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추석인 지난 19일, 오후 5시 반께 찾아간 노량진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서울이 텅텅 빈 추석날에도 저녁 시간이 되자 학원이나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수험생들이 헐렁한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세 곳만 열려 있는 컵밥 노점상 앞, 평소처럼 수험생들이 북적거렸다.

컵밥 먹는 사람들 

컵밥을 먹는 수험생들
 컵밥을 먹는 수험생들
ⓒ 박정훈

관련사진보기


이어폰을 끼고 홀로 컵밥을 먹고 있었던 공민준(20·가명)씨는 노량진 고시원에 사는 재수생이다. 집은 천안이지만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고, 눈치가 보여서 내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 추석이란 딱히 별다를 게 없는 날이었다. 오히려 추석에는 상당수의 식당이 문을 닫는 바람에, 수험생들은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불편하다고 털어놨다. 컵밥이 맛있었냐는 질문에 그는 "그냥 한 끼 때우는 거죠"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학원 자습실로 돌아갔다.

매경 테스트를 준비한다는 서경수(24·가명)씨도 컵밥을 급히 먹고 독서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추석이지만 부모님 따라 큰집으로 내려가는 대신, 노량진에 있는 독서실에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고 있었다. 추석인데 컵밥 먹는 게 서럽지는 않는지 묻자 "그런 기분은 안 느끼는데, 단지 맛있는 게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든다"며 "송편이 정말 먹고 싶다"고 말했다.

서서 또는 쪼그리고, 아니면 길바닥에 앉아서 10분 안에 컵밥을 먹어치운 이들은 다시 유유히 자신이 공부하는 곳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갈비·전·송편 등이 있는 푸짐한 명절 상차림은 그들과 먼 이야기였다.

24시간도 모자라... 추석에도 공부는 계속 된다

추석 당일에도 수업하는 학원, 영업하는 패스트푸드점
 추석 당일에도 수업하는 학원, 영업하는 패스트푸드점
ⓒ 박정훈

관련사진보기


추석에도 대부분의 학원은 자습실을 개방해놨다. 수험생들이 공부하러 오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무원 시험을 대비하는 한 학원은 '승진 교육학' 수업이 추석 당일에도 잡혀있었다. 교육행정 사무관 승진 시험이 10월 26일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추석에도 수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공무원 시험 대비 학원 옆에 있는 패스트 푸드점은 추석이라 오히려 장사가 잘 되는 모양새다.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다 보니 학원에서 공부하던 수험생들이 가장 가깝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 패스트 푸드점이기 때문이다.

햄버거를 저녁으로 먹고 다시 학원에 들어온 김영혜(26·가명)씨는 내년 9급 공무원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추석 음식 같은 것 별로 먹고 싶지 않다, 햄버거가 맛있다"며 "오히려 추석이 공부하기 더 좋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독서실도 평소보다는 늦은 시각에 열었으나 쉬지는 않았다. 한 독서실 앞에서 만난 임용고시생 김하선(25·가명)씨는 "가뜩이나 추석이라 약간 들뜬 분위기라서, 집에 있으면 더 공부가 안 된다"며 "그나마 독서실에 나와야 공부가 더 잘 된다"고 독서실에 오는 이유를 밝혔다.

"오늘 독서실이 낮 12시에 열었는데, 당연히 평소보다는 많지 않다. 하지만 나처럼 집이 서울이거나, 자취생인데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수험생들은 대부분 독서실을 찾는 것 같다. 지방직 7급 공무원 같은 경우에 3주밖에 안 남았는데 추석이라고 놀겠는가."

그는 점심으로는 간단하게 고구마 하나를 먹었다고 했다.

수험생들은 급하다. 7급 공무원은 10월 초, 수능과 해양 경찰은 11월 초, 교사 임용시험은 12월 초에 필기시험을 치른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그들에게 명절은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추석에도 노량진이 붐빌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터뷰 거부하는 수험생들... 왜?

노량진 풍경
 노량진 풍경
ⓒ 박정훈

관련사진보기


해가 지고 어둑해지니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겉으로만 보면 추석 노량진 풍경은 나름 활기찬 모양새. 하지만 다른 번화가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홀로 다니는 사람이 많았고, 시끄럽게 떠드는 무리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문을 닫는 대다수의 식당과는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카페가 문을 열었지만, 그곳에서도 수다 떠는 사람들보다는 홀로 공부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무엇보다 노량진 수험생들이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연이어 거부하는 게 조금 이상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뭔가를 물어보려고 하면, 그냥 무시하거나 "바빠요"라며 지나가기 일쑤였다. 또 "노량진에서 공부하느냐"고 물으면 "공부 안해요, 놀러왔어요"라는 대답을 듣곤 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여섯 번 정도 됐다. 노량진은 분위기가 묘했다. 인터뷰를 해주더라도 실명을 말해주거나 사진 촬영을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거부했다.

이를 두고 '전직' 편입준비생 박영준(27·가명)씨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성적을 빠른 시간에 올려야 하는데, 당연히 마음 먹은대로 되진 않는다"면서 "결국 공부하다가 지쳐서 자기 자신에게 주눅이 들고, 자연스레 낯선 사람에게 경계심이 들게 된다"고 설명했다. 사람들과 잘 안 만나게 되고, 자신만의 틀에 갇혀 있다 보니 인터뷰 같은 걸 선뜻 해줄 리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날 인터뷰에 응해줬던 임용고시생 김하선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노량진 사람들은 노량진 사람들끼리만 이야기하는 것 같다. 마음도 급하고, 공부 이외에는 다 귀찮게 느껴지는데, 이런저런 질문에 대답해주기 싫을 것이다. 그나마 대답해주는 사람들은 노량진에 '덜 찌든' 사람들일지도…."

추석 노량진의 수험생들은 독서실이나 학원 옥상에서 큰 보름달을 보며 다들 한 가지 공통 된 소원을 빌었을 지 모른다. '노량진 생활을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내년 추석은 이곳에서 보내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답답함과 불안한 마음으로 추석을 보내는 수험생들의 뒷모습이 유독 작아보였다.

덧붙이는 글 | 고함20 (http://goham20.com)에 중복 게재됐습니다



태그:#노량진, #수험생, #공무원, #추석, #고함20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