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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동구 배다리에서 아벨서점을 운영하는 곽현숙 대표는 지난해 원주 박경리문학공원(대표 고창영)을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 선생이 배다리에서 헌책방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는 것. 박경리 선생의 외동딸인 김영주 토지문학관 이사장이 직접 들려준 이야기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곽 대표는 흥분과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 후, 고창영 대표가 배다리를 찾았고 곽 대표는 주변 일대를 5~6시간에 걸쳐 직접 안내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지난 3일, 박경리문학공원 '소설 토지학교' 10기 수강생 30여 명이 아벨서점을 찾았다. 곽 대표는 아벨전시관 '배다리 시가 있는 작은 책길' 2층에서 이들을 맞이하는 행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는 인천문인협회 김학균 시인과 이성진 향토연구가가 참석해 참가자들에게 옛 배다리의 상황을 설명했다.

인천에서 보낸 2년,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

박경리 선생이 인천 금곡동에 살던 시절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경리 선생, 남편 김행도씨, 친정어머니, 그리고 맨 아래 치마를 입은이는 딸 김영주씨다.
▲ 박경리 가족사진 박경리 선생이 인천 금곡동에 살던 시절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경리 선생, 남편 김행도씨, 친정어머니, 그리고 맨 아래 치마를 입은이는 딸 김영주씨다.
ⓒ 곽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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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은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랑생활을 하며 여러 곳에 가정을 꾸려 그는 홀어미나 다름없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반향 정신의 소산'이란 글에서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고 썼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김행도씨와 결혼해 1948년 초부터 이듬해 말까지 인천 동구 금곡동 59번지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이곳은 현재 61번지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박 선생 남편 김행도씨는 일본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당시로선 보기 드문 인텔리였다. 김씨가 주안염전에서 관리직으로 일하게 되면서 인천에 살 곳을 마련했다. 박 선생은 훗날, 이곳에서 2년 가까이 생활한 것을 두고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책에 대한 열정으로 헌책방 시작했을 터

박 선생이 헌책방을 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당시 인천에는 성냥공장과 제분회사, 방직 공장 등이 모여 있어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배가 오가는 곳이라 사람도 많고, 오고 가는 물자도 많았다. 게다가 해방 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남기고 간 물건 중에는 책도 많았다. 이 책들이 고물로 쏟아져 나오면서 당시 배다리 근방에는 헌책방 시장이 형성됐다. 일본어에 능했던 박 선생의 눈에 책이 예사롭게 보일 리 없었다.

곽 대표는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에 나온 책은 거칠거칠한 마분지에 인쇄된 것이 많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박 선생은 책을 워낙 좋아해 수업도 빠져가며 읽었다고 한다, 그런 선생이 고물상에 폐지로 쌓여 있는 책을 보고 얼마나 흥분하셨을까? 사고 또 사도 계속 들어오는 책을 감당하지 못해 아예 작은 헌책방을 낸 것은 아닌가, 상상해본다"고 했다.

이성진 향토연구가는 "박 선생이 책을 팔기 위해 헌책방을 한 것은 아닐 것"이라며 "필요한 이에게 책을 전달하기 위한 장소였을 것이다, 박 선생도 그곳에서 책을 읽으며 문학적 토양을 일궜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했다.

곽 대표는 40여 년 동안 헌책방을 운영한 자신을 빗대 이야기를 전했다.

"헌책방을 운영한다는 것은 고된 일이다. 무거운 책을 옮기고 정리하는 노동을 해야 하고 사람도 끊임없이 만나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책에 대한 열정으로 책 장사를 선택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고급 관료의 아내로서 책과 함께 한 행복한 나날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일제가 물러간 뒤, 노동자들 사이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남편 김행도씨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사상과 이념 논쟁의 폭풍 속에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고, 그 후 강원도에서 사망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박 선생은 1956년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으로 등단했다. 그는 인천에서의 삶에 대해 공개석상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곽 대표는 "아마 남편과 관련한 일 때문이 아닐까 싶다"고 추측했다.

인천 동구, 한옥 개조해 '박경리 북카페' 운영할 계획

 박경리문학공원 '토지학교' 10기 수강생들이 배다리 아벨서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토지학교 수강생 박경리문학공원 '토지학교' 10기 수강생들이 배다리 아벨서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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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곽 대표를 통해 박경리 선생이 배다리에서 헌책방을 운영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지역이 술렁이고 있다. 동구청에서는 박경리 선생이 살았던 미음(ㅁ)자 모양의 집터와 유사한 빈 집 한 채를 개조해 내년 3월 무렵 '박경리 북카페'를 운영할 계획임을 밝혔다.

현재 금창동과 금곡동 일대는 오래된 좁은 골목 사이로 낮은 집이 이어져 있는 곳이 많다. 박 선생이 살았던 시절의 언덕과 길이 그대로 남아 있어, 박 선생이 집에서 헌책방(중앙시장 일대로 추측)까지 오간 길이 어디인지 상상해볼 수도 있다.

곽 대표는 "박경리 선생은 우리에겐 큰 선물이다, 이이야기를 발굴해낸 것도 바로 우리 헌책방(아벨서점)이다, 책방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감격적인 사건"이라며 "이곳이 관광지로 개발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박경리 선생의 자취가 부디 잘 계승돼 지역 사람들이 문화적인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지역에 애착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이곳을 찾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박경리, #배다리 헌책방, #아벨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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