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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
 고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
ⓒ 오마이뉴스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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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면 휴가 나올 생각에 군복도 깨끗하게 다려놓은 아이가 비관해서 자살을 했다고요? 그것도 M16으로 가슴을 두 번 쏘고,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머리에 또 쏘았다고요? 재판부가 말도 안 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법원에서 반드시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고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73)씨의 목소리는 많이 지쳐 있었지만 단호했다. 앞서 22일 서울고법 민사9부(부장판사 강민구)는 1980년대 대표적 군 의문사 사건 중 하나인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 항소심에서 허 일병의 사인은 자살이라고 판시했다.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은 허 일병의 소속 부대와 헌병대 등이 사건 현장을 은폐·조작했다고 보고 허 일병의 죽음을 타살로 판단했던 1심 재판부와 상반된 결과다.

허씨는 23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허원근 일병은 지난 1984년 4월 2일 오후 1시20분쯤 강원도 화천군 육군 7사단 GOP 철책근무지 전방소대 폐유류고 뒤에서 가슴에 2발, 머리에 1발의 총상을 입고 변사체로 발견됐다.

당시 7사단 헌병대는 허 일병이 처음에는 오른쪽 가슴, 두 번째는 왼쪽 가슴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으며 마지막에는 오른쪽 눈썹에 밀착해 사격, '두개골 파열로 인해 사망한 것'이라는 결론 내렸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부대 상관의 총에 맞고 죽었다는 타살 의혹을 계속 제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M16 소총으로 가슴에 2발, 머리에 1발을 쏘아 자살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망인(허 일병)과 신체조건이 비슷한 사람이 M16 소총의 발사 자세를 취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밝혔다. 또 "중대원들이 형사상 공소시효가 휠씬 넘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면서 "한 명을 제외한 모든 법의학자들이 3군데 총상 모두에 생활반응(살아 있을 때의 반응)이 있으므로 세발 모두 생존 시에 입은 총상이라고 봤다"며 자살 판단 이유를 설명했다.

"국가가 잘못했다는 사과 받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

하지만 허씨는 항소심 재판부가 자살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주로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국방부가 해온 주장을 재판부가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원근이가 자살했다는 현장 어디에서도 피와 피부조직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총을 쏘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오히려 내무반에서 핏자국을 보았다는 병사들의 주장이 있었는데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허씨는 또 항소심 진행 중 '자살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배상액을 1심 수준(9억2000만 원)으로 유지하자'는 국가 측 제안도 있었다고 폭로했다.

"재판 진행 중에 변호사가 '돈은 달라는 대로 줄 테니 자살로 하자'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보더군요. 한 마디로 거절했어요. 억울하게 떠난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30년을 싸워왔습니다. 돈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동안 허 일병의 사인을 둘러싸고 군 당국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방부 특별조사단은 '자살'과 '타살'의 엇갈린 결론들을 내려왔다. 사건 당시 7사단 헌병대는 '허 일병이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지만, 2002년 9월 제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술에 취한 상관이 우발적으로 총을 쏴 허 일병을 살해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2002년 11월 국방부 특별조사단은 '중대장의 가혹행위를 못 견딘 허 일병이 총탄 3발을 쏴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고, 2004년 6월 제 2기 의문사위는 '허 일병 사인은 타살'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허 일병의 유족이 지난 2007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내면서 허 일병 사건은 법정공방으로 이어졌다. 1심 재판부는 2010년 2월 허 일병이 타살된 것으로 판단하고 국가는 유족들에게 9억2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이와는 상반된 결론을 내렸다. 다만 법원은 허 일병의 사인은 자살이지만 당시 군 당국의 부실수사가 이 사건을 의문사로 만들었다며 유족에게 위자료 3억 원을 지급하도록 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지게 하는 게 국가가 할 일 아닌가요? 지난 30년을 오로지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 하나로 살아왔습니다. 아들이 죽고 없는데 돈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국가가 잘못했다는 그 한 마디,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잘못했다는 그 한 마디를 듣고 싶습니다."


태그:#허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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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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