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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2009년 3월부터 2011년 2월까지 나가사키에 체류하며, 전쟁과 원자폭탄, 핵 피해자 문제 그리고 일본의 평화운동 등에 관하여 연구했다. 일본의 침략과 가해의 역사를 전시하며 지역의 평화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의 객원연구원을 지낸 기자는 2년 가까운 나가사키에서의 현장 답사 및 자료연구에 더하여, 지난 4월 1일~5일, 추가로 나가사키 현장취재를 다녀왔다. 이를 바탕으로 '나가사키 평화기행'을 주제로 한 기사를 약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기자 말>

하늘이 맑고 푸르다. 아침부터 평화공원에는 끊임없는 여행객들이 찾아든다. 원폭 피해로 고통받으며 물을 달라고 애처롭게 말하던 아홉 살 소녀의 이야기를 시로 쓴 비석이 공원 입구 평화의 샘 분수 앞에 세워져 있고, 공원 곳곳에는 해외 각국에서 보내온 평화의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누군가는 나가사키 종 앞에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며 기도를 올린다.

본래 지금 평화공원이라 불리는 이 곳에는 원폭투하 당시 조선인, 중국인도 많이 수감되어 있다가 비명에 피폭사한 '우라카미형무지소'가 있었던 자리로서, 공원 중앙에 그 터가 조금이나마 남아있고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다(관련기사 보기-원자폭탄 떨어진 그곳 철창에서 갇혀 죽은 조선인들). 또 공원 내에는 중국인 희생자 추모비도 있기 때문에 나가사키 평화기행시 꼭 한 번 가보아야 할 곳이다.

나가사키 평화공원 북쪽 정중앙에 우뚝 솟은 평화기념상.
 나가사키 평화공원 북쪽 정중앙에 우뚝 솟은 평화기념상.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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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가사키의 모든 안내 책자에서 대표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따로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공원 북쪽에 있는 거대한 동상이다. 청동으로 제작된 남자의 나상을 형상화한 이 동상은 나가사키 원폭투하로부터 10년이 흐른 1955년 8월 8일에 완성되어 제막식이 거행된 '평화기념상'으로서, 받침대부터 그 높이가 13.6m에 달하는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이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기타무라 세이보는 "원폭 희생자의 진혼과 영원한 평화를 염원하며, 오른손을 원폭을 가리키며, 왼손은 평화를 가리킨다"고 설명한 바 있다. 동상의 오른손은 하늘을 찌르고 있고, 왼손은 옆으로 쭉 뻗고 있는 형태로, 반라의 남성이 돌 위에 앉아 있는 이 형상을 가만히 바라보자면, 도대체 이 동상의 어떤 부분이 평화를 상징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실제로도 이 동상을 두고 나가사키의 피폭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 평화기념상이 건립되기까지의 경과를 보면, 1949년 '나가사키 국제문화도시건설법'이 국회에서 가결되면서 그 이듬해 사업계획이 확정되어 공원과 문화시설의 건설이 시작된다. 비슷한 시기 히로시마에서는 '평화기념도시건설법'이 가결되고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최종 공포, 시행되었다.

당시 나가사키에서는 "후세에 남겨 부끄럽지 않을 만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어, 도쿄 등 대도시에서 활약하는 문화예술인의 의견을 듣는 나가사키 현인회를 열었다. 거기서 채택된 것이 바로 기타무라 세이보의 거대한 남성동상의 안이었다. 동상을 받치고 있는 돌의 비용을 제외하고 동상만 제작하는 데 당시 돈으로 약 1500만엔을 필요로 하여 모금을 개시했다.

동상을 둘 장소는 처음부터 높은 지대가 고려되었다. 가자카시라 산 정상에 세우자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결국은 지금의 부지로 결정되었다. 홍보비나 경비 등을 포함해 4천만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해마다 이곳 앞에서 8월 9일 원폭의 날을 맞이하여 평화기념식이 열리고, 또 세계 어디선가 핵실험 등이 실시될 때면 시민의 항의시위가 벌어지고, 수많은 여행객들이 꼭 이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간다. 그만큼 나가사키의 상징으로서 각인되고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1955년 당시는, 피폭으로부터 10년이 흐르도록 일본 국내에서도 아직까지 피폭자를 위한 원호법이 제정되지 않아, 피폭자들은 자신의 돈으로 병원비와 약값을 해결해야만 했다. 패전 후의 궁핍하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많은 피폭자들이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평화기념상을 바라보는 씁쓸함과 분노의 감정이 다수의 감정이었음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히로시마 원폭의 상징인 '원폭돔' 건물.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원폭 투하 당시에는 산업장려관이었다.
 히로시마 원폭의 상징인 '원폭돔' 건물.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원폭 투하 당시에는 산업장려관이었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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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히로시마 원폭의 상징은 실제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원폭 돔'이다. 반면, 나가사키에서는 현재 그러한 상징이 보존되고 있지 못하다. 본래는 나가사키에도 그와 같은 상징이 될 수 있는 우라카미 천주당이 있었지만, 1958년 철거되어 버렸다. 지금 있는 우라카미 천주당은 그 이후 재건된 새 건물이다.

요컨대, 히로시마의 원폭돔이 히로시마 원폭의 상징이라면 나가사키 평화기념상은 원폭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왜냐면, 그것은 원폭 피폭 후 10년이나 경과한 1955년에 새로 설치된 기념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화기념상 앞에서 원폭의 비극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저 '나가사키 관광의 상징'으로서 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담아 기념사진을 찍어갈 뿐이다. 즉, 나가사키 평화기념상은 나가사키의 '원폭 관광도시화 프로젝트'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반라의 근육질 남성상은 아무리 봐도 평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위압적이며 과시적인 느낌을 준다. 실제로도 이 동상을 만든 작가에게 이미 그러한 의도가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우선은 동상을 세울 장소를 논의할 때부터 이미 눈에 띄고 높은 곳에 우뚝 서서 위용을 자랑하게 해야 한다는 기획의도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남긴 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나라시대에 조정 아래에 전국을 통일하여 일본을 불교국가로 만들고자 대불이 제작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화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나라의 대불 사례에서 배워, 가능한 한 큰 남성상을 만들어야 한다. 여신은 안 된다. 절대로 남자신이어야 하며, 크기는 곧 힘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높은 언덕 위에 우뚝 서서 원자폭탄이 떨어진 하늘을 손가락으로 찌르면 그것이 원폭의 역사를 회상시켜 주고, 평화를 기념하는가. 오히려 위용을 과시하며, 우리 나가사키는 죽지 않았어, 우리 일본은 아직 살아있어라고, 그것을 굳이 거대한 근육질의 남성상으로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시선을 압도하는 무언가를 언덕 위에 둠으로써, 관광객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상업적 프로젝트가 아닌가. 실제로 이 기념상은 나가사키의 평화에 적합하지 않다며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나가사키 원폭 피해의 폐허와 참상을 상징했던 우라카미 천주당. 수많은 시민이 보존을 외쳤지만, 결국 나가사키시는 철거와 재건을 강행해버렸다.
 나가사키 원폭 피해의 폐허와 참상을 상징했던 우라카미 천주당. 수많은 시민이 보존을 외쳤지만, 결국 나가사키시는 철거와 재건을 강행해버렸다.
ⓒ 미육군병리학연구소 반환사진(나가사키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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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오카 마사하루 목사는 '평화기념상 철거에 관한 청원서'를 나가사키 시의회에 제출한 적이 있다.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철거 주장의 근거로서, 그는 제작자인 기타무라 세이보가 전쟁 때 다수의 군신상을 만드는 등 군국주의를 선동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 아무런 반성없이 갑자기 평화주의자로 변신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점과 원폭을 관광자원으로 삼고자 하는 행정측의 관점 역시 비판했다. 이러한 평화기념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지금도 나가사키 피폭자들 사이에 존재한다. 평화기념상 앞에서 평화를 느끼는 사람은 아무래도 제작자인 기타무라 세이보나 평화기념상을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 외에는 없을 것 같다.

나가사키 원폭피폭자 시인 고 후쿠다 스마코씨의 시 '혼잣말'


혼잣말 

모든 것이 싫어졌습니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땅에 우뚝 솟은 거대한 평화상
그건 됐어요 그건 됐다고 해도
그 돈으로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돌로 만든 상은 먹을 수도 없고 배를 채울 수도 없어요"
치사하다고 말해주네요
피폭 후 십 년을 겨우 사는
피재자의 거짓없는 심경입니다

詩 후쿠다 스마코

※ 후쿠다 스마코(1922~74년)는 나가사키 남자사범학교 회계과에 근무하던 중에 피폭되었다. 양친과 언니는 피폭사했다. 이날부터 그녀의 생존을 위한 고투가 시작된다. 이 시는 1955년 8월 아사히신문에 실렸다. 후쿠다씨가 세상을 떠나는 다음해, 원폭낙하중심지공원에 '생명을 사랑하다'라고 새긴 시비가 세워졌으며, 매년 4월 2일 그녀를 추모하는 이 비석 앞에서 추모제가 열린다.



태그:#나가사키평화공원, #평화기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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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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