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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내교통공안(2005. 7. 21.)
 평양시내교통공안(2005. 7. 2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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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가지

"경험은 지혜의 어머니다"라는 말이 있다. 먼저 고향방문을 하고 돌아온 윤성오 목사는 준기 부부에게 북녘에서 지켜야 할 언행에 대해 자세하게 얘기해 줬다. 그는 북녘에 도착 후 불만사항이 생겨도 일단 스케줄에 따르면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자기 의사를 말하라고 주의를 단단히 주었다. 그의 말은 준기에게는 금과옥조였다. 만일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공항청사에서 준기는 불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자칫 평양까지 와서 가족 상봉 일을 그르칠지도 몰랐다.

준기는 윤 목사가 들려준 말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북녘 안내원의 처분만 기다렸다. 45년 만에 고향을 찾아오건만 어쨌든 현실적으로 준기 부부는 그들에게 손님이었다. 손님은 주인의 말에 따라야 하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실리를 얻는 처세일 것이다.

"갸네가 하자는 대로 느긋하게 기다리시라요."

준기는 다시 윤 목사의 말을 상기했다. 북녘 두 선생은 리동구가 해외동포위원회 선임이고, 홍남표는 그 차석인 모양이었다. 홍 선생이 준기 부부의 가방을 뺏어 공항 주차장 승용차 짐칸에 싣고는 핸들을 잡았다.

평양공항에서 평양 시내로 가는 길은 한산했다. 달리는 승용차 차창밖에는 준기가 어린 시절 눈에 익었던 붉은 흙, 소나무, 아카시아, 옥수수, 잔디. 오솔길, 콩밭, 벼가 익어가는 논들이 보였다. 승용차가 교통신호로 잠시 섰을 때는 어디선가 매미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큰길 옆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보도에는 걸어가는 평양시민들도 띄엄띄엄 보였다.

준기는 갓길에서 자전거 앞 짐칸에다 아이를 태우고 지나가는 이를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 아버지를 추억했다. 어릴 때 준기 아버지는 자주 자기를 그렇게 태워주곤 했다. 곧 학교 건물이 보였고, 그리고 산등성이 시골집 굴뚝에서는 밥을 짓는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준기는 소학교, 중학교 다닐 때 두어 차례 평양을 다녀 간 적이 있었고,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인민군 입대 후 전선으로 가는 길에도 평양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의 평양과는 전혀 딴 모습이었다. 지난날 평양의 수많던 기와집은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보던 평양의 숱한 기와집들은 어드러케 된 겁네까?"
"조국해방전쟁 때 미제 쌕쌕이들이 평양을 아주 불바다로 만들었디요. 기때 모조리 불타버렛디요. 위대한 우리 수령님께서는 폐허가 된 평양직할시를 오늘날 이처럼 다시 건설한 겁네다."

승용차 앞자리에 앉은 리 선생이 준기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궁금증을 시원하게 속사포처럼 풀어주었다.

부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에 따르면, 미 해군소장 스미스는 "밤낮 없이 폭격했다.…  그것은 아마도 한 도시에 이루어진 함포공격이나 공중폭격으로 역사상 최장시간일 것이다. …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다닐 수 없다.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말했다.

또 강준만은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에서 "미국은 1952년 11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전협상에서 북한을 압박하고자 대대적으로 북폭을 감행했다. 1952년 6월 23일 미군은 500대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해 압록강 수풍댐과 10개의 수력발전소를 폭파했다. 그해 7월 11일과 12일에는 미군 폭격기들은 평양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첫 공습에서 2천 명이 사망하고, 4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래도 공산측이 정전협정에 순순히 응하지 않자 미군은 '압력펌프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더욱 북폭을 강화했다.

1952년 8월에 미군은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78개 도시와 마을을 집중 폭격하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8월 29일 평양 폭격에서는 6천 명이 사망하였다. 그해 10월로 들어서자 폭격 목표물을 삼을 만한 도시와 산업시설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고 서술했다. 그래서 한국전쟁 정전 무렵 북한은 석기시대로 돌아간 듯하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이윽고 준기 부부를 태운 승용차가 평양 시내 중심가로 접어들자 아파트와 같은 우람한 건물은 보였지만 역시 거리는 한산했다. 곧 텔레비전에서 이따금 보았던 개선문, 천리마동상, 만수대의사당 등이 눈에 띄었다. 도로 옆 우람한 건물에는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 만세!' 등의 플래카드가 펼쳐 있었다. 승용차가 평양 시내를 가로지른 뒤 북녘 선생이 안내한 곳은 창평거리에 있는 고려호텔이었다.

"대외연락부 부위원장께서 두 분 숙소를 특벨히 이 호텔로 정해 주셨습네다."
"감사합네다. 부위원장께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해 주시라요."
"특별 배려에 고맙습니다."

준기 부부는 리 선생이 말에 깊이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한산한 평양거리(2005. 7. 21.)
 한산한 평양거리(2005. 7. 2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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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하디 마시라요

북녘 두 선생은 호텔 수속(체크인)을 도와준 뒤 열쇠를 건네주며 말했다.

"긴 려행으로 피로하실 텐데 저녁밥 시간까지는 푹 쉬시라요."
"기러겠습네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준기 부부가 묵을 객실은 고려호텔 20층으로 평양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평양은 사회주의 국가 수도답게 철저한 도시계획 아래 건설된 도시로, 건물 사이에는 드문드문 녹지도 있었지만 서구의 도시와 같은 현란함이나 다양성은 부족해 보였다. 북녘 선생들은 저녁 6시에 오겠다고 약속한 뒤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 준기는 잔뜩 쌓였던 긴장이 풀렸다. 순희도 안도의 긴 숨을 쉬었다.

준기 부부는 객실에 짐을 푼 뒤 땀으로 끈적한 몸을 씻고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6시 정각 초인종이 울렸다. 북녘 두 선생이었다. 준기 부부는 그 시간에 맞춰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대기하고 있었다. 객실 문을 열자 두 선생이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이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셨는데 조금도 긴장티 마시라요."
"알가시오."

준기는 대답은 하였지만 '긴장티 마시라'는 그 말에도 긴장이 갔다. 저녁은 두 선생의 안내로 고려호텔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저녁 밥상에는 여러 가지 음료와 술이 놓여 있었다. 평양소주, 백두산들쭉술, 룡성맥주, 탄산수, 흰 포도주 등이었다. 밥상 위의 차림표를 보니 오리향구이, 낙지깨장무침, 청포랭채, 숭어단즙튀기, 고기다짐구이...등 열가지가 넘었다. 준기 부부는 그 요리들을 하나하나 맛보면서 수첩에 메모를 했다.

"뭘 그렇게 적으시오?"
"우리가 미국에서 밥장사를 합네다. 기래서 조국에서 많이 배워가려고 해요."
"기렇다믄 많이 배워 가시라요."

밥상의 술병이 비워질수록 네 사람의 대화가 차츰 부드러워져 갔다. 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먹한 관계를 이어주는 촉매제였다.

"다시 한 번 김준기, 최순희 두 분 선생의 조국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네다."

몇 차례 건배가 오갔다.

훈련병들이 어깨총을 한 채 부산전화국 앞을 지나고 있다(부산, 1951. 1. 8.).
 훈련병들이 어깨총을 한 채 부산전화국 앞을 지나고 있다(부산, 1951. 1. 8.).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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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남새말이 지짐

평양 도착 이튿날이었다. 준기 부부는 지난 이틀 동안 미국 뉴욕에서 중국 베이징으로, 평양으로 이동하였다. 여독과 시차로 많이 피곤할 줄 알았으나 그래도 긴장한 탓인지 일찍 잠에서 깼다. 의외로 몸은 가뿐했다.

오랜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기쁨과 휴전선 너머 조국을 찾았다는 긴장감 등이 포함된 때문일 것이다. 순희는 준기보다 먼저 일어나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준기도 세면을 한 뒤 부부는 아침 산책을 겸하여 평양 거리 구경을 하려고 호텔을 빠져나오자 호텔문을 지키는 복무(종업)원이 멀리 가지 못하게 제지했다. 호텔 어귀에서 잠깐 거리 풍경을 살펴보았다.

고려호텔 앞의 모자(2005. 7. 21.)
 고려호텔 앞의 모자(2005. 7. 2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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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이라 대부분 학교로 가는 학생이거나 출근하는 직장인들이었다. 남녀학생들이 목에 스카프를 둘렀다. 한 젊은 여성이 어린이를 데리고 호텔 앞을 지나갔다. 준기는 그 여성에게 접근하여 물었다.

"지금 어디 가십네까?"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레(맡기려) 갑네다."
"무슨 일을 하십네까?"
"창광 옷 공장에서 일합네다."

준기 부부는 그들 모자와 헤어진 뒤 마침 아침 식사시간이라 호텔 2층 구내식당으로 갔다. 아침밥은 자유식으로 쌀밥 외에 녹두죽, 팥죽, 흰죽이 있었다. 반찬은 주로 나물들로 고사리, 도라지, 콩나물 따위에다 봄남새말이 지짐, 낙지튀기, 닭고기 튀김도 있었다.

준기는 녹두죽을, 순희는 팥죽을 공기에 담고 큰 쟁반에 반찬들을 빠짐없이 조금씩 담아와  하나하나 천천히 그 맛을 보았다. 순희는 봄남새말이 지짐을 들고서 감격하듯 말했다.

"반찬이름도 예쁘고 맛도 아주 깔끔하고 상큼해요."

자유행동은 삼가시라요

순희는 반찬을 하나하나 입에 넣을 때마다 그 맛에 감탄했다. 준기는 그 반찬들을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이번 평양 여비는 매끼 음식 맛보는 것으로 뽑을 것 같아요."
"기러게 말이야요. 멧(몇) 가지 반찬은 만드는 법을 아주 배워가서 우리 농문옥 일품요리 반찬으로 씁세다."

그들이 구내식당에서 일하는 복무원들에게 반찬 조리법을 물어 배우고 있는데 북녘 두 선생이 왔다.

"안녕히 주무셨습네까?"
"예, 선생들도 잘 주무셋는디요."
"기럼요. 조금 전 방으로 전화했더니 받지 않아 곧장 이쪽으로 왔습네다."
"바깥에 잠깐 산책 나왔다가 … 이곳으로 바로 왔습네다."
"앞으로 가급적 자유행동은 삼가시라요."
"네, 알가습네다."

준기는 순간 뜨끔했다. 서로 다른 체제의 이질감을 다시 느꼈다. 손님은 주인의 말을 따르는 게 원칙이요, 예의다. 준기는 군말을 하지 않고 꾹 참았다. 만일 서울이나 서방세계라면 준기 부부의 고향방문을 요란하게 보도하며 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녘 사회에서는 개인들의 사생활은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듯 차분했다.

북녘 두 선생도 거기서 준기 부부와 같이 아침밥을 들었다.

미 7사단 장병들이 국경지대인 압록강까지 진격하고 있다(1950. 11. 21.).
 미 7사단 장병들이 국경지대인 압록강까지 진격하고 있다(1950. 11. 21.).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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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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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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