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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견학교 기숙사에서 새로운 대야 집에 들어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슬기
 안내견학교 기숙사에서 새로운 대야 집에 들어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슬기
ⓒ 김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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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안내견 시민기자였던 김슬기의 파트너 김경식입니다. 사랑으로, 눈물로, 준비했던 이별, 차마 보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슬기와의 이별. 그 서럽고 가슴 아픈 이별 예식을 치르고, 요즘 저는 새로운 운명, 새로운 반려견인 풍요를 맞아 새로운 삶을 개척하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풍요와 전, 안내견학교에서 4일간 합숙 훈련을 한 뒤 제 삶의 터전에서 2주간의 기초 적응 훈련을 마치고 현재는 직장에 정상적으로 출퇴근하며, 서서히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풍요와 함께 했던 적응 훈련기를 여러분께 공개할까합니다. - 기자 말

2013년 7월 23일 화요일, 날씨 : 비

호암미술관 앞 잔디밭에 앉은 슬기의 얼굴과 소나무와 산 그리고 하늘
 호암미술관 앞 잔디밭에 앉은 슬기의 얼굴과 소나무와 산 그리고 하늘
ⓒ 김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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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빗줄기는 이른 새벽부터 대지의 아픈 가슴을 더욱 잔인하게 두드리며 통곡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난 지난밤을 꼬박 새우며 줄곧 슬기와의 이별을 생각했다. 2005년 6월 26일, 그날도 빗줄기는 저렇듯 세상의 온갖 얼룩을 씻어내릴 듯 쏟아지고 있었지. 안내견이란 낯선 존재와의 만남을 위해 집을 나서던 내 발길은 막연한 두려움과 설렘으로 종잡을 수 없게 갈팡질팡했다.

터질 듯한 가슴을 겨우 누르며 슬기란 한 아이를 만났다. 한 달여 전 처음 본 후 이제 두 번째 만남이건만, 어찌된 건지 슬기는 내게 달려들어 친근함을 표했다. 나는 그때 바로 직감했었다. 우리의 만남은 태초부터 신이 예비하신 운명이라고.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9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슬기 없는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필리핀에서 3년간 살 때도, 가깝고 먼 곳으로 가족 여행을 갈 때도, 내 옆엔 항상 슬기가 동행했다. 그런 슬기를 나는 이제 떠나보내야 한다. 목이 메이고, 눈 앞이 캄캄하게 흐려지지만, 그래도 난 그녀를 보내야만 한다.

간밤의 불면으로 머리는 지끈거리고, 온몸은 천근만근이라 발길을 옮기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나서야하기에, 아내와 함께 조심조심 슬기를 차에 태워 안내견학교로 향했다. 9년여 전, 슬기를 만날 때 묵었던 기숙사로 가 며칠 묵을 짐을 푼다. 그리고 슬기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슬기는 그렇게 떠나갔다. 슬기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매정하게, 그렇게 사막의 신기루처럼 과거가 돼 떠나갔다.

앉아 있는 풍요
 앉아 있는 풍요
ⓒ 김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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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와 나란히 앉아 풍요를 안고 찍은 셀카
 풍요와 나란히 앉아 풍요를 안고 찍은 셀카
ⓒ 김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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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 우두커니 홀로 서 회한의 눈물을 삭일 즈음, 새로운 운명인 풍요가 조용히 내게로 다가왔다. 풍요는 반갑다며 내 손과 얼굴, 온몸 곳곳에 격정의 키스를 선사한다. 슬기와 비슷한 체구와 비슷한 용모에 착한 마음씨마저 비슷한 풍요.

이제 나는 슬기의 앞날을 위해, 그리고 풍요라는 또 다른 아이의 행복을 책임진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슬기란 이름을 입밖으로 소리내어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내 진실한 사랑 슬기의 행복을 위해... 새로운 운명으로 다가든 풍요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풍요를 내 앞으로 끌어당겨 안아본다. 쭈뼛대며 망설이는 녀석을 더욱 힘주어 끌어 안아 사랑을 다짐해본다. 풍요를 뒤따라 들어오신 선생님이 풍요의 프로필을 알려준다.

"풍요는 2010년 10월 7일 생 암컷이고요, 체중은 24kg 입니다. 식사는 하루 두 번, 120g씩 하고요. 배변이나 안내하는데, 별다른 특이점은 없습니다. 다만 엉덩이나, 꼬리 등의 감각이 예민해 만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요. 그리고 다른 개들에게도 쉽게 동화되지 않아, 쫓아가지 않고 성격도 차분합니다. 지시 사항에 충실히 잘 복종하는 한 마디로 안내견으로서 참 좋은 품성과 소양을 지닌 아이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한 쌍의 파트너로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선생님은 슬기와도 여러가지 면에서 모범적인 삶을 사셨으니, 풍요와도 완벽한 궁합으로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시리라 확신합니다."

첫날, 풍요와 나는 그렇게 서로를 익히며, 대화하고 교감하는 데 많을 시간을 쏟았다.

"풍요야 사랑해..."
"저도 열심히 노력해볼게요. 아직은 뭐가 뭔지 모르지만, 당신이 내민 이 다정한 손길에 착실히 부응하도록 준비하고 또 노력할게요. 사랑해요 아빠."

애버랜드 구내 식당 앞 잔디 언덕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하는 풍요와 주변의 소나무들
 애버랜드 구내 식당 앞 잔디 언덕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하는 풍요와 주변의 소나무들
ⓒ 김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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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홈피 www.noulpoet.kr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태그:#김슬기, #풍요, #시민기자, #안내견, #대체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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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시인으로 10년째 한국문인협회 회원과 '해바라기'동인으로 활동하고있으며 역시 시각장애인 아마추어 사진가로 열심히 살아가고있습니다. 슬하에 남매를 두고 아내와 더불어 지천명 이후의 삶을 훌륭히 개척해나가고자 부단히 노력하고있습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탈시설만이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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