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박헌영 트라우마〉
▲ 책겉그림 〈박헌영 트라우마〉
ⓒ 철수와영희

관련사진보기

손석춘의 <박헌영 트라우마>가 나왔다. 무엇보다도 빨갱이 중의 빨갱이로 그릇 알고 있는 박헌영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책이다. 손석춘이 무봉산에 있는 박헌영의 아들 원경과 나눈 대화였으니 그 누구보다도 그 아버지를 잘 알게 하는 책이다.

"'조선의 레닌'으로 불렸던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빨갱이 중의 빨갱이' 박헌영은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린 뒤 처형당했다. 박헌영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집행한 사람은 독재자 이승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을 적극 지원해 준 미국도 아니었다. 박헌영을 처형한 사람, 그는 김일성이었다."(들어가는 말)

그렇다. 손석춘이 이 책을 쓴 이유가 그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섰지만, 남과 북의 역사 속에서 삭제된 그를 역사 속에 불러오고자 하는 것 말이다. 그를 바르게 이해하는 대화만이 남과 북 모두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게 그것이다.

손석춘은 원경 스님과 대화를 나누기 전 <이정 박헌영 전집>을 통해 박헌영에 대해 짚고 나간다. 박헌영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것도, 일제에 붙잡혀 감옥 속에서 6년간의 모진 징역형을 견뎌낸 것도 모두 조선의 독립을 위한 일이었고, 1925년 조선공산당을 창립한 것도 모두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이상사회를 꿈꾸며 실현하기 위함이었다는 것 말이다.

박헌영의 일대기는 그 책을 참조하면 충분할 것 같다. 다만 이 책에서 원경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소개한다. 그 중 하나가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라 할 수 있다. 원경 스님은 이현상 선생이 이야기한 것을 토대로,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가 왜곡된 것임을 밝힌다.

"보천보를 일으킨 사람은 정확하게 김창희 장군입니다. 김창희는 홍범도 장군하가도 같이 있었고, 또 김좌진 장군하고 청산리 전투까지 한 사람입니다. 홍범도 장군하고 김좌진 장군이 동만주로 나갈 때 김창희는 백두산과 오봉산 일대에 남았어요. 남아서 뭘 했느냐면, 부잣집에 가서 식량을 강제로 가져오기도 하고 사냥도 하고 그랬죠. 어떤 때는 비적생활을 했어요."(78쪽)

'보천보'가 무엇인가? 그것은 압록강하고 연결된 저수지요, 그것이 신의주로 가는 뗏목을 이어주는 길목인데, 그걸 일본순경들이 관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주재소를 김창희가 습격했다는데, 그때마다 김창희는 자신은 '김일성'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걸 지금껏 남과 북 모든 이들이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손석춘은 원경 스님의 진술이 현재의 학계 연구 결과와는 배치되는 사실이라고 한다. 아무리 확고부동한 증언이라도 객관적 자료가 뒷받침될 때에만 최종적으로 확증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책에 원경 스님의 간접증언을 담은 이유가 뭘까? 훗날에 또 다른 사실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를 역사적인 사건을 두고서 '구술자료'로 확보해 놓고자 함이라 한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승만 정부가 창경궁에 '이현상의 시신'이라며 전시를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원경 스님은 이현상을 잘 알고 있는 한산 스님이 보기에 그 시체는 이현상의 시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패하고 퉁퉁 부었어도 눈, 코, 귀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빨치산 소탕작전에 나선 경찰의 지휘관이던 차일혁의 아들도, 빨치산 대장 이현상에게 총을 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현상 선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 한산 스님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저를 데리고 이현상 자녀를 찾아다니는 거였어요. 그런데 결국 못 찾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때, 뉴스에 그분 따님이 나옵디다."(140쪽)

그리고 이 책에 놀랄만한 사실 하나가 더 담겨 있다. 남북을 아우르는 임시정부 수립이 모스크바의 삼상회의 핵심인데, 당시 언론에서는 소련이 5년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 '다른 진실'이 있다는 게 그것이다. 오히려 미국이 더 엄청난 주장을 했다고 한다.

"미국이 30년 동안 조선을 신탁통치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련이 그럴 수는 없다고 합니다. 자주적으로 조국을 건설할 수 있는 시간은 자기들이 볼 때는 5년이면 된다. 그러니 5년 후견제를 두자고 제안했던 겁니다. 그런데 국내 신문들이 그 5년이라는 말 한마디만 가지고 큰 오보를 한 거예요. 소련이 5년 동안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죠. 아버지 박헌영도 그 보도를 믿고 처음에는 반탁을 했습니다."(160쪽)

이 책 말미에, 손석춘은 남북 모두를 대변하는 듯 원경 스님에게 아버지의 복권을 이야기한다. 그에 대해 아들 원경 스님도 순순히 응대했을까? 과연 그렇게만 된다면 박헌영을 둘러싼 트라우마도 순순히 걷힐 것으로 내다봤을까?

아니다. 그 아들 원경 스님은 박헌영 개인의 역사를 복권시키는 것보다도 '남로당 전체'의 역사를 복권하는 게 우선이라고 고집한다. 그때에만 아버지의 복권도, 아버지와의 화해도 자연스레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손석춘보다 한 발 앞서간 역사의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박헌영 트라우마 - 그의 아들 원경과 나눈 치유 이야기

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2013)


태그:#손석춘의 〈박헌영 트라우마〉, #보천보는 김창희 장군, #이정 박헌영 전집, #원경 스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