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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독일을 찾았습니다. 왜 독일이냐구요? 우선 우리와 독일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2차 대전 후 분단국가였고, '라인강'과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뤘던 것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나라 크기도 비슷하고, 천연자원이 별로 없이 인적 자원에 의존하고 수출국가라는 점까지. 하지만 최근 10년 사이 한국과 독일은 전혀 달리 가고 있습니다. 한국은 비정규직을 포함한 노사갈등은 여전하고, 계층간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면서 국민들의 사회경제적 민주화 요구가 거셉니다. 독일은 세계 경제위기 속에서 지속적인 성장과 복지국가를 유지해가고 있습니다. 독일모델을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때 '유럽의 병자'였던 독일이 어떻게 '유럽의 강자'으로 부활했을까, 궁금했습니다. 10여일동안 독일 곳곳을 다녔습니다. 거대 자동차회사 노동자부터 기업인, 교수, 일반시민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선 손학규 전 민주당 고문의 독일 이야기부터 시작의 문을 엽니다. [편집자말]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이 28일 오후(현지시간) 베를린 테겔공항에서 부인 이윤영씨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손 고문은 지난 1월부터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싱크탱크인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의 후원으로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연수해왔다.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이 28일 오후(현지시간) 베를린 테겔공항에서 부인 이윤영씨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손 고문은 지난 1월부터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싱크탱크인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의 후원으로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연수해왔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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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검은색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하얀색 승차권을 보여 주었다. '80유로'라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베를린 지하철을 비롯해 대중교통을 한 달 동안 이용할 수 있는 정액권이다. 작년 대선 이후 독일서 연수 중인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에게 '다이어트를 하시냐'고 물었을 때다. 8개월여 동안 도보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니 자연스레 '슬림'해졌다는 것.

손 고문이 29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귀국을 두고 이미 국내 정치권에선 여러 해석이 이어졌다. 야당 일부에선 기대감도 엿보인다. 이른바 '맏형론'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공안 통치와 민주주의 후퇴에 따른 국민적 반감이 거센 상황에서 민주당 등 야당의 역할에 대한 아쉬움이 깔려 있다.

지난 6일 오후 독일 베를린 메링담 전철역 인근 한 식당에서 기자와 마주 앉았다. 기획취재를 위해 독일을 찾은 취재진이 '편하게(?) 식사하자'고 요청한 자리였다. 얼굴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하루에 많이 걸으시냐'고 물었더니, "집에서 나와 매일 30분 이상씩 걷는다"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요즘도 발가락에 휴지를 감고 다닌다"고도 했다. 웬만한 거리는 전철 등 대중교통으로 다닌다고 했다.

딜레마에 빠진 독일 야당은 한국 민주당의 데자뷔?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이 지난 1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모터쇼에 참석해 현대기아차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이 지난 1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모터쇼에 참석해 현대기아차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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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그는 8월께 귀국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 달 이상 늦춰졌다. 지난 22일 끝난 독일 총선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보수 성향의 집권당인 기독교민주당(아래 기민당)의 승리로 끝났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세 번째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유럽 최장수 여성총리'란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손 고문은 "사실상 유럽 대통령"이라고 평가했다.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독일 총선으로 옮겨갔다. 손 고문은 최근 한 달여 동안 선거를 통해 독일사회를 다시 들여다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사회와 야당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많아 보였다. 그는 독일 야당인 사회민주당(아래하 사민당)을 두고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마치 우리나라 민주당을 향한 소리처럼 들렸다.

"독일의 고민도 한국과 비슷해. 최근 몇 년 새 파견근로자 등 비정규직이 크게 늘어났어요. 기민당 집권 이전인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때 실시한 정책들 때문이지. 당시에 '아젠다 2010'이라고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책이 있었는데, 이것이 노동시장 유연화 등도 함께 담고 있었어요. 사민당은 그 이후 집권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 정책에 실망한 지지자들은 아예 좀 더 진보적인 좌파당으로 빠져나가 버렸어."

사실 '아젠다 2010'은 독일 경제가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슈뢰더 총리는 이를 통해 고비용 구조였던 정부의 사회보장 부담을 대폭 줄이고 노동시장에 유연성을 가미했다. 기업의 법인세율도 40%에서 25%로 확 낮췄다.

그러나 이 같은 개혁조치들은 전통적인 사민당 지지층을 당으로부터 돌려세웠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추진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이에 실망한 지지자들이 '민주당이 아닌 대안'을 찾고 있는 국내 현실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현재 민주당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지적에 그는 무겁게 "그렇지"라고 답했다.

지난 8개월간 닦고 닦은 고민이 엿보였다. 손 고문은 독일 총선 현장에서 한국의 정치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와의 대화는 자정을 넘겨서까지 이어졌다. 이날 식당에선 베를린 IFA(가전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을 찾은 국내 기업 직원들과도 즉석 토론을 하기도 했다. 한국의 재벌·대기업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중간중간마다 수첩을 꺼내들고 메모를 하기도 했다. 손 고문의 한 지인에 따르면 그는 독일에서 총 7권의 노트를 가득 채웠고 한다.

"이석기 사태, 박근혜-새누리당 득 보는 것 같지만 오버하면 실수"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이 29일 귀국했다. 8개월 넘게 독일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왔다. 지난 6일 <오마이뉴스>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독일 사민당의 딜레마는 우리나라의 진보정치도 깊이 성찰해야할 타산지석"이라고 말했다.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이 29일 귀국했다. 8개월 넘게 독일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왔다. 지난 6일 <오마이뉴스>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독일 사민당의 딜레마는 우리나라의 진보정치도 깊이 성찰해야할 타산지석"이라고 말했다.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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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큰한 김치찌개와 간단한 맥주로 식사가 이어지면서, 국내 정치 현안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 역시 베를린서 국내 상황에 대해선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했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사태와 재보궐 선거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해선 에둘러 답하거나 답변을 피했다.

그는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기소된 이 의원에 대해선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이번 일로 득을 보는 것 같지만 오버하면 실수하게 된다"고 말했다. 대신 구체적인 평가는 유보했다.

지난 대선 이후 자신과 연대설이 꾸준히 제기됐던 안철수 무소속 의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그는 지난 8월 형수상(喪)으로 국내에 일시 귀국했었다. 이어 다시 출국하면서 "우리 사회와 정치가 분열로 치닫고 있다, 함께 살아가야 한다, 통합의 정신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손 고문이 독자세력화 방침을 기정사실화한 안 의원에 대해 선을 그었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는 "당시 공항에서 한 말은 그저 인사말이었다"면서 "통합이야 항상 내가 하는 얘기"라고 손사래를 쳤다. 당장 귀국하더라도 곧바로 현실 정치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의사가 느껴졌다. 손 고문은 지난 7월 지인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도 "많은 사람이 빨리 들어오라고 성화를 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이야말로 지금 제게 맞는 말 같다"면서 현실 정치 참여 가능성에 대해 선을 그은 바 있다.

오히려 국내 정치에 대한 손 고문의 생각은 독일 총선 경험담 속에서 생생히 묻어났다. 그는 총선 기간 유세장을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독일의 민심을 체감했다. 특히 그가 느낀 '사민당의 딜레마'는 곧 '민주당의 딜레마'이기도 했다.

"현실정치 참여하라고? 독일 사민당을 타산지석으로"

그는 "사민당 지지층들의 이탈로 좌파당의 지지율이 8%대로 성장했다, 홀로 집권하기 어려운 좌파당이 사민당이나 녹색당에 함께 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그러나 사민당 입장에서 쉽게 응할 수가 없다, 좌파당과 연정할 경우 당내의 중도적 지지층마저 이탈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진보정당과 '안철수신당'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민주당의 상황과 딱 맞는 얘기였다.

무엇보다 그는 "이번 총선에서 사민당이 기민당에 패배하더라도 양당의 정책과 이념 차이 때문이 아니면 양당의 총리 후보에 대한 지지도 차이 때문일 것"이라며 메르켈 총리의 '통합적 리더십'을 높게 평가했다. "지난 대선 당시 우리 상황과 비슷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당시 야권의 정책 이슈인 경제민주화·복지 이슈를 선점하면서 대선 승리의 발판을 닦았다는 얘기다.

"독일에는 '메르켈 이스트 알레스(Merkel isst Alles)'라는 말이 있어요. '메르켈은 무엇이든 다 먹는다'는 뜻이지. 메르켈 총리가 야당의 이슈나 정책을 다 흡수하다보니 사민당이나 야당이 내놓을 이슈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이 딜레마죠. 심지어 녹색당 지지자들 중 60%가 자신들의 탈핵정책을 수용한 메르켈 총리의 3선을 원하고 있어요."

손 고문은 지난 9일 지인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서도 "다양성과 통합의 기초 위에 민주주의의 기본을 튼튼하게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당면한 최대 과제임을 절실히 느낀다"며 통합을 강조했다. 또 "메르켈의 통합 정치에 이슈를 빼앗긴 사민당의 딜레마는 우리나라의 진보정치도 깊이 성찰해야 할 타산지석"이라고 덧붙였다.

"'개찰구' 없는 독일 기차역, 진정한 똘레랑스는 여기 있다"

독일 베를린 지하철 역 구내. 우리나라 등 대부분 나라에서 볼수있는 개찰구 자체가 없다. 대신 구입한 열차표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열차 탄 시간을 체크하도록 돼 있다.
 독일 베를린 지하철 역 구내. 우리나라 등 대부분 나라에서 볼수있는 개찰구 자체가 없다. 대신 구입한 열차표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열차 탄 시간을 체크하도록 돼 있다.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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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야기는 다시 독일 사회로 돌아갔다. 손 고문은 '80유로짜리 정액권' 한 장을 놓고 8개월 전 출국 당시 밝혔던 '한국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 기차역에 개찰구도 없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열차표를 검사하는 검표원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손 고문은 "8개월 넘게 이곳에 있으면서 한 번도 표 검사를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공짜로 열차를 타고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고 했다. 그는 "무임승차 하는 사람들이 드문 이유는 '신뢰'가 바탕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그의 말이다.

"독일은 안정된 나라이지만 비정규직 등 우리와 같은 문제가 있는 나라예요. 그렇다고 개개인의 삶이 풍족한 것도 아니예요. 하지만 정해진 법이나 규정만 잘 지키면 국가가 나를 지켜준다는 신뢰가 있는 것 같아요."

누가 강제하지 않더라도 공동체를 위해 정해진 룰을 지키면 그에 대한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는 얘기였다. 손 고문은 "여기에 진정한 '똘레랑스(Tolerantia, 관용)'가 있다"고도 했다. 자신의 신념·이념·기호와 맞지 않는 타자를 '인정'한다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의 공존까지 생각하는 공동체 정신이야말로 진정한 '똘레랑스'라는 것이다.

"자 보세요. 이민자나 여건 안 되는 사람들은 무임승차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독일 철도회사도 그걸 모르지는 않겠지. 그런데 왜 개찰구를 만들지 않을까? 돈이 없어서? 누군가 그럴듯한 얘기를 하더군요. '사정이 딱한 사람은 그냥 타라'는 거다. 무임승차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사회 밖으로) 내모는 게 아니라 수용하는 것이죠. 엄격한 사회지만 (사회적 약자에게) 그 정도의 숨구멍을 틔워주는 것이죠."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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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손학규, #독일, #앙겔라 메르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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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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