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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 아버지와 형(오른쪽) 그리고, 나
 피난민 아버지와 형(오른쪽) 그리고, 나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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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왜 이러지?"

갑자기 양칫물이 입가로 샜고, 눈은 감기지 않았다. 비눗물이 눈이 들어갔는지 쓰라렸다. 당황해서 아내를 불렀다. 아침을 준비하던 아내는 내 얼굴을 보더니 "입이 왜 그래? 이상해, 이상해!"라고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내가 시키는 대로 눈을 떴다 감아 보았지만 오른쪽 눈이 감기지 않았다. 입은 삐뚤어졌고 발음은 새어나왔다.

"한약을 지어먹고 침으로 집중 치료해야 빨리 낫습니다."

젊은 한의사가 '구완와사'(안면신경마비)라고 진단하면서 치료방법을 설명했다. 병보다 돈이 더 무서워 겁이 덜컥 났다. '지금 내 형편에 무슨 돈으로 그 비싼 한약을 먹는단 말이야. 팔자 편한 소리하고 있네.' 처지가 궁하다보니 한의사의 치료 계획이 마뜩찮게 들려서 속으로 궁시렁궁시렁 거렸다.

한의사는 스트레스가 크게 작용한다고 했다. 병을 불러온 두 가지 원인이 떠올랐다. 가장 큰 원인은 선배의 말을 믿고 사업에 투자했다가 실패한 것이고 두 번째 원인은 만학(晩學)이었다. 선배의 달콤한 꾐에 속아 대출을 받아서 투자했다가 돈 잃고 사람도 잃었다. 마흔 여섯에 시작한 대학공부는 버거웠다. 심리학에다 사회복지학까지 복수전공하려니 힘에 부쳤다. 각종 과제가 천근만근인데 자식뻘 되는 학우들은 조별 과제로 눈치를 주었다. 학점 경쟁이 치열한데 늙은 학우와 같은 조가 되면 자신들까지 학점 피해를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구완와사가 발생한 전날 밤에는 낭패를 당했다. 아내에게 손 벌릴 형편이 아니어서 생활정보지를 보고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섰는데 족발집 주인여자가 나이가 많다며 한 칼에 거절했다. 자존심을 찾을 처지가 아니어서 취업 사이트에 등재된 업체 중 조건이 좋지 않은 업체만 일부러 골라서 이력서를 보냈지만 응답이 전혀 없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것 같아서 낙심이 밀려왔다.

무능했지만 따듯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차려준 밥상

운동회에 오신 아버지와 동생(왼쪽) 나는, 구완와사에 걸린 아버지가 싸온 김밥을 먹었다.
 운동회에 오신 아버지와 동생(왼쪽) 나는, 구완와사에 걸린 아버지가 싸온 김밥을 먹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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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대동군 용연면 천리 27번지

아버지 백천(白川) 조씨의 고향 주소다. 아버지는 이북에 두고 온 박씨 사이에 낳은 아들과 평온하게 살았다. 하지만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가족의 평화를 깨트렸다. 나의 친할머니이자 아버지의 어머니인 윤씨는 양단과 이불 홑청을 챙겨주면서 일주일만 피했다가 오라며 고향을 떠나지 않으려는 막내아들을 1·4후퇴 피난대열에 떼밀었다.

아버지는 남하(南下) 중에 붙잡혀 군에 입대했다가 상이군인으로 제대했고, 피난민 중매쟁이들의 도움으로 시골에서 상경한 열여덟 처녀와 살림을 차리고 삼형제를 낳았다.

아버지는 영등포 역전 일대(현재 신세계백화점)에서 라이터, 만년필, 시계 등을 파는 노점상이었다. 동료 노점상에 비해 수완이 부족한 탓에 수입이 적었다. 동료들은 '케스가리'(짝퉁) 롤렉스시계와 파커만년필을 진품으로 속여 팔기도 했는데 서당훈장의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그렇지 못했다.

가족의 생계는 단속반에 의해 종종 끊겼다. 단속반에게 물건을 뺏기고도 벌금을 물지 못해서 유치장 구류를 살았다. 고달픈 피난살이에 지친 아버지는 술에 취한 날이면 삼형제를 안고 밤새 울면서 하소연했다. "견우와 직녀도 칠월칠석에는 만나는데, 우리 38따라지는 왜 오도 가도 못하느냐!"며 고향을 못 가게 하는 삼팔선을 원망했다. 어렸을 적엔 그런 아버지가 불쌍했다. 하지만 커가면서 아버지의 가난과 눈물이 싫어졌다. 그래서 '아버지처럼 살지 말자,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말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는 그새 아버지보다 세상을 더 많이 살았다. 병이 들면서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 맞다, 아버지도 그때 구완와사에 걸린 거였구나! 흑백사진 속의 아버지는 기울어진 안경을 쓰고, 입은 삐뚤어진 채로 아들 곁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그 병든 몸으로 도시락을 싸서 아들의 운동회에 오셨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노점상 아버지가 기죽어 지내는 둘째아들에게 기운을 주려고 운동회에 오신 것이다. 그때 나는 홀아버지가 싸온 김밥과 사이다를 먹으며 헤헤 거렸지만 아버지는 소금 친 주먹밥을 목 메이게 드셨다.

생존경쟁에서 밀려나고, 병이 들어서야 무능한 아버지가 이해됐다. 아내는 달아나고, 몸은 병들고, 단속반은 쫓아오고, 배고프다, 육성회비 달라 조르는 자식새끼들. 아아, 가도 가도 막막한 이남 땅 피난생활…, 비빌 데도 없이 가파른 언덕을 넘기란 얼마나 힘겨운가. 아버지는 무능했던 것이 아니라 생의 짐이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아버지, 아버지를 지워버린 아들을 용서하세요. 용서를 빌자, 아버지가 나타나 병든 아들의 어깨를 감싸준다.

어둠이 내린다. 낡은 구두와 헤진 옷을 입은 아버지가 밤길을 허청허청 걸어오신다. 차비를 아끼려고 영등포 역전을 출발해 문래동을 지나 오목교를 건너 신정동 뚝방 판잣집까지 걸어와서는 자식에게 중국집 빵을 건넨다. 노점 주변의 중국집 주인이 팔다 남은 빵을 챙겨준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새끼에게 먹이려고 허기를 참으며 품에 안고 왔고, 쫄쫄 굶었던 삼형제는 아버지가 챙겨온 먹이를 허겁지겁 먹었다.

구완와사에 걸린 아버지가 구완와사에 걸린 둘째아들을 위해 쌀을 씻는다. 밥은 연탄불에 안치고, 석유곤로에다 찌개를 끊이고, 계란찜을 찌고, 고등어를 굽는다. 홀아버지가 손수 지은 저녁 밥상이 호롱불 희미한 불빛 아래에 차려졌다. 늙고 병든 아버지 당신은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둘째아들에게만 어서 먹으라고 채근하신다. 짙은 어둠이 루핑 지붕 자락을 흔들고, 차디찬 바람이 흙벽 틈새로 파고드는 추운 밤이면 어린 새끼들을 품에 안고 새우처럼 구부려 주무시던 홀아버지. 아버지는 무능했지만 가슴은 따듯했다.

아버지, 마지막을 배웅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자식에게 버려진 이주민 아버지의 장례식.
 자식에게 버려진 이주민 아버지의 장례식.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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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없어지면 엄마를 찾아가거라!"

1974년 무렵,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졌다. 소년원에서 출소한 형은 어머니가 계신 남도의 항구로 떠났고, 신정동 뚝방 판자촌에는 나와 동생, 단둘이 남겨졌다. 피난살이에 지치고 병까지 들면서 노동력을 상실한 아버지는 내가 열다섯 살이 되면 떠나겠다는 말을 종종했다. 그러더니 내가 열다섯이 되자 진짜로 종적을 감췄다.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된 나와 동생은 판자촌 이웃들에게 밥을 얻어먹다가 전라선 기차를 타고 여수로 떠나야만 했다.

76년 가을,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형은 교도소에 들어간 상황이어서 내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행 버스를 타고 상경해야했다. 아버지는 행려병자가 되어 시립병원에 누워 있었다. 말문이 닫힌 상태였다. 보호자가 나타난 것이 밝혀지면 병원비를 물어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내란 사실을 숨겼다. 나는 이틀쯤 있다가 학교 수업 때문에 아버지 곁을 떠나야 했는데, 마지막 인사를 드리자 아버지는 슬픈 눈빛으로 '아들아,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생존의 기억은 여기까지다. 아버지는 나마저 떠난 며칠 뒤에 자식들의 임종도 없이 쓸쓸하게 숨졌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분골함에 담아왔다. 한줌 재보다 조금 더 많은 아버지의 재는 전남 여수시 종고산 보광사 위쪽에다 뿌렸다. 아버지는 자신이 전라도의 낯선 산에 뿌려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술이 취하면 이북 고향과 오마니를 애타고 슬프게 부르던 피난민 조씨, 향년 52세의 일기로 피난살이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자식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무능했지만 따듯했던 나의 아버지. 연년생 형(가운데)과 나.
 무능했지만 따듯했던 나의 아버지. 연년생 형(가운데)과 나.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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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형제 중에 차남인 내가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더욱 지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분단 조국이 강요한 슬픈 가족사를 청산하고 싶어서 아버지의 제적등본을 처음으로 뗐다. 제적등본에는 몇 개의 의문점이 있었다. 이북에 두고 왔다는 아버지의 처 박씨가 나의 출생지인 서울 영등포구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부모님의 혼인이 삼형제가 모두 출생한 뒤인 1963년에 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혼인과 출생의 앞뒤가 바뀐 것이다.

제적등본의 의문을 풀어줄 유일한 사람은 어머니다. 마침 광주 조선대병원에서 수술, 치료 중인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지난 5월 17일,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여쭈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두 분은 1957년 4월 25일 살림을 차렸고, 혼인신고가 늦은 것은 이북에서 함께 피난 내려 온 큰아버지 때문이다. 큰아버지가 배급을 더 타내기 위해 아버지의 처 박씨를 호적에 올리는 바람에 유부남인 아버지를 상대로 혼인신고와 출생신고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큰아버지는 위장 등록 문제를 덮기 위해 삼형제를 박씨의 자식으로 올리고, 어머니는 동거인으로 올리자고 제안했다. 어머니는 거부했다. 자신이 낳은 삼형제는 서자가 되고, 자신은 첩으로 취급하는 제안이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경찰에 불려가는 등 곤욕을 치르면서 아버지의 처를 사망 처리한 후에 어머니의 혼인신고와 삼형제의 출생신고가 가능했다. 어머니는 우리를 두고 사라졌던 아버지의 행방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사회복지시설에 잠시 의탁했다가 우리가 여수로 떠난 뒤에 판잣집에 돌아와 혼자 지내셨다. 그러다가 병이 들어서 시립병원에 옮겨진 것이라고 했다.

"내가 너에게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주라고 했지만 철이 없던 너는 싫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와 마지막이 될 줄 모르니 기저귀를 갈아드려라'고 하자 그제서야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나는 불편한 기억을 30년간 묻어두었다. 그러다 어머니에 증언에 의해 인출됐다. 이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슬픈 가족사를 청산하기 위해서다. 그래도 변명할 기회를 준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가난이 싫었고, 무능한 아버지가 싫었다. 그 아버지를 좋아한다면 나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난과 아버지를 나의 기억에서 격리 조치했다. 하지만 나는 가난한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가리봉에서 이주민과 다문화가정을 돕는 일을 6년째 하고 있다. 선한 인간이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불효의 죄를 덜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아들에게 버려졌던 중국동포 아버지의 장례를 2008년에 치른 적이 있다. 중풍을 앓다가 자식의 임종도 없이 쓸쓸히 눈을 감은 그를, 나의 아버지 백천 조씨가 자식도 없이 태워졌던 그 벽제승화원에 모시고 가서 아버지를 버린 아들을 대신해 화장해드렸다. 하지만 나는, 이주민 아버지를 버린 그 아들을 욕할 수가 없었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아버지] 공모 기사입니다.



태그:#아버지, #피난민, #노점상, #가리봉, #구완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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