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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공원을 지나 한적한 주택가를 거친 다음 S-Bahn(쉽게 말하면 독일판 서울지하철 1호선이라고 보면 된다) 위의 철교가 나온다. 지금은 순환선 S-Bahn(S41, S42)이 구 동서베를린을 자유로이 쌩쌩 달리고 위의 철교로 내가 자유롭게 건너갈 수 있지만, 20여 년 전에 장벽으로 순환선이 끊겨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참고로 순환선은 2000년 초반 들어서야 재개통되었다).

이 철교를 지나면, 베를린 시민들에게 역사적인 명소인 본홀머 거리(Bohnholmer Straße)가 나온다. 이 거리에 가면 나는 이전에 만났던 베를린 토박이와 했던 대화가 항상 떠오르곤 한다.

이 다리 아래에 S-Bahn 순환선(S41, S42)이 지난다.
▲ 첫 번째 철교 이 다리 아래에 S-Bahn 순환선(S41, S42)이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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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위로 순환선 S-Bahn이 자유로이 지난다.
▲ 철교 아래의 철도 지금 이 위로 순환선 S-Bahn이 자유로이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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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 처음 온 지 3개월 후 베를린에서 가구가 갖춰진 집을 찾고 있을 무렵, 본홀머 거리에서 가까운 판코프(Pankow)지역의 집에서 연락이 온 적이 있었다. 당시 내가 찾아간 집에 살고 있었던 분은 지금 필자가 다니고 있는 자유대학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다비드라는 학생이었다.

사실 그가 한국학을 전공해서 매우 반가웠던 바람에, 집에 관한 정보 뿐만 아니라 판코프와 베를린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전에 독일문화원에서 배웠던 베를린 장벽 붕괴의 역사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본홀머 거리에 대한 역사로 자연스레 넘어가게 되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자신의 노트북으로 안내하면서, 장벽이 붕괴될 당시 본홀머 거리가 어떠했는지 유튜브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유튜브에서 본 영상은 다음과 같았다. 동독정부가 여행자유화 조치를 발표한 후, 동서독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에 있는 초소들로 모두 몰려들었다. 사실 동독 주민들이 초소들로 몰려든 이유는, 당시 공산당 대변인이었던 귄터 샤보프스키(Günter Schabowski)가, 기자들이 언제 국경개방을 하는가에 대한 기자 질문의 공세에, "지금 즉시"라고 답변한 것이 생방송으로 송출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초소에 주둔한 군인들은 아직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오지 않아서, 국경을 개방할 수 없다고 무전기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자회견을 들었던 동베를린 시민들은 본홀머 거리에서 "문을 열어라(Tor auf)!"를 반복적으로 외쳤다. 이 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서베를린으로 다녀온 후 "다시 돌아오겠다(Wir kommen wieder)"고 외쳤다. 결국 시민들의 압력으로 인해, 다른 초소지역과 달리 본홀머 거리 국경초소는 상부의 명령을 확인하지 않고 개방한 최초의 장벽국경초소가 되었다. 덕분에 베를린 토박이들에게 상징적으로 남은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베를린 장벽붕괴에 대해 주로 생각하는 사진은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장벽 위로 아이를 올리는 사진을 주로 떠올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언론이나 교과서에서 소개된 다른 베를린 장벽 붕괴 사진들도 주로 베를린 중심가와 관련된 사진들이다. 하지만, 베를린 토박이였던 다비드는 장벽붕괴가 최초로 시작된 곳이 본홀머 거리였다는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유튜브 비디오를 바탕으로 나에게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였다. 이것이 그가 설명해준 진정한 베를린 장벽붕괴의 역사였다. 아쉽게도 그의 특별한 사정으로 인해 후에 룸메이트가 되지 못했지만, 그가 말해준 역사는 내가 다시금 이 거리를 방문했을 때 다시금 머릿속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당시 주민들이 건너가기 위해 기다렸던 그리고 초소가 있었던 뵈제다리(Bösebrücke)는 이 역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1989년 11월 9일. 독일 내 국경의 첫 번째 국경통과가 있었다. 그 날 독일민주공화국의 국경제한은 무너졌다." 참고로 필자는 현재 이 다리를 자주 건너간다. 그 이유는 전차를 타고 이 다리를 건너가야 필자가 한 달에 한 번 주말에 단골로 가는 미장원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 동베를린주민들이 외쳤듯이 미장원에 갔다가 다시 자유로이 다리를 건너 집에 돌아간다. 결국 다비드가 보여주었던 동베를린 주민의 열망과 용기가 지금 내가 마음대로 이 다리를 건너갈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닐까?

뵈제다리. 필자는 여기를 지나는 전차인 M13을 타고 단골 미장원에 간다.
▲ 뵈제다리 뵈제다리. 필자는 여기를 지나는 전차인 M13을 타고 단골 미장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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뵈제다리는 1989년 11월 9일을 기억하고 있다.
▲ 뵈제다리의 문구 뵈제다리는 1989년 11월 9일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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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다리 밑에는 S-Bahn Bohnholmer Straße역이 있는데, 원래 이 역사는 장벽이 세워질 때는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통과한 유령역사였다. 지금은 다시 역사가 재정비되어, 5개 S-Bahn노선(S1, S2, S25, S8, S9)이 지나는 역사로 거듭났다. S-Bahn노선들이 장벽시대와 달리 약간 변경되었긴 하지만, 원래 S1, S25는 서베를린에서 운영했던 노선에서, S8, S9는 동베를린에서 운영했던 노선에서 기원한다. S2는 통일 후 현재 동서베를린을 관통하는 노선으로 거듭났다. 현재는 누구나 이 S-Bahn역에서 열차를 아주 손쉽게 갈아탈 수 있다.

한 때 유령역이었지만, 지금은 재정비되었다.
▲ S-Bahn Bohnholmer Straße역 한 때 유령역이었지만, 지금은 재정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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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기념물 및 조형물에는 베를린 장벽 시대의 역사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는 장벽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당시 장벽구조는 어떠했는지, 감시초소의 구조가 어떠했는지 상세히 저술되어 있다. 역사적 서술뿐만 아니라 장벽이 붕괴된 날인 1989년 11월 9일 당시 본홀머 거리에 대한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다. 특히 조형물 중에 독일 총리였던 빌리브란트가 한 말이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베를린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장벽은 다시 무너질 것이다." 그의 말대로 갈라졌던 베를린은 결국 독일인 모두의 수도로 다시금 재건되었으며, 정부청사이전과 구동베를린 지역의 과학클러스터 육성, 그리고 예술진흥정책으로 인해 인구유입이 상당히 활발히 진행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당시 본홀머거리의 초소와 장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장벽기념물 당시 본홀머거리의 초소와 장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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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9일 장벽붕괴 당시 본홀머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장벽기념물 1989년 11월 9일 장벽붕괴 당시 본홀머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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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살아날 것이며, 장벽은 무너질 것이다." - 빌리 브란트
▲ 장벽조형물 "베를린은 살아날 것이며, 장벽은 무너질 것이다." - 빌리 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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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홀머 거리에서 마음속에 활활 타올랐던 복합적인 역사의식을 다시금 차분하게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다리를 내려가 S-Bahn을 따라 조성된 한적한 공원길을 거닐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는 이 공원길과 한적한 주택가에 대해 저술하고자 한다..


태그:#베를린장벽길, #베를린,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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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독일에서 통신원 생활하고, 필리핀, 요르단에서 지내다 현재는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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