은 맨 앞좌석의 관객은 발을 뻗으면 무대에 닿을 수 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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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는 두 명의 배우가 여행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친구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의 시완은 중학교 3학년의 주혁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만났습니다. 주혁은 시완에게 음악에 빠져들게 합니다. 둘은 선생으로 만났지만 친구가 되었고, 영어 때문에 만났지만 서로가 상대에게 인생을 가르치는 꼴이 됩니다. 

무대위의 두 사람은 30대에 그 십대의 우정을 추억합니다. 정형외과 의사 시완은 음악을 통해 주혁을, 고고학자가 꿈이었던 주혁은 시완에게 들었던 슐리이만의 트로이 발견이야기를 찾아 떠난 터키에서 주혁을 추억하지요. 주혁이 관객을 향해 물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터키쉬 블루'라는 색을 아세요?"

그리고 독백처럼 답합니다.

"연한 청록색? 그건 어떤 하나를 지칭하는 게 아니래요. 터키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숲이 함께 있을 때, 터키쉬 블루라고 말하는 거래요. 멋있죠? 그걸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파타라 해변이구요. 함께 있을 때야 비로소 느껴지는 색…."

그는 파타라 해변에서 형과 함께 있었을 때의 색을 기억하려고 애씁니다. 

#3

시완은 터키의 주혁을 생각하며 인덕션의 온도를 올리고 체즈베(Cezve)로 터키 커피를 끓입니다. 그리고 관객을 향해 설명을 곁들입니다.

"지금 보고 계신 이건, 터키 커피에요. 터키 커피는 내려먹는게 아니고, 달여서 먹는 달임식 커피에요. 그래서 맛도 훨씬 진하고, 시간도 오래 걸려요. 아! 커피에 관련한 터키 속담에 이런 말도 있어요. '커피는 지옥보다 검고, 죽음보다 강하며, 사랑보다 달콤해야 한다.'"

시완은 두 잔을 따랐습니다. 한잔은 자신이 주혁을 추억하기 위해 그리고 한잔은 맨 앞에 앉은 제게 내밀었습니다.

불편하고 좁은 이 무대는 배우가 마치 나 만을 위해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 같은 특별한 공감을 제공합니다.
 불편하고 좁은 이 무대는 배우가 마치 나 만을 위해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 같은 특별한 공감을 제공합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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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내미는 커피를 받아든 순간 저도 이 연극의 배우가 된 듯싶었어요. 어쩜 제 인생 전체가 연극이고, 이 연극은 그 연극속의 연극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묵직한 터키시 커피(Turkish Coffee)의 향이 폐부로 들어왔습니다. 시완이 물었습니다.

"맛이 어떠세요?"

저는 진실로 답했습니다.

"(색이)태양보다 붉고, (향미가)해구보다 깊군요."

시완이 감격의 표정을 지었고 관객이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4

장자가 호접몽(蝴蝶夢)이 비로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서 장자가 된 것인지... 현실의 내가 연극을 보는 것인지, 연극 속에서 내가 현실을 연기하는 것인지……. 시간은 금시 2시간이 흘렀고 이스탄불, 에페소,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트로이 등 연극은 지난 봄 나의 터키여정을 지나서 끝이 났습니다. 

그들은 각자 함께 있었던 10대를 추억하며 말합니다.

"Es ist gut!"

칸트가 임종 전 포도주 한 방울로 목을 적신 후 했다는 말 '참 좋다!'. 무대와 객석이 닿아있어 좋았고, 콘서트 같기도 하고 드라마 같기도 해서 좋았고, 무대위에서의 터키 트래블로그(travelog)가 연극 같지 않아서 좋았고, 무엇보다도, 배우 같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가 아니라 자신들의 과거를 실제 반추하는 듯해서 좋았습니다.  

'터키블루스'는 나를 스쳐갔던 것들을 의식 속으로 끌어내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방치되었던 자아입니다. 누구에게나 가장 빛났던 시간은 있습니다. 현재의 자아가 견디기 힘든 날 각자의 '파타라'를 열어볼 일입니다.

"옛날 옛날에 어떤 소녀가 태양의 신 아폴론에게 그가 좋아할 것 같은 물건들인 리라, 활, 화살을 상자에 넣고 예쁘게 포장해서 소원을 빌러 가는 길에 바닷가에서 그만 깜빡 잠에 빠졌대요. 그런데 잠이 든 사이 바람이 불어 상자가 바다에 빠졌어요. 잠에서 깼을 땐 상자는 이미 바다 한가운데로 떠내려가고 있었죠. 소녀는 몹시 슬퍼했대요. 그러자 파도가 넘실넘실 상자를 운반해서 아폴론에게 보내주었대요. 그리고 소녀는 소원을 이루었죠. 그때 그 상자의 이름이 파타라였대요."

공연을 마치자 배우가 어두운 골목의 환송을 위해 극장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관객은 어둠속에서도 바로 발길을 떼지 못합니다. 연극의 여운은 이런 것인가 봅니다.
 공연을 마치자 배우가 어두운 골목의 환송을 위해 극장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관객은 어둠속에서도 바로 발길을 떼지 못합니다. 연극의 여운은 이런 것인가 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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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블루스 Turkey blues(극단 연우무대 62번째 작품)
'인디아 블로그'(2010)와 '유럽 블로그'(2013)에 이은 극단 연우무대의 세 번째 여행 연극 시리즈. 영어과외 교사와 학생으로 만난 시완과 주혁의 짙은 우정이야기. 그러나 '스탠드 바이 미 (Stand by me)', '왼손잡이' 등 추억의 노래를 듣는 콘서트로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애초에 10월 27일까지 공연 예정이었던 것이 일주일 연장되어 공연되었습니다.

- 공연기간 | 2013.09.26 ~ 2013.11.03
- 공연시간 | 화수목금 8시, 토․일․공휴일 3,6시
- 공연장소 | 대학로 연우소극장
- 입 장 료 | 일반, 대학생, 청소년 :25,000원

- 2012년 여름 | 터키여행
- 2012년 여름, 가을 | 서울 및 지방 쇼케이스 진행(총 4회)
- 2013년 4월18일~28일 | 워크샵 공연 진행(연우소극장)  
●작가 | 이천우
●연출 | 박선희
●출연 | 김다흰(김시완역), 전석호(임주혁역), 권준엽(권준엽역) 등

■연우소극장http://www.iyeonwoo.co.kr 02-744–7090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터키블루스, #연우소극장, #김다흰, #김시완, #전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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