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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작가의 '너와 내가 아는 길'.
 김정훈 작가의 '너와 내가 아는 길'.
ⓒ 김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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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들은 안다. '재개발'이 주는 헛헛함이 어떤 종류인지. 도시 개발이란 미명하에 당하는 강제 이주가 그저 시간이나 공간의 물리적 변화라는 낭만성에만 결코 기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적게는 수 년, 많게는 수 십 년을 보냈던 일상의 공간이 송두리째 거대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되는 변이의 과정이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이른바 '딱지'를 둘러싼 지역민들 간의 미묘한 입장 차부터 조합장과 건설사간의 비리와 조합원끼리의 세 싸움, 그리고 공사 기간을 버틸 수 없어 철새처럼 떠나야 하는 세입자들의 비애까지. 굳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않아도 생존 혹은 생활을 둘러싼 갈등과 현실의 냉정함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돌아가는 곳이 바로 우리시대의 '재개발' 지역이다.

노무현 정권 시기에 뉴타운으로 지정돼 이명박 정부에서 철거가 시작됐던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는 공간이다. 지난 3월, 뉴타운 선정 당시 권세를 누렸던 전 서대문구청장이 시공사 임직원들로부터 억대 금품을 수뢰한 혐의로 추가 기소됐다. 반면 2011년 철거 당시, 사람이 있던 상가건물 철거를 강행해 '제2의 용산'이란 위기까지 몰렸던 곳도 바로 이 북아현동 지역이다.

8일부터 16일까지 서울 북아현동 복합예술공간 아트스페이스에서 '아현동 ooo, 틈을 메우다 展'이 열린다
 8일부터 16일까지 서울 북아현동 복합예술공간 아트스페이스에서 '아현동 ooo, 틈을 메우다 展'이 열린다
ⓒ 박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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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북아현동의 저개발, 아니 재개발의 기억을 미술을 통해 끄집어 올리려는 전시가 바로 그 2호선 아현역 부근에서 한창 진행 중이다. 지난 8일 복합예술공간 아트스페이스에서 문을 연 '아현동 ooo, 틈을 메우다 展'은 이 북아현동 재개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예술과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 장으로 '소환'하고 '재생'시켜 보려는 유의미한 시도다.

재개발을 둘러싼 '보이는 것과 존재하는 것'의 의미

그리 넓지 않은 3층의 아트스페이스에 들어서자, 80년대 서울이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큼지막한 사진 작품 한 장이 관람객의 눈길을 잡아끈다. '아, 재개발…'이라고 지나치려는 찰나, 작품에 한발 다가서자 그저 재개발 직전의 아현동을 넓은 앵글로 잡은 것이 아님을 감지할 수 있다. 

장원영 작가의 '보이는 것과 존재하는 것 No.5'
 장원영 작가의 '보이는 것과 존재하는 것 No.5'
ⓒ 장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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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판화의 특성을 살린 입체적 느낌의 사진을 주로 작업해 왔던 장원영 작가는 수 백 장의 사진을 조합해 아현동의 풍경을 독창적으로 재구성했다. 'pigment print on acrylic layers'란 작품 설명이 눈에 띄는 '보이는 것과 존재하는 것 No.5'도 같은 형식의 작품이다. 층층이 결을 달리한 아크릴에 인쇄잉크 등에 쓰이는 안료를 사진 제판에 응용한 피그먼트 프린트 기법은 거대한 도시 속 공간 속 인간성을 포착하는데 적절해 보인다.

이렇게 미시적인 느낌 속에 하나의 거시적인 통찰을 전하는 장원영 작가의 꾸준한 시도는 이제는 사라져 버린 북아현동 일대의 한 순간과 만나 또 다른 울림을 만들어 냈다. 이 작품은 넓게 퍼진 파노라마와 그 안에 켜켜이 싸인 사람들의 일상을 전경화 했다. 이 작품은 작가만의 비범한 형식과 시각을 통해 누구에게는 투쟁의 공간이요, 누군가에게는 투기의 공간으로만 부각됐던 재개발의 기억을 찬찬히 되새겨 보게 하는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현대미술로 돌아보는 색다른 재개발의 기억

'아현동 000, 틈을 메우다展'의 특징은 재개발을 바라보는 여러 작가의 다양한 관점과 장르의 작품을 비교적 적은 작품 수로 알차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먼저 "마포구 도화동과 공덕동, 아현동을 거쳐 현재는 종로구에 살고 있다"는 김대장 작가의 '너와 내가 아는 곳'과 '너와 내가 아는 길'은 요즘은 스마트폰 지도로 더 친숙할 아현동 일대의 지도를 통해 익숙한 공간을 다른 시각으로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황량한 물체로 재개발의 헛헛함을 잡아낸 여주경 작가의 회화작품이나 이주민들이 떠난 아현동의 적막한 풍경을 '가라앉은 도시'로 상정하고, 수 백 개의 계란판 안에 갇힌 달걀 속 무표정한 사람들의 얼굴로 상징화한 '가라앉은 도시'도 마찬가지다.

'아현동 ooo, 틈을 메우다 展'에 참가한 조현욱 작가의 작품
 '아현동 ooo, 틈을 메우다 展'에 참가한 조현욱 작가의 작품
ⓒ 조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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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조현욱 작가는 재개발되기 전 만난 지역민들의 편지나 사진, 일상용품들을 오브제로 사용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더해 '아현족'이란 상상 속 원주민의 가상 문명을 서사적으로 창조한 작업으로 흥미를 자아낸다.

웁쓰양의 '폐허의 콜렉션 퍼포먼스'
 웁쓰양의 '폐허의 콜렉션 퍼포먼스'
ⓒ 웁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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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북아현동 재개발지구 1-1 구역에서 인터넷으로 모은 27명의 지원자가 물총과 물감 폭탄을 발사하며 벌인 유쾌한 가상 전쟁을 통해 재개발 지역의 폐허가 된 환경을 상징적으로 퍼포먼스화한 웁쓰양의 작업 또한 현대미술의 재기발랄함으로 돌아본 재개발의 색다른 기록이다.

"떠나보내기엔 아현동은 아직 많은 것들이 숨쉬고 있다"

'아현동 ooo, 틈을 메우다 展'의 박호균 기획자는 "이번 전시는 재개발로 사라져 버린 북아현동의 추억과 상처, 아픔을 같이 어루만지려는 시도"라며 "틈은 사라져 버린 추억의 틈이자, 상처와 아픔의 틈이며, 사라져 버린 삶의 터전으로서의 공간의 틈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전시의 전체 의도를 설명했다. 

이지수 작가의 '아현동, Sweet memories'
 이지수 작가의 '아현동, Sweet memories'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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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6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는 관객과 함께 하는 전시 연계 체험프로젝트를 통해 '공간'과 '소통'이란 주제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2호선 아현역 내 전시 공간에서는 이지수 작가와 SKIP(민경환/배승조/안동수/최고운) 팀의 작품들을 전시해 아현동 주민과의 거리를 좁혀간다. 15일(토)에는 시민, 지역 주민을 위한 전시감상 특강인 '예술 마을, 세상을 바꾸다'와 'Sweet Dream, 이지수 작가와 함께하는 설탕드로잉' 등의 참여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재개발, 재건축들은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장소의 의미를 순식간에 바꿔버리거나 송두리째 지워버린다(중략). 우리는 예전의 아현동을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멈춰버린 아현동을 이대로 떠나보내기엔 아직 많은 것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흔적' 시리즈를 공동작업한 'SKIP' 팀의 작가의도 중에서)

되돌릴 수 없는 시공간을 재조명하며 예술과 현실의 '틈'을 메워나가려는 '아현동 ooo, 틈을 메우다 展'은 분명 흔치 않은 공공프로젝트다. 더욱이 예술과 관객과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요즘, 예술을 통해 현실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가치 있는 시도이기도 하다. 부디, 아현동을 넘어, 재개발을 넘어, 우리의 일상과 현실에 예술을 접목시키는 이러한 프로젝트들이 부디 널리널리 씨앗처럼 퍼져나가기를.

'아현동 ooo, 틈을 메우다 展' 오프닝에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 중인 작가 '웁쓰양'
 '아현동 ooo, 틈을 메우다 展' 오프닝에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 중인 작가 '웁쓰양'
ⓒ 박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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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아현동 틈을 메우다, #아현동, #재개발, #북아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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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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