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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방법원 서관 502호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7차 공판(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범균) 현장. 당초 이날 재판에는 국정원 직원 두 명이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한 명이 안 왔다. 판사가 말했다.

"황◯◯ 증인의 신문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의사의 진단서를 첨부해서, 임신으로 입덧 구토 증세가 심해서 도저히 출석이 어렵다는 증인 불출석 사유서가 제출돼 있습니다."

황아무개씨는 검찰과 원 전 원장 양쪽 모두 증인으로 신청한 사람이었다. 원 전 원장 측 변호인은 즉각 "검찰이 (증인 신청을) 철회하면 우리도 철회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검찰은 "검찰 조사 진술에 중요한 내용이 많은데 부동의(형사소송법상 변호인측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재판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되어 있다, 우리는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그때 검찰 측 수장인 윤석렬 팀장(여수지청장)이 말했다.

"재판장님, 그…, 임신 중에 공개적인 신문을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비공개로라도… 아마 부담스러워서 그런 것 같은데요, 저희가 비공개로 해서 (검찰) 조서 진정이라도 성립되게. 신문 시간을 확 줄여가지고 하겠습니다."

비공개? 낯선 장면이다. 준비 기일까지 합해 모두 10차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비공개를 원했던 쪽은 원 전 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국정원 쪽이었지 검찰이 아니었다. 오히려 검찰은 강력하게 공개 재판을 요구해왔다.

한쪽이 증인 신청을 철회하지 않자, 이범균 판사는 "알겠다, 그런데 임신으로 인한 건강상 이유라고 하니 한달 정도 시간을 주어야 할 것 같다"면서 "11월 4일 다시 소환하겠다"고 말했다. 판사는 "(신문) 시간을 좀 짧게, 부담스럽지 않게 하겠다는 뜻도 전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금 전 철회할 수도 있다던 이동명 변호사(법무법인 처음)가 나섰다.

"재판장님, 황 증인이 만약 나와서 신문한다면 저희들은 짧게 물을 수가 없습니다. 이 증인이 가장 책임회피적인 진술을 많이 했습니다."

이 또한 낯선 장면이다. 지금까지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증인 신문에 소요된 시간이 검찰이 100이라면 변호인은 50 이하였다. 그런데 검찰은 "시간을 확 줄여" 짧게 하겠다고 하고, 오히려 변호인이 "짧게 물을 수가 없다"고 한다.

대체 국정원 여직원 황아무개씨는 누구이고 이번 사건에서 어떤 의미이길래, 이렇게 낯선 장면이 벌어지는 것일까?

연결고리

지난 8월 19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가 자정무렵 청문회 산회 후 국정원 관계자들의 비호를 받으며 국회 본관을 나서고 있다. 국정원은 사건 발생 이후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김씨를 두둔하고 있다. 그런데 김씨가 소속됐던 심리전단 3팀5파트의 또다른 여직원 황아무개씨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국정원에 불리한 진술을 검찰에서 했다는 이유로 조직 내에서 시달림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 19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가 자정무렵 청문회 산회 후 국정원 관계자들의 비호를 받으며 국회 본관을 나서고 있다. 국정원은 사건 발생 이후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김씨를 두둔하고 있다. 그런데 김씨가 소속됐던 심리전단 3팀5파트의 또다른 여직원 황아무개씨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국정원에 불리한 진술을 검찰에서 했다는 이유로 조직 내에서 시달림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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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씨는 지금까지 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된 10명 중 유일하게 출석을 거부한 사람이다. 국정원의 대선·정치 개입 의혹 사건을 촉발시킨 김하영씨와 함께 심리전단 3팀 5파트에 속해 있다. 나이는 김씨보다 조금 많지만, 직급은 비슷한 일반 파트원으로 알려져 있다. 즉, 황씨는 김씨와 같이 오늘의 유머를 비롯해 일간베스트, 보배드림, 뽐뿌 등에서 사이버 공작 활동을 수행한 요원이다.

하지만 황씨는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다른 직원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의 진술 내용은 그동안 다른 국정원 직원들이 증인으로 출석한 재판을 통해 일부분을 엿볼 수 있다.

증인으로 출석한 심리전단 직원들은 모두 검찰이 국정원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한 '심리전단 업무매뉴얼'에 대해 "본 적 없다"고 증언했다. 매뉴얼에는 ▲ 사이버 활동을 할 때 외부 커피숍 등을 이용하되 한번 간 곳은 되도록 또 가지 말고 ▲CCTV가 설치된 곳을 피하며 ▲계산할 때 카드가 아닌 현금을 사용해 개인정보를 남기지 말고 ▲게시글을 주기적으로 삭제할 것 등 치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지난달 23일 증인으로 출석한 김하영씨에게도 검찰은 이에 대해 물었다.

- 업무 매뉴얼을 교육받은 적 있는가?
"매뉴얼을 본 적 없다."

- 황◯◯의 진술에 의하면 2012년 4월 이 매뉴얼을 이메일로 전달받은 바 있다고 하는데?
"메일로 받은 기억은 없고, 내용 중 일부는 구두로 들은 적 있다."

심리전단 직원들이 매일 전달받았다는, 그날그날 온라인에서 해야 할 활동 내용이 담긴 '이슈 및 논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서면으로 전달받은 것은 없다"고 진술했지만, 황씨는 달랐다. 지난달 30일 이규열 5파트장이 출석한 법정에서 오간 신문 내용이다.

- 증인은 (이슈 및 논지를) 누구에게서 시달받았나. 팀장?
"그렇다."

- 서면으로 받았는가.
"서면으로…, 보통 수첩에 받아 적어 오는 식이지, 서면으로 받은 기억은 없다."

- 다른 파트원은 서면으로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전달받은 바 없다. 황◯◯ 직원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조직의 눈총

지난 4월 30일 오후 검찰은 국가정보원에 대해 전격적인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당시 국정원 정문 앞에 바리케이트가 겹겹이 설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 국정원, 바리케이트 겹겹 지난 4월 30일 오후 검찰은 국가정보원에 대해 전격적인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당시 국정원 정문 앞에 바리케이트가 겹겹이 설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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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재판에는 움직이기 힘든 강력한 증거가 있다. 조직의 정점인 국정원장이 내린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과, 조직의 맨 마지막 하부인 심리전단 요원들이 온라인 공간에 남긴 수많은 게시물 내역과 추천·반대 클릭 내역이다. 그런데 그 사이가 성긴다. 원장의 총론적인 지시가 어떻게 말단 심리전단 요원들의 활동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는데 검찰은 실패했다. 예를 들어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에 등장하는, 심리전단이 2010년 7월 전후 작성했다는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방안' 문건이 대표적이다. 활동 매뉴얼은 약간 부족하고, 그나마 직원들이 부정하고 있으며, 이슈 및 논지는 서면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 빈 공간에 황씨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국정원 수뇌부의 의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지시로 내려왔고, 반대로 어떻게 보고되었는지에 대해 명확히 진술한 것으로 보인다. 진선미 의원실 관계자는 "황씨는 검찰에 기억을 더듬어서 문서 양식이 이러이러하다고 써주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강도는 조금 덜 할 수 있지만, 원세훈 재판에서 황씨의 증언이 차지하는 위치는 김용판 재판에서 권은희 과장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런 그를 조직이 가만히 놔둘까? 황씨의 불출석을 검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검찰 관계자는 "그가 상대적으로 선량한 사람인 것은 맞고, 본인의 의사에 따라 검찰에서 진술한 것은 맞는데, 그게… 진술 이후에 조직에 들어가서, 참 시달림을 많이 받고 있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그가 재차 소환에 응해 증인석에 앉게 된다 하더라도, 검찰에서 한 증언을 그대로 유지할지는 미지수다. 이미 국정원 직원들은 초기 진술에서 조금씩 후퇴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또다른 5파트 직원 윤아무개씨가 검찰 조사에서는 "솔직히 나도 그 지시(매일 시달된 이슈 및 논지)를 보면서 어떤 부분은 (북한이나 종북 대응보다는) 대통령이나 국정홍보의 측면이 더 강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가, 지난 7일 법정 증언에서는 "그런 경우는 극히 일부분이었다"고 후퇴한 바 있다. 조직의 논리 앞에서 많은 경우 개인은 무기력하지 않은가.

원장과 심리전단 사이 연결고리가 성긴 틈을 파고들어 원 전 원장 측은 대선 및 정치개입 지시가 아니었고, 심리전단은 정당한 활동을 했으며, 부적절한 댓글은 극히 일부이고 그나마 말단 직원들의 돌출행동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덕적 비난의 대상과 법률적 처벌의 대상은 엄연히 다르다. 이 사건의 피고인은 말단 직원이 아니라 국정원장이었던 원세훈씨다.

몇 개월 후면 엄마가 될 예정인, 검찰 조사 이후 조직에서 시달림을 받고 있다는, 국정원 여직원 황씨는 과연 법정에 증인으로 설까? 그때도 검찰에서의 진술을 유지해 연결고리 역할을 할까? 지난 7월 8일 첫 준비기일 이후 숨가쁘게 달려온 원 전 원장 대선·정치개입 재판이 이제 후반부로 넘어가고 있다.

[중간점검] 원세훈 공판 다시보기

본격적인 공판이 열리기 전인 지날 8월 16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했다.
 본격적인 공판이 열리기 전인 지날 8월 16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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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원세훈, #국정원, #심리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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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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