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미자 노래가 뭐가 좋아요?"라고 물으면 어머니는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너희가 듣는 노래는 싱거워서 못 들어! 나무 두드리는 소리 같다. 구성지고 한스러운 노래가 진짜 노래지. 이미자가 있어서 다행이야. '여자의 일생' 같은 노래를 듣고 참으면서 네 아버지랑 사는 거다. 그마저 없었으면 집을 나가도 수백 번은 나갔을 거다"

나의 어머니만 그랬겠는가. 그 시절의 가부장제에 봉사한 모든 어머니들이 이미자 노래를 위안 삼아 이지러진 삶의 여정을 끈질기게 밟아갔다. 대중음악의 가장 큰 역할이 대중을 위로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이미자의 노래만큼 역할에 충실한 음악은 없을 것이다. 이것하나만으로도 이미자는 한국의 최고 가수다. - <가수를 말하다>에서

<가수를 말하다> 겉표지
 <가수를 말하다> 겉표지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가수를 말하다>(임진모 씀, 빅하우스 펴냄)는 이미자, 신중현, 조용필, 김광석, 배호, 정태춘, 트윈폴리오, 양희은, 이장희 등 우리 대중 가요사에 굵은 획을 그은 가수 41명과 그들이 부른 노래 이야기다.

첫 번째 주인공 이미자 편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비로소 어린 시절 우리 동네 아줌마들이 왜 그렇게 이미자의 노래를 좋아했던가가 조금은 짐작이 됐다. 삼십여 년이나 지난 지금 말이다.

지금은 열댓 가구만 남은 한적한 시골마을이지만, 내가 아동기를 보낼 무렵엔 오십 가구도 넘어 꽤 사람 사는 맛이 나는 그런 동네였다.

내가 열 살 쯤 이었던 1970년대 중반, 우리 동네에  TV는 네댓 집 정도에 있었고, 라디오조차 없는 집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미자의 새로운 노래가 나오면 머잖아 동네 아줌마들의 단체곡이 되곤 할 만큼 이미자의 인기는 높았다.

이미자 노래를 따라 부르는 동네 아저씨들은 없었다. 아저씨들은 대개 이미자의 노래가 나오면 "목소리가 참 좋다"거나 "노래 한 번 애간장 녹이게 참 잘 부른다"고 숨죽이며 듣곤 했다. 이미자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은 대개 동네 아줌마들이었다. 들일을 하거나 설거지, 동네 잔치음식을 하면서도 아줌마들은 이미자 노래를 부르곤 했다.

동네 아줌마들은 왜 그렇게 이미자에 열광했을까?

동네 아줌마들이 다른 가수들의 노래도 불렀을 텐데, 이미자의 노래를 워낙 많이 불렀기 때문인지 당시를 회상하며 글을 쓰는 지금 귓가에 <여자의 일생>이란 곡은 물론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등 다른 노래들의 가사 부분 부분들이 아련하게 스치는 듯하다. 이미자의 노래를 부르는 동네 아줌마들의 젊었을 때의 모습들과 함께.

<서울 대중가요-서울을 노래하다>(청계천 문화관. 2010.4.17~5.23)에서 만난 이미자
 <서울 대중가요-서울을 노래하다>(청계천 문화관. 2010.4.17~5.23)에서 만난 이미자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이미자가 죽으면 목소리 연구를 하려고 일본이 벌써 계약했다며?"
"백년에 한 명 날까 말까한 목소리라네. 그래서 목(성대)만 박물관에 보존한다지 아마?"
"보험인가 뭔가. 목이 다치면 보상 받는 그런 것도 들었다지 아마?"

이미자 노래를 부르고 난 후라든가, TV나 라디오에서 이미자가 나와 노래를 부르고 나면 동네 사람들은 이와 비슷한 이야길 주고받곤 했다. 어제 그제 한 이야길 오늘 또 해도 수긍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이미자의 인기는 한참동안 변함이 없었다. 여하간 내가 '가수'라는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이미자에 대한 동네 어른들의 관심과 애정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친정 엄마는 지금도 가끔 내가 어렸을 때 들일 집안일을 하며 불렀던 이미자 노래들을 부르시곤 한다. '우리 엄마는 아마도 이미자 노래밖에 아는 노래가 없나 보다'란 생각까지 들 정도로. 가끔 이미자를 노래나 기사 등으로 만나게 되면 옛날 생각과 함께 '그 시절 우리 엄마나 동네 아줌마들은 왜 이미자의 노래를 그토록 좋아 했을까' 궁금해지곤 했던 <가수를 말하다> 이미자 편을 관심있게 읽었다.

그렇게 긴장감 도는 무서운 신경전은 없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라이벌전이 한창일 당시 직장과 모임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집안 식구들마저 남진 편, 나훈아 편으로 나뉘어 신경전을 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들도 어른으로부터 "넌 남진이냐? 나훈 아냐?"라는 선택을 강요받을 정도였으니까. 과장하면 남진과 나훈아, 네 편과 내 편으로 나라가 두 동강난 듯했다. 당시 연예의 흐름을 주도한 주간지들은 온통 두 가수를 비교하는 특집기사로 도배되었다.

1972년 TV <쇼쇼쇼>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했을 때 진행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인사를 나누던 모습이 얼마나 어색했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일주일 시간차를 두고 공연했을 때 양측이 더 높은 열기를 과시하기 위해 살벌한 경쟁을 벌였던 것도 잊을 수 없다.  - <가수를 말하다>)에서

'전국을 삼킨 라이벌 남진과 나훈아'도 어린 시절의 동네 사람들을 떠올리며 읽은 글 중 하나다.

이미자의 노래를 아줌마들이 주로 불렀다면, 아저씨들은 남진과 나훈아 노래를 주로 따라 부르거나 흉내내곤 했다. 아주 가끔 동네 공터나 골목에서 놀고 있는 우리들 중 누군가를 붙잡고 대뜸 "넌 남진이가 좋냐? 나훈아가 좋냐? 누가 더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 하냐? 남진편이냐? 나훈아 편이냐?"고 묻는 어른들이 있어서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동네 아저씨의 느닷없는 질문과 은근하게 선택을 강요하는 다그침에 놀라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까지 있었다. 어린 마음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이미자, 남진, 나훈아에 대한 어른들의 전폭적인 사랑과 열풍을 당시의 그 어른들 나이가 되어 책을 통해 만나는 재미를 어떻게 표현해야 제대로 전달이 될까. 아마도 <가수를 말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나와 비슷한 추억이 있어서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웃음 짓는 사람들도 많으리라.

<서울 대중가요-서울을 노래하다>(청계천 문화관. 2010.4.17~5.23)에서 만난 조용필
 <서울 대중가요-서울을 노래하다>(청계천 문화관. 2010.4.17~5.23)에서 만난 조용필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서울 대중가요-서울을 노래하다>(청계천 문화관. 2010.4.17~5.23)에서 만난 배호 등.
 <서울 대중가요-서울을 노래하다>(청계천 문화관. 2010.4.17~5.23)에서 만난 배호 등.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그가 기억하는 탄압의 시작은 1972년. 유신정권 출범 직전이다. 그에게 청와대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로운 통치를 내용으로 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신중현은 "왜 하필 나에게 그런 주문을 하느냐"고는 정중하게 요청을 거절했다. 이후 괘씸죄에 걸린 그는 공연마다 단속을 당했고 끝내는 대마초 괴수로 지목되고 만 것이다. 1980년대 활동을 재개했지만, 그의 시대는 어느덧 훌쩍 지나갔고 한번 떠난 대중들의 관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인기는 갔어도 위상은 갈수록 상승했다. 1990년대 중후반에 '미인'과 '님은 먼 곳에' 등 그가 쓴 곡들이 봄여름가을겨울, 조관우, 장사익 등 후대 뮤지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면서 신중현 재조명 열풍이 불었다. - <가수를 말하다>에서

'박정희 찬가'를 만들어 달라는데 거절해 소리 소문 없는 탄압을 받았다는 신중현 편의 이런 부분도 눈에 띈다.

<가수를 말하다>의 저자는 지난 20여 년간 우리 대중가요, 즉 어떤 노래나 어떤 가수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할 때 TV나 신문, 잡지 등을 통해 그 '무엇인가'를 말해줬던 사람들 중 한사람인 음악평론가 임진모씨. 때문에 아마도 우리 가요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낯설지 않을 저자는 1960년대 초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주로 활동을 했던, 지난 반세기 주옥같은 노래들로 우리들을 위로하고 열광하게 했던 우리 대중 가수들과 그들이 부른 노래에 얽힌 사연들을 5부로 나눠 들려준다.

책 뒷 표지에 몇 사람의 추천사가 실려 있는데 "이 책은 다큐멘터리이자 드라마다"란 추천사도 보인다. 이 표현에 공감한다. 책을 통해 우리 부모님 세대가 좋아했고, 내가 한때 심취했었으며, 지금도 좋아하는 가수들과 그들이 부른 노래에 얽힌 사연들을 접하는 동안 가끔 TV프로그램 인물 다큐를 보는 듯 지난날 TV를 통해 만났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내가 읽는 글들이 내레이션처럼 스며들곤 했기 때문이다.

대중가요는 그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가 없어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대중문화다. 대중가요는 그 시대를 깊게 반영한다. 이런 점에서 지난날 어떤 노래들이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노래를 부른 가수에게 어떤 영광을 있었는지 등을 정리한 <가수를 말하다>는 의미 있고 중요한 책이다.

덧붙이는 글 | <가수를 말하다>ㅣ임진모 씀ㅣ빅하우스 펴냄ㅣ2010-10-20ㅣ15000원



가수를 말하다 - 영혼으로 노래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가수 41

임진모 지음, 빅하우스(2012)


태그:#대중가요, #이미자, #남진, #나훈아, #유행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