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본에서 1992년부터 출간된 로마제국 흥망사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69)가 15년 간 로마제국으로의 여정을 끝내고 2006년 12월 16일 도쿄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났다.
▲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일본에서 1992년부터 출간된 로마제국 흥망사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69)가 15년 간 로마제국으로의 여정을 끝내고 2006년 12월 16일 도쿄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났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로마문명 이야기를 하면서 시오노 나나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다루는 <로마문명 이야기>도 그녀의 저작에서 상당 부분 도움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건대, 나는 그녀를 추종하거나 그녀의 작품을 요약할 요량으로 이런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비록 그녀의 저작을 참고하지만, 거기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나 나름의 관점에 의해 취사선택하고, 나의 견해를 덧붙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 <로마문명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잘 읽어 보면 대번에 알 것이다.

여하튼 <로마인 이야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 여성작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저 생각나는 대로 이 작가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혀본다.

나는 지난 십여 년 간 국내에 번역된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거의 대부분 읽어 보았다. 적어도 그 주요저작은 최근의 <십자군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 읽었다. 수많은 책을 쏟아냈기 때문에 하나하나 기억하기도 어렵다. 족히 40여권 가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오노 나나미를 한 마디로 평한다면 '역시 대단한' 작가다. 그녀의 성향이나 역사서를 집필하는 방법에 대한 이견은 차치하고라도 역사관련 서적을 이렇게 다양하게 내면서 지속적으로 히트를 치는 작가가 전 세계적으로 있을까? 나는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평가 받을 만한 작가라 생각한다.

일본에 가서 여러 번 목격했지만, 그곳 서점에서도 시오노 나나미는 특별 대접을 받고 있었다. 대다수 서점에 그녀의 코너가 따로 만들어져 독자들이 그 의 책 전체를 한 자리에서 보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등장... 로마사, 한·일서 꽃을 피우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1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1권.
ⓒ 한길사

관련사진보기

서구사회의 역사에서 로마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동양사회에서 로마사는 그저 서구역사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 왔다. 내가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운 로마사도 그저 그리스 다음에 설명되었을 뿐 다른 큰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의 출현으로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사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서양역사에서 로마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시오노 나나미의 이야기를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시오노 나나미 때문에 로마사에 재미를 붙이고 그녀의 책만이 아니라 그 관련 서적까지 확장해서 읽어가는 독자들이 꽤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시오노 나나미의 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이 중심이 되는 역사서인데, 이것은 팩트를 중심으로 서술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채워 나가는 책들이다. 그녀의 대표작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로마인 이야기> <바다의 도시 이야기> <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십자군 전쟁>과 같은 책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역사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문학적 상상력이 중심이고, 역사적 팩트는 단지 그녀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단초에 불과하다. 이 중에서도 <은빛 피렌체> <주홍빛 베네치아> <황금빛 로마>은 완전한 소설 작품이고, 작품 활동 초기에 썼던 <르네상스 여인들> 같은 책은 역사적 팩트와 문학적 상상력이 반반으로 섞인 역사문학서라고 할 수 있다.

알려진 대로 시오노 나나미는 정통 사학자가 아니다. 그녀는 지난 40년 이상을 유럽에서 살아 왔지만 단 한 번도 정규 교육기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지 않았다.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라틴어를 공부하고, 직접 지중해 연안 고대 도시를 답사하면서 역사적 팩트를 확인하고, 그에 기초하여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온 사람이다.

나는 그녀의 문학적 상상력의 기초는 수많은 독서와 함께 이루어진 답사여행이라 생각한다. 그녀가 다닌 어느 곳도 현재 고대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은 없다. 거기에는 유적과 유물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진 성곽과 허물어진 신전 그리고 한 무더기의 돌 더미에서 상상력을 작동한다. 마치 필름을 거꾸로 돌려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활보하는 것을 목격한 것처럼 묘사한다. 이것은 현지답사를 기초로 만들어 내는 시오노 나나미만의 탁월한 상상력이다.

시오노 나나미 책에서 절대 간과하면 안되는 사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5 : 로마 세계의 종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5 : 로마 세계의 종언>
ⓒ 한길사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우리는 시오노 나나미 책을 읽으면서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는 그의 많은 책 중 대표서인 <로마인 이야기>에 국한해서 말해 보자. 우선 그의 책은 정통 사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통 사서는 역사적 팩트를 통해서 역사의 실체와 그 의미를 말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알 수 없는 사실은 알 수 없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섣부른 상상력은 금물이다. 

그러나 <로마인 이야기>는 그런 류의 사서가 아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팩트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다양한 상상력이 오히려 더 중요한 서술 방법이다. 사실 이런 상상력이  이 책에 없었다면 시오노 나나미의 오늘의 명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읽는 이들이 이 책의 모든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다. 정통 사서는 상상을 하는 경우라도 그것이 상상임을 밝히지만 <로마인 이야기>는 매번 그런 고백을 하면서까지 책을 써나가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실과 상상력 그 경계가 분명치 않은 것이 <로마인 이야기>의 실체다. 그런 면에서 어느 대학이, 만일 서양역사 교과서로 이 책을 쓴다면, 이는 학생들로 하여금 역사적 사실을 오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매우 부적절하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읽어야지 그 이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의 세계에서는 경계해야 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그녀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녀의 책을 읽다보면, 그녀가 추구하는 가치가 대체로 "힘은 아름답다"라는 말로 표현될 것 같다. 그녀는 공공연히 카이사르를 사랑한다.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제정의 기초를 닦은 카이사르가 펼친 로마의 정책은 열이면 열 모두가 찬사의 대상이다. 그녀는 로마의 문화를 사랑한다. 로마가 제국화하면서 만들어낸 문명의 이기, 로마가도, 수도, 건축물 등의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로마의 제도, 법률과 같은 소프트웨어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그녀에겐 로마제국이 역사상 가장 완벽한 국가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제국에 대한 동경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녀의 역사관은 은연중에 현대사에서 나타난 제국주의에도 묵시의 동조를 보낸다. 제국주의에 희생된 나라와 국민에 대한 배려는 찾을 수 없고 그것을 오로지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책을 통해 보내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은 시오노 나나미가 일본의 우익을 대변한다고 이야기한다. 본인은 이런 비판에 대하여 시인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시인 여부를 떠나, 이 점은 우리가 그의 책에서 간과하면 안 되는 사항이다.

로마는 길을 만들었고,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았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문명 예찬론자로 로마와 중국을 비교하면서 로마는 이민족을 향해 길을 만들었고, 중국은 이민족과의 사이에 방벽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로마문명을 개방성의 문명으로, 중국문명을 폐쇄성의 문명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서 선뜻 동조하기 어렵다. 나타난 현상으로만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내용을 보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은 로마라는 조그만 도시가 팽창에 팽창을 거듭해 지중해 연안 전체를 그 깃발 아래에 놓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빅뱅과 같은 것이다. 로마라는 고도로 집적된 에너지원이 어느 순간 폭발하여 무수히 많은 별을 만들어 냈다는 말이다. 로마가도는 이 폭발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빛과 같은 존재였다. 로마라는 하나의 점이 폭발하여 수 백 개의 로마를 만들어냈고, 로마가도는 바로 그 원점인 로마와 또 다른 로마를 잇는 생명선이었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로마가도
 로마제국의 로마가도
ⓒ 위키피디아

관련사진보기


로마인들이 로마가도라는 인프라에 특별히 신경을 쓰고 여기에 국력을 집중하고 관리한 이유는 로마가 갖는 태생적 특성 때문이었다. 로마는 제국의 중심이었지만 그 근본이 도시국가이었다. 도시국가는 수백 만 명의 군대를 조직하여 곳곳에 주둔시키는 방법으론 광활한 영토를 다스릴 수 없었다. 비록 수에 있어서는 적었지만 로마시민을 중심으로 최고의 강군(이것이 로마군단이다)을 만든 다음 수시로 군사력이 필요한 지역에 급파하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법을 쓰기 위해서는 속도가 문제였다. 제국 곳곳을 단시간 내에 주파할 수 있는 교통혁명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제국을 다스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로마인들은 로마가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빠른 길을 만들어 군대를 보내는 것이야말로 로마인들이 제국을 유지하는 최고의 비법이었다.

중국문명, 그 중에서도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는 만리장성이 만들어지는 전국시대와 최초의 통일국가를 연 진왕조를 생각해 보자. 당시 중국엔 장강(양자강)과 황하 사이, 즉 중원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이미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는 수많은 도시들이 만들어져 있었고(제자백가를 생각하라, 이들 현자들이 모두 한 고향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이들 도시들은 7개(진,초, 연, 제, 한, 위, 조)의 군웅에 의해 할거된 상태에서 서로 다투고 있었다. 

전국시대의 마감은 이런 군웅들이 하나의 영웅에 의해 통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국에는 로마와 같은 에너지의 발원지가 없었다. 그보다는 스스로 발광하는 별 같은 에너지원이 만리장성을 쌓기 전에 수없이 산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통일은 바로 이들 별들을 하나의 힘으로 통합한 것이다.

중국의 만리장성
 중국의 만리장성
ⓒ 위키피디아

관련사진보기


그러니 로마문명은 하나의 점이 수많은 점으로 발산한 반면, 중국문명은 거꾸로 수많은 점이 하나의 점(통일왕조)으로 모아진 것이다. 로마가도는 바로 한 점이 수많은 점을 만드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선이라면 만리장성은 하나의 통합된 사회를 대외적으로 구별하기 위한 원주와 같은 것이었다. 원의 안쪽엔 한족이, 밖엔 이민족이 있다는 것을 장성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장성을 구축하지 않았다면 시황제가 다스린 제국의 경계는 모호했을 것이며, 이 상태에서 시황제는 계속 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만리장성은 중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중국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며 평화유지를 위한 수단이었다.

로마인들은 가히 도로의 민족이었다

어느 문명권이든지 조그만 국가에서 광대한 제국을 만든 경우, 그것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길이든 운하든 빠른 통신 및 운송수단이 필요했다. 로마문명은 그를 위해 매우 발달된 도로망을 만들었다. 그 이전 세계최대의 제국이었던 페르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만들어 2700여km가 넘는 광대한 제국 곳곳에 왕의 명령을 전달했다. 이러한 도로망은 역사상 최대 제국을 만든 칭기즈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국 운영에서 정보통신의 중요성을 알아 제국 어디든 빠른 말을 바꾸어 가며 24시간 달릴 수 있는 도로망을 구축함으로써 한때나마 제국을 다스릴 수 있었다.

진시황 시절 중국에도 도로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식되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시황제는 마차나 수레의 바퀴를 통일했다고 한다. 이것은 도로를 정비했다는 의미이다. 다만, 이 시기 중국에서 통신이나 운송수단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로보다도 강이었다. 중국 문명은 일찍이 강을 이용하여 거대 제국을 다스렸다. 장강(양쯔강)과 황하라는 거대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중국에서는 이 물길만 제대로 이용하면 가장 빠르게 소식을 전하고 사람과 물건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 통치자가 돈을 들여 사회간접자본을 만든다면 강에 투자하지 그 험난한 지형의 땅에 투자하지 않았을 것임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중국이 로마인에 비하여 길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장성을 쌓음으로써 스스로 폐쇄적인 문명을 만들었다는 식의 역사해석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나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두 문명이 집중한 것이 달랐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역사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아래에서 보겠지만 로마인들이 만든 가도의 기술적 수준은 역사상 최고였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로마가도는 로마제국 유지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 목적에 가장 부합한 기술적 방법으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로마인들은 인류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토목 기술로 길을 만들어 제국 전체를 거미줄처럼 엮어 놓았다. 역사상 어떤 제국도 로마인들이 만든 가도처럼 치밀한 기술을 이용해 그 같이 완벽한 도로를 만들지는 못했다. 로마인들은 가히 도로의 민족이었다.


태그:#로마문명이야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