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며칠 전, 친한 선생님 한 분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문구가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석기'에 대한 짤막한 문구였습니다. "지금은 석기시대. 온통 석기다." 국정원 발 '석기주의보' 이후 대한민국은 '석기 공화국'이 된 듯합니다. 여길 봐도 '석기', 저길 봐도 '석기'입니다. 들려오는 말소리들도 모조리 '석기, 석기'뿐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한순간에 100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합니다. '이'씨 성을 가진 '석기'가 휩쓸고 있는 대한민국이 진짜 쓸쓸한 구석기 시대가 돼버릴 듯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을 휩쓸어 버린 '석기시대'

29일 오후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정원의 압수수색을 받고 있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에서 신체에 대한 압수수색을 마친 뒤 의원실을 나오고 있다.
▲ 신체 압수수색 받은 이석기 의원 29일 오후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정원의 압수수색을 받고 있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에서 신체에 대한 압수수색을 마친 뒤 의원실을 나오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관련사진보기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나라에는 친일파가 있습니다. 아마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많을 겁니다. 친미파는 어떨까요. 미국 대통령이 방문할 때마다 태극기과 성조기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하는 '어르신들'을 보십시오. 대한민국에서 친미파를 대적할 '파'는 없을 것입니다. 이웃나라 중국을 사랑하는 친중파도 갈수록 그 세력을 불려가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저 머나먼 아프리카의 잠비아에 특별한 애착을 가진 친잠파 또한 없으리란 법이 없습니다. 5000만 가까운 사람이 살아가는 땅이니 별의별 '친○파'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없는 파가 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없어야 하는 파가 있습니다. 친북파입니다. 친북파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일상 화법에 의하면 '종북(파)', '좌파'들과 유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20세기 화법에서 표준 어휘로 쓰였던 '빨갱이'도 이들과 한 낱말밭을 이룹니다. 친북파든 종북이든 빨갱이든 이들은 대한민국에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친북파는 대한민국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는 친일파와 친미파가 존재하고, 친독파와 친잠파가 있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사회주의 국가 중국과 친하게 지내는 친중파가 공공연히 활개를 치고 다니는 세상입니다. 이런 마당에 그 중국의 '혈맹'인 북한과 친하게 지내는 친북파가 있는 건 당연합니다. 더군다나 북한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지 않습니까. 심정적인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친일파보다 친북파가 더 자연스럽습니다. 솔직히 친일파보다 친북파가 더 대접을 받아야 하지 않을런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친북파가 유독 금시기됩니다. 친북파를 사갈시하는 이들에게 북한은 이른바 '악의 축'입니다. 그러니 북한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악의 전령사가 돼 버립니다. 그들은 박멸하고 척결해야 암적 존재들로 전락합니다. '친북'의 목적과 의도는 결코 고려되지 않습니다. 친북파가 악의 전령사가 되는 순간 이들 사이의 대화가 결코 합리적이거나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친북파는 '얼음'이 되고, 친북파를 호의를 갖고 바라보는 이들도 조용히 자신들의 눈길을 거둡니다.

대한민국을 난데없이 석기시대로 만들어버린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과 그 휘하(?)의 아르오(RO; Revolutionary Organization, 일명 '산악회') 조직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런저런 말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들이 이른바 친북파일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종 수사 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그들이 지난 5월 모임에서 이런저런 '살벌한' 말들을 내뱉었을 개연성도 전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살벌한' 말들은, 전쟁 나서 세상 엎어질 것 같으면 우리라도 준비하자는 식의 맥락 속에서는 일견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통합진보당이나 이석기 의원 등 이번 사건 관련자들의 태도도 이런 '사실'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합니다. 지금 통합진보당과 이석기 의원은 문제의 아르오 회합에 대해서 추가적인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한 언론은 이석기 의원을 '골방의 혁명가 혹은 돈키호테'로 묘사하기까지 합니다. 평범한 일반 시민들이 그런 '살벌한' 말들이 비슷하게라도 오고가긴 했었나 보다고 의심하는 게 당연합니다.

100일 전에 포착한 내란음모... 뒤늦은 국정원의 호들갑

대한민국특수임무유공자회 경남도지부는 3일 오전 경남 창원 중앙동 소재 통합진보당 경남도당 앞에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규탄 대회"를 열었다. 사진은 참가자들이 위협용으로 가져다 놓은 가스통.
▲ 통합진보당 규탄 보수단체 시위에 '가스통' 등장 대한민국특수임무유공자회 경남도지부는 3일 오전 경남 창원 중앙동 소재 통합진보당 경남도당 앞에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규탄 대회"를 열었다. 사진은 참가자들이 위협용으로 가져다 놓은 가스통.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요. 제가 보기에 그들은 결코 대한민국 국토의 일부를 점령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국가제도와 기관을 무력화할 어떤 능력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 계획을 세울 능력도 없을 뿐더러, 설령 계획을 세웠더라도 그것은 시대착오적이고 비현실적인 망상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현실성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만에 하나 그들이 내란죄상의 국토 참절과 국헌 문란을 결행할 실질적인 계획과 능력을 구비하고 있었다고 밝혀지면 법에 따라 처벌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호들갑을 떱니다. 그 호들갑 몇 번에 그들은 당장이라도 대한민국을 난장판으로 만들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집단이 돼버렸습니다. 국정원은 주도면밀하기까지 했습니다. 국정원은 그들의 결정적인 '범죄' 현장을 100여일 전에 포착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숨겨둘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내란음모가 그토록 확실했다면 선공을 취하는 게 옳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사실을 꽁꽁 숨겨 두었다가 자신들이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되자 뻥 터뜨렸습니다. 참으로 영악하고 교활합니다.

지금 집권당인 새누리당은 표정 관리하느라 바쁩니다. 그들은 진보 진영 전체, 심지어는 민주당과 이른바 민주정부라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고 있습니다. 미상불 진보의 씨를 말려죽일 기세로 덤비고 있습니다. 친북과 종북을 규탄하는 보수 우익들의 앙칼진 목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어느 진보규탄대회(?)에 등장한 가스통은 시대착오적인 이념의 노예가 되어 있는 그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의 친북파와 종북을 향한 그들의 노골적인 욕망을 말해줍니다.

그 욕심이 무엇이겠습니까. 친북파가 설레발치지 않는 대한민국, 친북파가 공안의 번득이는 눈초리에 스스로 움츠러드는 대한민국, 친북파에 우호적인 일반 시민들이 속으로 매사 '공안 조심'을 외치고 자기 검열을 하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의 욕망이 아닐런지요. 그 어떤 합리적인 의심이나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1984년'의 세상을 만들어 모두의 입을 닫도록 하는 게 그들의 꿈이 아니겠는지요.

'친북=불법', 이 분위기가 두렵습니다

저는 무섭습니다. 친북을 입에 담기 꺼려하고, 친북을 들먹이는 사람을 조심하게 되는 '이 석기시대'의 분위기가 두렵습니다. 친북은 불법적인 것일 뿐더러 불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대한민국의 광풍이 공포스럽습니다. 히틀러의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하기 전에도 그랬다고 합니다. 그들은 법을 만들어 독일 국민들이 유태인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유태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관계를 맺는 일을 꺼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침묵했습니다.

그러자 나치는 유태인을 넘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운동가와 카톨릭교도와 기독교인도 잡아갔습니다. 사람들은 가까운 이웃이 잡혀가는 모습도 지켜보았습니다. 그럴수록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더욱 더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그때 에밀 구스타프 프리드리히 마틴 니묄러(1892~1984)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내 이웃들이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뭔가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내 친구들이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내 가족들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해 이야기 해 줄 단 한 사람이…. - <나는 침묵했습니다> 중에서

지금 대한민국은 석기 시대입니다. 석기시대 대한민국은 이석기 의원과 아르오 조직원들을 엄청난 능력을 소유한 '혁명 영웅'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을 빌미로 시민들의 건강한 비판이나 합리적인 의심도 차단할 듯한 기세입니다. 거대한 빙하기, 동토의 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침묵은 그 빙하기를 예상보다 일찍 불러올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석기, #아르오, #유신 독재 시대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