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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 축사 앞에 만들어놓은 눈사람.
 민박집 축사 앞에 만들어놓은 눈사람.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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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정취가 물씬 풍기는 황토 구들에서 자고 나니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오전 8시가 넘었는데도 홰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골은 시골이었다. 샤워하고 마당으로 나왔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무척 상쾌했다. 축사를 지키느라 고생하는 눈사람과 미소로 아침 인사를 나눴다.

낙안읍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에서도, 마을 돌담길에서도, 올망졸망한 초가지붕에서도 전통 한복과 춤사위에서 발견되는 '곡선의 미'가 느껴졌다. 전날 저녁에는 눈 쌓인 초가들이 흰 갓을 엎어놓은 것 같더니, 아침에는 꼬막 껍질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아침에는 뭘 먹을지 생각 끝에 얼큰하고 개운한 김치찌개를 맛보기로 아내와 의견을 모았다. 평소 맛깔스럽게 차려나오는 기사식당 백반을 좋아하는 아내는 소록도 가는 길에 고흥에 들러 먹자고 했다. 순간, 남도 특유의 감칠맛과 푸짐한 상차림이 눈앞에 그려졌다.

고흥읍 제2봉황교위의 고추장수 할머니들.
 고흥읍 제2봉황교위의 고추장수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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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 주인 내외와 작별인사를 하고 오전 9시 25분 낙안읍성을 출발했다. 순천만(여자만)과 보성만을 좌우로 끼고 육지 바깥으로 삐딱하게 뻗어 나간 고흥반도. 어금버금한 산봉우리들을 조망하면서 남도 끝자락 풍광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고흥읍. 시계는 9시 55분을 가리켰다.

자그만 읍 소재로, 각종 해산물 집산지인 고흥은 도로가 뒷골목처럼 비좁았다. 속담 '가는 날이 장날'이 떠올랐다. 마침 장날(4일, 9일)이었기 때문. 시장은 읍내를 가로지르는 개천을 끼고 있었다. 느낌이 평온한 고장. 고추장수 할머니들의 걸쭉한 남도 사투리는 판소리 추임새처럼 흥겹고 정겨웠다.

먹보처럼 먹는 아내,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 느껴

찌개백반 전문식당을 찾다가 생각을 바꿨다. 누추하고 작지만, 마음이 끌리는 설렁탕집을 발견해서였다. 아내도 좋다고 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니 침샘을 자극하는 구수한 양념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게 했다. '들어오긴 잘 들어왔구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자리를 잡고 앉아 설렁탕 두 그릇을 주문했다. 점심시간 전이어서 그런지 손님은 우리뿐. 그래도 아저씨가 "여그 괴기 겁나게 넣어가꼬 설렁탕 두~ 개요!" 하고 외치는 소리, 주방에서 "금방 나간당께라!"하고 대답하는 소리, 그릇 부딪치는 소리 등에서 생기가 돌았다.

국물이 걸쭉하면서 담백했던 설렁탕.
 국물이 걸쭉하면서 담백했던 설렁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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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음식상이 차려졌다. 국물이 우유처럼 뽀얀 설렁탕도 따라나왔다. 전통 보양식인 설렁탕은 소머리와 각종 뼈를 온종일 고아낸 국물에 머리고기 몇 점하고 대파를 송송 썰어 넣어 뚝배기에 담아내야 제격.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물을 한 수저 떠 넣으니 고소한 향미가 입안에 가득했다.

아내도 국물이 보기보다 톱톱하고 시원해서 좋다며 만족해했다. 평소 육식을 좋아하는 아내는 어느 부위 고기인지 맛이 독특하고 씹는 질감도 제대로 느껴진다면서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먹보처럼 우적우적 먹어대는 아내 모습에서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 느껴지기도.

돌아가신 어머니 떠오르게 했던 '넙덕지'

돌아가신 어머니 손맛을 떠오르게 했던 깍두기.
 돌아가신 어머니 손맛을 떠오르게 했던 깍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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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소하고 상큼한 봄동배추 겉절이
 고소하고 상큼한 봄동배추 겉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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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은 큼지막한 깍두기(넙덕지, 속박지)를 비롯해서 어묵무침, 시금치나물, 봄동 배추 겉절이, 미역줄기 무침 등 다섯 가지. 반찬이 모두 입에 맞았다. 그중 요즘이 제철인 시금치나물과 겨우내 눈밭에서 자라는 봄동 배추 겉절이는 고소하고 상큼해서 식욕을 돋워주었다.  

다섯 가지 반찬 중 예쁜 옹기단지에 담아내 온 '넙덕지'는 사각사각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옛날 그 맛이어서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손맛을 그립게 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해마다 담가주던 김치이고, 지금도 집에서 먹고 있어 친근감도 느껴졌다.

아내가 2년 전 김장할 때 담근 넙덕지.
 아내가 2년 전 김장할 때 담근 넙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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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는 김장할 때 볼품없이 투박하게 자른 무를 살짝 간해서 배추김치 항아리에 속박아 두었다가 겨울에 꺼내 먹는 김치를 '넙덕지', 혹은 '속박지'라 했다. 추운 날 누룽지나 찬밥을 끓여 먹을 때 장독에서 꺼내다가 젓가락에 끼워 한 입씩 베어 먹으면 사각사각 씹히는 맛이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옛날 넙덕지는 입을 크게 벌려야 베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두꺼웠다. 그러나 요즘엔 무가 재래종이 아니어서 그런지 두께도 크기도 작아졌다. 김치 이름이 해학적인데,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고 손바닥처럼 두터워서 사람의 엉덩이에 비유, '넙덕지'란 이름이 붙지 않았나 싶다.

예로부터 미식가들은 설렁탕의 생명은 고기보다 국물에 있고, 그 식당의 깍두기 맛을 보면 모두를 알 수 있다고 했다. 특히 큼지막한 깍두기를 곁들여야 제맛이라고 하는데, 걸쭉한 국물에 밥을 말아 보기에도 푸짐한 넙덕지와 함께 먹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식당을 나왔다.

덧붙이는 글 | 2012년 12월 28일~29일에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설렁탕, #넙덕지, #깍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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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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