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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큰일 났습니다. 러시아 항공 사고 발생률이 높다고 합니다. 착륙하면 사람들이 살았다는 의미로 박수를 친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우리 신혼여행에서 불귀의 객이 되면 어떡합니까."

쌤은 걱정이 많다. 그러나 항공 사고에 있어서 만큼은 대인배다.

"어쩌겠습니까. 항공 사고로 죽을 운명이면 비행기 안 타도 교통사고로 죽을 겁니다. 사실, 교통사고 사망률이 훨씬 높지 않습니까."

쿨하다. 그냥 간다. 그런데 알고보면, 러시아 항공, 사실 좀 억울하다. 사고는 국내선에서 많이 발생한다. 러시아에 난립한 130개의 군소 항공사에서 발생하는 사고가 많은 거지, 국외로 운항하는 대형 항공사의 안전등급은 일본항공이나 아메리칸 항공보다도 높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오해하고, 도착하면 살았다고 박수를 치니.

그런데 박수치는 관습을 한국 사람들은 모른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모스크바에 도착할 땐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승객 90%가 한국사람이었다. 모스크바를 경유해 유럽으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1주일 뒤 모스크바에서 이스탄불로 갈 땐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스탄불 아타투르크 공항에 도착했을 땐 박수가 쏟아졌다. 마치 한 편의 공연이 끝난 것처럼.

다시 돌아갈 땐 어땠을까. 똑같았다. 이스탄불에서 모스크바로 갈 땐, 박수가 쏟아졌고,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땐 박수가 없었다. 아, 몇 명 되지 않은 사람이 치긴 했다. 그리고 난 한 아저씨의 중얼거림도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박수를 왜 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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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 오고 싶었지만 아는 게 별로 없다.

"남편, 모스크바에서 가장 보고 싶은 게 어딥니까?"
"하나만 보면 됩니다. 아이스크림 콘 세트처럼 보이는 건물. 그게 뭐죠? 크렘린인가요?"
"성 바실리 성당입니다."
"지금 보러 가죠!"

숙소에서 트베르스카야를 따라 걸어 갔다. 주말도 아닌데 붉은 광장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일까? 승전기념일 행사를 준비하느라 그랬다. 광장 바깥에서 성 바실리 성당을 봐야 했다. 주말에야 광장을 연다고 했다.

그때면 뻬쩨르부르그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날이 더워 차나 한 잔 할 요량으로 백화점 같은 건물에 들어갔다. 엄청난 파사드의 건물이었다. 깊이가 250m. 이런 건물이 세 동이다. 3층의 각 층을 오버브릿지로 연결하고, 아치형 지붕으로 덮었다. 긴 아케이드다. 이름이 특이하다. 굼(GUM). 러시아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다.

유독 눈에 띄는 매장 하나. 라이카Leica. 코카콜라 뚜껑처럼 생긴 로고가 눈에 들어온다.

"남편 라이카 매장 보고 싶습니까?"
"아. 아닙니다."

라고 말은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매장으로 향한다. 한국에서도 가본 적 없는 매장이다. '찰나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평생 사용한 카메라, 라이카. 그와 얽힌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미국 케이프코드에 있는 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옆에 젊은이 몇 명이 있었다.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있던 그가 자리를 벗어나자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말했다.

"저 사람 좀 봐! 자기가 카르티에 브레송인 줄 아나 봐!"

카르티에 브레송은 그냥 웃고 말았다고 한다. 대인배다. 살 (돈은) 생각은 없지만 둘러본다. 매장 앞에 걸린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오드리 헵번.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배경은 바로 이곳 굼.

"부인 여기 오드리 햅번이 왔었나 봅니다."
"그러게요. 여기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네요."
"무슨 영화에 나왔을까요? <전쟁과 평화>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긴 했습니다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전쟁과 평화.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이다. 2001년, 이거 읽느라 죽는 줄 알았다. 책 다 읽고 영화나 보자 싶어 오드리 헵번이 나탈리아로 나오는 영화를 봤다. 보다 잤다. 어떻게 해도 지루한 건 지루한 거다. 그래도 안드레이와 나타샤(나탈리아의 애칭),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을 만났으니 그걸로 됐다. 나타샤, 내가 좋아하는 시인 백석의 시에도 나온다. 그 나타샤가 이 나타샤는 아니지만, 상관없다. 나는 나대로 읽는다.

<나와 나타샤와 힌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홀로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힌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는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 당나귀는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마가리는 오두막집이라는 뜻
* 이 시는  1938년 3월 잡지 "여성(3권 3호)"에 실린 시다. 나타샤는 1000억대의 요정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헌사해 길상사라는 절을 만든 기생 '자야'를 일컫는 것이다. (위키트리)

구름다리와 아치형 지붕으로 연결되어 있다.
▲ 모스크바 굼(GUM) 백화점 구름다리와 아치형 지붕으로 연결되어 있다.
ⓒ 윤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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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마다 자전거가 한대씩 놓여 있다.
▲ 굼 내부 가게마다 자전거가 한대씩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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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도 빨강색이다.
▲ 라이카 매장 자전거도 빨강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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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에 식당 테이블이 놓여있다.
▲ 구름다리 다리에 식당 테이블이 놓여있다.
ⓒ 윤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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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러시아, #모스크바, #여행기, #굼,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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