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금은 사라진 고향마을 집 앞 텃밭에서 풀을 뽑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는 어머니가 곁을 떠나신 이후 갑자기 병을 얻었지만 용감히 극복하고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셨다.
▲ 집앞 텃밭을 매고 있는 아버지 지금은 사라진 고향마을 집 앞 텃밭에서 풀을 뽑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는 어머니가 곁을 떠나신 이후 갑자기 병을 얻었지만 용감히 극복하고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셨다.
ⓒ 김동이

관련사진보기


"동이야! 저녁 먹게 아부지 찾아봐. 저 아래 주막부터 들러보고."

어릴 적 우리 3남매의 하루 일과는 저녁식사 전 회사에서 퇴근하는 아버지를 찾아 집에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저녁준비를 마친 어머니께서 밖이 어둑해질 때까지 친구들과 놀기에 바쁜 우리들을 집 앞 마당에서 부르면 다 들릴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지만 아버지를 찾아오기에는 숨바꼭질보다도 어려웠다.

하루는 중노당(경로당보다 젊은 어른들이 만든 쉼터)에서 친구분들과 초저녁부터 술잔을 기울이는 경우도 있었고, 하루는 친구분 집에서, 또 하루는 회사에서 퇴근하는 길에 논둑이나 밭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동네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이렇다보니 꼬마였던 우리들에게 아버지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일주일이면 서너번 정도 집에서 고작 100여미터 떨어져있는 마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연쇄점(작은 시골가게)에 앉아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경우가 많아 위안으로 삼기도 했다.

아버지는 술을 즐겨하셨다. 거의 매일같이. 어릴 적에는 늦게까지 술을 드시고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잠을 자고 있는 우리 3남매들을 깨워 잔소리 하는 게 너무나 싫었다.

어찌보면 아침에 일찍 출근해 저녁 늦게 퇴근하는 통에 우리 3남매들을 볼 겨를이 없어 애정표현으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술주정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마을의 새마을지도자까지 맡으면서 마을의 대소사까지 챙기다보니 아버지의 술은 줄어들 겨를이 없었다. 이렇다보니 어머니와 우리 3남매는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게 또 다른 일상이 되어버렸다.

술을 즐겨하셨다는 점 외에 우리 3남매에게 아버지는 소위 '배운사람'으로 우리 마을이나 인근 마을에서는 꽤나 명성이 높아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특히, 한문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마을에 대소사가 생겨 마을방송 스피커를 타고 마을주민들에게 알려지면 흰 편지봉투를 들고 우리집으로 찾아오는 마을분들의 발걸음이 꽤나 이어졌다.

붓펜을 든 아버지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과거 명필들과 버금갈 정도의 한자가 흰 종이에 그려졌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옆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는 나에게는 이런 아버지가 존경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자는 꼭 배워야 되는겨. 자기 이름이라도 쓸 수 있어야 하고, 신문도 읽으려면 한자는 알아야 되는겨. 또, 한자를 알면 이해도 빨리 할 수 있고."

이런 아버지의 훈계 덕택에 나 또한 한문에 일찍 눈을 뜨게 됐다. 중고등학교 때 한자시험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지금은 한자 2급 자격증도 땄다.

존경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가족들에게 걱정도 안겨준 아버지. 그리고, 자식들에게는 엄하면서도 누구보다 아껴주고 사랑해주셨던 아버지. 이것이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단면이다.

강하게만 보였던 아버지,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선 망연자실

아버지의 환갑을 맞아 충북 단양 여행지에서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 이것이 단 한 명의 열외도 없이 다같이 떠난 우리가족의 첫 여행이었다.
 아버지의 환갑을 맞아 충북 단양 여행지에서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 이것이 단 한 명의 열외도 없이 다같이 떠난 우리가족의 첫 여행이었다.
ⓒ 김동이

관련사진보기


우리가족 첫 여행지였던 충주댐에서의 한 컷.
 우리가족 첫 여행지였던 충주댐에서의 한 컷.
ⓒ 깅동이

관련사진보기


술도 즐겨하시고 항상 우리 3남매 앞에서는 항상 강해 보였던 아버지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인 2002년 11월 우리 3남매를 부등켜안고 굵은 눈물을 보이셨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사망. 아버지 뿐만 아니라 우리 3남매에게도 어머니의 사망은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부검관계로 검사 수사지휘가 늦어지는 바람에 4일간의 장례를 치른 우리가족들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몸과 마음이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큰 충격으로 병을 얻게 됐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병원에 갔더니 녹내장이란다. 시력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자신 있어 하시던 아버지였다. 다행히 조기에 치료해 병이 확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또 다시 큰 병이 찾아왔다. 이번엔 협심증이란다. 혈관이 막혀 수술을 받아야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병원에서는 심장과 연관된 수술인만큼 가족들의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군대에 발이 묶여있던 나 대신 막내동생이 병원으로 가서 동의서에 서명했다. 심장 수술인만큼 너무나 걱정됐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몇 시간 뒤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수술 잘 됐고,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지금도 병원을 오가며 통원치료를 받고 있지만 아버지는 건강을 되찾으셨다. 요즘은 술도 마시지 않는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 오히려 건강했을 때 술을 자주 드셨던 모습이 생각나 안쓰러울 때도 있다.

10년 세월 혼자 사신 아버지, 운전면허에 생계조합 이사직까지 '제2의 인생'

행정중심복합도시 편입구역에 포함된 우리마을 주민들이 보상가 현실화를 요구하며 감정평가서 공개를 외칠 당시 집회에 참여한 아버지의 모습.
 행정중심복합도시 편입구역에 포함된 우리마을 주민들이 보상가 현실화를 요구하며 감정평가서 공개를 외칠 당시 집회에 참여한 아버지의 모습.
ⓒ 김동이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어머니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 이후 아버지는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을 혼자 살아 오셨다. 흔히 하는 말로 전기코드밖에 꽂지 못했던 아버지가 어머니가 곁을 떠나신 후 어떻게 사실까 걱정도 많았지만 아버지는 마음을 추스른 뒤 제2의 인생을 위한 도전을 시작했다.

평생 휴대폰을 써보지 않았지만 자주 연락드리기 위해 자식들이 마련해 준 휴대폰 기능을 익히기 위해 설명서를 열심히 공부를 시작했고, 환갑이 가까워오는 나이에 운전면허 시험에도 도전했다.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학원에도 등록했고, 한번 낙방하고 두 번 만에 운전면허증도 취득했다. 젊은이들도 두 번 만에 면허증을 따기 어려운데 정말 대단한 열의였다.

운전면허를 취득한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그 이후로 활동반경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행정중심복합도시가 행정수도 위헌 논란이 있을 때와 현실적이지 못한 보상가의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머리띠를 두르셨다. 이후에는 세종시 이주민들을 위한 생계조합에 이사로 들어가 지금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다.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다.

최근에는 산악회까지 가입해 등산도 다니는 등 아버지는 그야말로 활기찬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신다.

아버지 환갑 맞아 처음으로 다같이 떠난 가족여행

난 고등학교때부터 군 전역하기까지 15년간, 그리고 지금까지 20여 년간을 부모님 곁을 떠나 혼자서 타지 생활을 하고 있다. 동생들도 마찬가지로 고등학교를 대전으로 유학 나와 학업을 마쳤고, 지금은 가정을 꾸려 생활전선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렇다보니 우리 가족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가족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드디어 우리 가족은 단 한 명의 열외도 없이 모두 모여 충북 단양으로 첫 가족여행을 떠났다. 아버지의 환갑을 맞아서 자식들이 마련한 이벤트였다.

단양에 펜션을 예약하고, 그날 저녁 바비큐 구이를 해 먹으며 오랜만에 마음을 나누며 속 이야기를 나눴다.

"니들이 너무 잘 준비해줘서 아부지가 너무 기분 좋다. 종종 이렇게 다같이 모여서 여행을 다니자."

너무나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동안 소홀했던 '우리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날의 가족여행 이후 자주 여행을 다니자는 그날의 약속은 실행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가족은 꼭 1년에 한 번씩은 자리를 함께한다.

바로 어머니의 기일. 즐거운 자리는 아니지만 우리 가족은 이날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며 또 다시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 물론 실행은 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리고 또 한 가지. 10년 동안 홀로 살아오신 아버지 걱정에 묻는다.

"아부지! 혼자 사실 거는 아니쥬?"
"니 엄마를 어떻게 잊겠니. 아직 생각없다."


이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난 항상 불효자가 된다. 아직까지 장가도 못가고 불효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다짐해본다.

"아버지! 지금처럼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아요. 저도 얼른 짝을 만나서 잘 모실게요. 그리고 건강하세요."

덧붙이는 글 | ‘나의 아버지’ 응모글입니다.



태그:#아버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