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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군수는 국왕을 대신해 각 고을을 다스리는 목민관으로 지역 행정을 전적으로 담당했다. 그러나 실무는 지역 정보에 밝고 지식과 기능이 전문화된 육방이 담당했다. 육방 중 이방은 주로 행정, 호방은 재무, 예방은 교육, 병방은 군사, 형방은 사법, 공방은 산업을 관장했다. 특히 인사·서훈·고과(考課) 등을 담당하는 이방은 농간이 심했다고 한다.

변학도 '기생점고' 장면 떠올랐던 '이방네 집'

 이방네 집 사립문에서 바라본 안채
 이방네 집 사립문에서 바라본 안채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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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사적 제302호)을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가 조선 시대 이방이 살던 집에서 하룻밤 묵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계획에 없던 일이어서 더욱 흥미를 끌었다. 마당극 <춘향전>에서 남원 부사로 부임한 변학도가 '기생점고'를 받을 때 양 볼에 간신 수염을 붙인 이방이 비음 섞인 목소리로 기생들 이름을 호명하는 장면이 떠올라 웃음이 나오기도.

이방네 집(367평)은 안방에서 다듬이질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전통 조선식 가옥으로, 안채는 네 칸 규모의 초가였다. 좋은 재목을 구하기 어려운 지방에서 굵은 기둥에, 주춧돌은 산석(山石)을 사용했으며 댓돌이 높직해서 여유가 있어 보였다. 또한, 널문이 달린 부엌과 큰방·안마루·건넌방(작은 방)이 각 한 개씩이고 작은 툇간이 딸려있었다.

현재 거주하는 김도수(58)씨는 "이방네 집은 19세기 건물로 1979년 중요민속 문화재(제92호)로 지정됐다"고 귀띔했다. 그는 "민속마을 복원 과정에서 고을 사또(군수)를 보필하는 육방관속 중 이방이 살던 집만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낙안 민속마을에는 각기 다른 형태의 초가집 여덟 채가 이방네 집과 같은 시기에 중요민속 문화재로 지정됐다고 한다.

자연 친화의 심성이 느껴지는 조선 시대 ‘초가삼간’
 자연 친화의 심성이 느껴지는 조선 시대 ‘초가삼간’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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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집 짓는데 들어간 목재는 벌교 해안가에 있던 선소(船所)에서 운반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향토 사학자들은 본래 낙안군 치소는 현재의 보성군 벌교읍 고읍리에 있었으나 고려 때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한다"고 전했다. 그는 "5월에는 민속축제가, 10월에는 음식축제가 열리는데, 외국 관광객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민속마을 주민 생활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예전에는 300가구가 넘었으나 지금은 87가구가 살고 있고, 장터에서는 향토음식점 네 곳이 영업 중이라 한다. 민속마을 관람료의 60%는 순천시에서 가져가고, 40%는 주민 생활비로 지원해준단다. 음식점에서 나오는 집세는 민속마을 운영비로 사용하며 대학생 2명이 사는데, 1년에 보조금이 100만 원씩 나온다고 했다. 

김씨는 빙긋이 웃으면서 "녹봉도, 품계도 없던 지방의 아전(이방)이 집을 규모 있게 지어놓고 살았던 것을 보면 꽤 부자였던 모양"이라며 "탐관오리가 많았던 조선 후기에는 사또 이상으로 세도를 부리면서 재물도 더 모은 이방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현대인들에게 비친 이방의 이미지가 부정적이어서 그러한 추정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헌과 한참 떨어진 민가에 자리한 '옥사'

원형대로 복원했다는 옥사. 주변에 연지(늪)가 있어 죄수들의 탈주를 막았다고 한다.
 원형대로 복원했다는 옥사. 주변에 연지(늪)가 있어 죄수들의 탈주를 막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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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사 앞마당에 재현한 형틀과 아전, 나졸들
 옥사 앞마당에 재현한 형틀과 아전, 나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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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이 딸린 아래채에 숙소를 정하고 짐을 풀고 나오니까 김씨가 "돌담 너머로 보이는 기와집이 조선 시대 옥사(獄舍) 지붕"이라며 손으로 가리켰다. 호기심이 동하면서 내부 모습이 궁금했다. 죄수를 가두는 옥사는 고을 사또가 사무를 집행하는 동헌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참 떨어진 민가, 그것도 이방이 사는 집과 붙어 있다니 놀라웠다.

낙안읍성 옥사는 임경업 장군 비각에서 남문(쌍청문)으로 가는 돌담길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목을 움츠리게 하는 영하의 날씨에도 옥사 앞 물레방아는 계속 돌고 있었다. 진짜 농촌 같은 정겨운 풍경. 관광객을 위해 장식용으로 제작한 밀랍인형이지만 삼지창을 쥐어 잡고 보초를 서고 있는 나졸이 안쓰럽게 보였다.

옥사는 정면 5칸, 측변 3칸 규모(약 25평)의 우진각 지붕의 홑처마로, 좌측은 여름 옥사, 우측은 겨울 옥사로 설계도 있었다. 옥사를 둘러싼 담장도 2.5m로 주변 어느 돌담보다 높았다. 사옥이 관아와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해 김씨는 "낙안 고을에는 흉악범이 없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며 "내운 마을에도 사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고 부연했다.

옥사에는 칼을 쓴 남녀 죄수를, 앞마당에는 죄인을 심문하는 아전과 나졸, 형틀 등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놓아 실체적으로 느껴졌다. 장형을 선고받고 형틀에 묶여 집장사령에게 난장질 당하는 죄수의 모습이 그려졌다. 억울하다고 울부짖는 죄수와 그 가족들, 안타까운 표정으로 슬금슬금 엿보는 마을 사람들 모습도 상상이 됐다.

조선 초기 한양의 축소판 같은 낙안읍성

남문과 서문 사이 계단에서 바라본 낙안읍성
 남문과 서문 사이 계단에서 바라본 낙안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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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사 부근의 남문(쌍청루)에 올라 성곽을 따라 걸었다. 올망졸망 어깨를 겨루고 있는 초가들과 읍성을 둘러싼 금전산(670m) 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느 영화에서 본 듯한 고즈넉한 풍경. 시계가 200여 년 전, 낙안읍성에서 멈춰버린 느낌이랄까. 성곽이 도로처럼 길게 뻗어있고, 좌우로 초가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모습도 특이했다.

낙안군 행정을 담당했던 낙안읍성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축조됐으며 도시 구성이 조선 시대 한양(서울)과 비슷한 것으로 전해진다. 안내도를 보면 50년대 서울 지도와 흡사하다. 동문(東門)에서 서문(西門)으로 향하는 도로가 서울의 종로처럼 일직선에 가깝고, 우측(북쪽)에는 동헌과 객사 등 관아가 좌측(남쪽)에는 민가와 장터가 자리하고 있어서다. 

또한, 농사와 관련된 사계절을 상징하는 낙안읍성 성문들과 유교사상 인의예지(仁義禮智)가 한 글자씩 들어간 서울의 사대문은 뜻이 다름에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낙안읍성의 동문은 서울의 흥인지문(동대문), 서문은 돈의문(서대문), 남문은 숭례문(남대문), 호환(虎患)으로 폐쇄했다는 북문은 사람의 통행을 금지했던 북대문(숙정문)을 연상시켰다.

장터 난전에서 바라본 객사.
 장터 난전에서 바라본 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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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쪽으로 지리산, 서쪽으로 무등산과 연해 있고, 남으로는 남해바다 여자만(汝自灣)의 해풍을 받으며 낙안들이 펼쳐지는 낙안읍성은 산세도 조선 초기(1392) 서울과 비슷했다. 같은 분지형 도시에 진산(鎭山)인 금전산은 서울의 북악산을, 동쪽의 오봉산은 낙산을, 서쪽의 백이산은 인왕산을, 남쪽의 제석산은 남산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

순천시가 발행한 <樂安邑城>(송갑득 편저)은 낙안의 지명 유래를 낙토민안(樂土民安), 관악민안(官樂民安)으로 표현했다. 땅이 기름지니 해마다 풍년이요, 먹을 것이 넉넉하니 굶는 백성이 없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다. 이에 부족함이 없으니 송사(訟事)가 없고, 관(官)도 정치를 잘할 수밖에 없다는 것. 관과 백성이 더불어 즐겁고 편안하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날이 어두워져 불빛이 비치기 시작하는 낙안읍성.
 날이 어두워져 불빛이 비치기 시작하는 낙안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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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초가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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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으로 불리는 낙추문(樂秋門)에 당도하니 서쪽 하늘이 검붉은 색으로 변하면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눈 쌓인 민속마을 초가들이 흰 갓을 엎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초가집 창호지 문으로 하나씩 새어나오기 시작하는 불빛과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무척 고즈넉했다.

50여 년 만에 대하는 정감 넘치는 풍경,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현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보름달이 제석산 위로 떠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달맞이도 하면서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경(情景)에 흠뻑 젖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뿐, 길이 미끄럽고 어두워져 내려와야 했다. 아내와 함께 아쉬움을 달래며 장터 식당에서 순두부백반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방네 집 아래채 방은 한 평 남짓 크기로 작았지만 잔잔한 흥취도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방바닥이 피로를 푸는 자연 황토방처럼 느껴졌다. 농촌이 고향인 아내도 은은하게 풍기는 흙냄새가 좋은 모양이었다. 대화는 밤이 깊도록 이어지고, 자정쯤 됐을까. 수탁 홰치는 소리가 고요를 깨면서 눈 내린 겨울밤의 운치를 더해줬다.

하룻밤 묵었던 이방네 집 아래채 전경.
 하룻밤 묵었던 이방네 집 아래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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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지난 2012년 12월 28일~29일에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낙안읍성, #이방네집,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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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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