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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앞에서 설명듣고 있는 참석자들. 앞에 방파제가 보인다.
 방파제 앞에서 설명듣고 있는 참석자들. 앞에 방파제가 보인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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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슬도예술제 개최하는 날, 방어진 근대역사 탐방도 하오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

9월 반상회보를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매 달 발행되어 집집마다 배달되는 우리동네 반상회보에는 제가 살고 있는 동부동뿐 아니라 울산시 동구지역에서 진행되는 여러가지 행사 내용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10월 13일 슬도예술제가 오후 4시께부터 진행되고 오후 2시부터 모여 방어진 항 근대역사 탐방이 있다고 했습니다. 남목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방어진 항에 대한 역사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벌써 4회째를 맞는다는 '슬도예술제'에도 가본 적이 없어 가보고 싶었습니다. 역사 탐방도 해보고 예술제도 참가하기로 마음먹고 지난 13일 오후 2시경 모이라는 장소로 가보았습니다.

그곳은 바닷가였습니다. 고기 비린내가 많이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방어진 항구였습니다. 고깃배들이 수십 척이나 정박해 있었습니다. 배가 정박해 있는 바닷가 쪽으로 엄청 긴 방파제도 있었습니다. 모두 25명의 가족이 모였습니다. 어린이서부터 중년·어르신도 계셨습니다. 10여 명씩 나뉘어 1·2조로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방어진 항으로 대표되는 방파제로 갔습니다. 방파제는 파도나 해일로부터 배와 어촌·어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

"지금은 저렇게 현대공법으로 더 잘 만들어 둔 저 방파제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일제강점기였습니다. 방어진 방파제는 1910년께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수많은 중장비를 투입시켜 만들지만 당시에는 모두 사람이 투입되어 만들었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19만5000여 명의 노동자가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공사 기간만도 5년이었으며, 당시 일본 화폐로 70만5000엔, 우리나라 돈으로 60억 원이나 투입된 어마어마한 공사에 해당됩니다. 처음엔 일본인 노동자가 와서 공사를 진행했고 나중엔 조선사람도 강제로 많이 투입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사기간 동안 폭풍이나 노동재해로 숨진 사람이 40여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공사 완료후 일본인들은 축조비도 세우고 방파제 그림엽서도 발행 했고, 찹쌀 모찌도 나누어 주는 행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저 방파제의 길이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무려 280미터나 됩니다. 수면 위로는 25미터, 수면 아래로 55미터 높이로 되어 있습니다."

탐방 해설자는 말을 계속 이었습니다.

"조선말기 방어진은 빈농빈어의 한적한 농어촌에 불과 했습니다. 1897년께부터 고등어와 삼치를 잡기위해 일본 어민들이 오가기 시작하면서 방어진 항은 조선 고등어 어업의 일대 근거지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러다 1905년께 오카야마현에 있는 히나세 마을에 사는 어민이었던 아리요시 가메키치 가문이 방어진에 들어와 살면서 해마다 그곳 일본 어민이 수없이 이주해 와서 살게 됩니다. 조선인보다 일본인이 더 많아지게 되었고 일본인은 자치회를 조직하여 일본인 학교와 관공서를 세워 번성기를 누렸습니다.

어느 때부터 방어진엔 일본인으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방어진에서 잡히는 주 어종은 정어리·고등어·방어와 고래였습니다. 가장 번성할 때는 수백 척의 배들이 항구를 메울 정도였으며, 방어진 항에서 잡은 어획량만도 전국 총 생산량의 10%에 이를 정도로 동해안 최대의 항구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방어진에는 철공조선소도 있었고, 통조림공장과 사이다 공장·간장공장도 있어 노동자도 많았습니다. 일본인들은 먼저 주재소(치안·경찰) 부터 세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어진엔 영화관과 여관·주점이나 당구장·이발관 같은 유흥시설이 밀집한 곳으로 번성을 누렸다고 합니다. 게다가 학교와 목욕탕·여객터미널·우체국·은행 같은 편의시설도 갖추어진 번화가 였다고 합니다. 당시 개도 1만 엔 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라니 방어진의 풍요로움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부는 일본인에게만 집중되었습니다. 조선인은 여전히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일본 어민이 잡은 물고기는 모두 일본으로 가져가 팔았습니다."

방어진 항 근처 마을에 1000년 넘은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 1000년 넘은 소나무 방어진 항 근처 마을에 1000년 넘은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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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20년께부터 어획량 감소와 중일전쟁으로 인한 어선 징발로 급격히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철공조선소가 있던 자리에 다른 조선업종이 있었으나 1972년 전하동 바닷가 일대에 현대중공업이라는 대기업이 생겨나면서 방어진 항에 1929년경 철공조선소가 설립되어 선박 수리·발전기를 제작하며 그 명맥을 이어오다 몇 해 전 부도를 맞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높은 빌딩이 비어 있었고 폐업한 상태라 합니다. 동구청은 그곳을 공원화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1000년이나 살고 있다는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나무는 절간으로 지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동구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라 했습니다. 그 소나무의 이름을 '곰솔나무'라 했습니다. 그 모습이 용과 비슷하고 용의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어 '용나무'라고도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소나무 곁에 우물이 있어 그 우물을 마시면 행운이 깃든다고 믿어 전쟁터에 나가던 젊은이들이 그 우물을 마시고 참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안내된 곳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일제시대 건물이었습니다. 목욕탕과 가정집이 소개되었는데 목욕탕은 개조되었고 남아 있는 것은 목욕탕 탑뿐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식 건물이 몇 채 있었는데 많이 낡아 보였습니다. 안내원은 목욕탕 앞에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왼쪽,오른쪽에 한채씩 남아 있었다.
▲ 일제시대 2층집 왼쪽,오른쪽에 한채씩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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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욕탕이 일재시대에도 있었던 목욕탕입니다. 너무 낡아 목욕탕을 알리는 저 시멘트 탑만 그대로 두고 새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사람보다 일본사람이 더 많았다고 하지요. 주로 일본 노무자가 목욕시설을 많이 이용했었는데 스모 선수들이 아랫도리에 걸친 식으로 그렇게 그곳만 걸치고 알몸으로 목욕탕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사람들은 민망해서 얼른 다른 곳으로 피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시 수협 공판장으로 안내되었습니다. 그곳은 1909년부터 동양포경주식회사로 일본인 소유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고래를 잡아 경매에 붙혀지고 해체작업을 합니다. 요즘은 고래잡기가 불법이라 못잡지만 가끔 그물에 걸려 포획되기도 하지요. 포획된 고래는 해경의 조사를 거쳐 경매 후 해체작업을 합니다. 얼마 전에 포획된 고래도 이곳에서 해체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래가 우연하게 그물에 걸려 잡히면 어민들은 '로또 맞았다'고 하지요. 고래는 바다의 로또 입니다. 우리나라는 1985년부터 고래잡는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수협 공판장이 있는 바다 앞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뭔가를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슬도 가는 길로 갔습니다. 성끝마을 이라는 곳에 이르러 안내원이 말했습니다.

"방어진 근대사 탐방은 여기까지 입니다.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성끝마을 안엔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보실분은 보시구요. 오후 4시부터 슬도예술제를 하니 참석하실분은 참석하시고 자유로이 하시면 되겠습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방어진 근대사 탐방은 오후 3시 30분경 끝났습니다. 저는 시간이 남아 성끝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마을안 벽마다 예쁜 그림들이 많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또다른 벽화마을을 구경했습니다.

여러가지 그림이 마을 벽마다 예쁘게 많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 성끝 병화마을 여러가지 그림이 마을 벽마다 예쁘게 많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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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울산시 동구청, #근대역사탐방, #슬도예술제, #벽화마을, #방어진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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