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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이러지 말라고. 당신이 그러지 않아도 난 이미 충분히 힘든 날이었어. 같이 안 가겠다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나에게 그러는 거야?"

 
애써 아무일도 아니라는 심드렁한 태도를 취하기로 했다. 낮은 목소리로 투정하듯 그에게 응수했으나, 내 성을 된소리로 부르는 줄 알았던 "빡"이 격앙된 그의 기분을 표출한 욕설이라는 것을 인지한 후 가슴은 콩닥콩닥, 내 머릿속은 바빠졌다. 말을 하는 중간에도 끊임없이 계산을 하고 있었다.
 
'남자가 가까이 오면, 소리를 질러야 하나? 조용한 것이 다들 집을 비운 것 같은데... 도망가면, 골목을 벗어나기 전에 잡힐까?'

'물의 궁전'이라는 별명을 가진 따만사리를 가기 위해 내린 곳에서, 가이드를 해주겠다며 끈질기게 따라붙는 남자에게 너무 확실하게 노(NO)를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좁지만 아기자기한 골목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내가 카메라 앵글에 잡힌 그의 모습을 언급하며 '먼저 가라고, 난 알아서 가겠다'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의 입에선 오랜만에 듣는 'hell' 과 'fuck' 같은 단어들이 나왔다. 

 
더구나 그의 얼굴은 험상궂었고 그곳은 골목이었다. 여간해선 떨지 않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별일 아니라는 듯, 하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였고 골목을 돌아서도 뛰지 않았다. 뛰어봤자 골목의 연속이었고 내가 뛰면 반사적으로 남자가 날 잡고싶어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길도 모르는 상태에서 남자를 자극하면, 그가 날 잡는 것은 시간 문제일것이다. 셔터를 누르며 힐끗 돌아보니 여전히 그가 따라온다.


'어휴, 진짜 웬만하면 가지 언제까지 따라올 셈이야.'

여전히 그의 입에선 육두문자들이 나오고 있었고 나를 향해 인도네시아에서 꺼지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몇 사람이 웅성대는 소리는 점점 또렷하게 들리더니 급기야는 골목을 돌아 실체로 나타났다. 가족으로 짐작되는 사람들의 무리였다.

'야호!'


타인이 그렇게 반가운 것은 오랜만이었다. 더구나 남들의 웅성대는 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절대 저 사람들과 떨어지지 않을테다.'


지리를 몰랐던 상황에서 그 가족을 따라가니, 골목 바로 옆에 옛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다. 난 남자의 존재는 잊은마냥 행동했다. 눈에도 안 들어오는, 아무것도 없는 돌무더기 앞에서 끊임없이 카메라를 들이댔고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해주는 설명이 흥미있는 양, 잠시 듣기도 했다. 


결국 그에 대한 내 무관심과 태연함이 그를 보냈다. 주위를 둘러보고 그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도 경계를 늦출 순 없었지만 골목에서 험악한 얼굴을 한 그와 단둘이 있어야 하는 것보다는 백 번 나았다. 

골목이 뒤엉켜 있는 그곳에서 심지어 대여섯 살 정도의 아이에게 길을 물어보기도 했다. 아이는 모국어만 잘 구사해도 칭찬을 받을 만한 나이로 보였으므로 대충 손가락으로 여기다 싶은 방향을 가르킨 뒤
"따만사리?"라고 물었다. 아이는 알아들었다!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결국 난 따만사리를 찾고야 말았다. 


여행은 특정 장소를 가는 것이 아니다
 
영어를 전혀 모르는 아이와 '소통'했다는 느낌, 이것이 여행이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먹구름을 몰고 오기도 하는 낯선 사람과의 상황 또한 여행인 것이다.

따만사리 궁전은 여왕과 후궁들이 목욕을 하던 장소이기에 아름다웠고 처소에 들 여인을 고를 왕을 떠올리면 꽤 다이나믹한 장소임엔 분명했다. 하지만 족자카르타를 떠나서도 남아있는 것은 따만사리의 아름다움보다는 골목 안의 사람사는 풍경과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의 눈망울, "빡, 빡!"리던 험상궂은 남자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것을 내 성을 부르는 줄 알고 갸우뚱거렸던 나의 엉뚱함이 때때로 날 웃게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12년 4월부터 2013년 4월에 걸친 2회의 인도네시아 종단여행을 바탕으로 합니다. 현지 장소의 표기는 현지에서 이용하는 발음을 기준으로 합니다.


태그:#족자카르타, #따만사리 근처의 골목들, #동남아시아 여행, #인도네시아 유적지, #세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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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담은 사진에세이 [same same but Different]의 저자 박설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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