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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중 삼중의 폭력에 둘러싸여 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청소년의 심리묘사가 잘 표현된 소설 '맨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청소년의 심리묘사가 잘 표현된 소설 '맨홀'
ⓒ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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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크고 작은 폭력을 경험한다. 매를 맞거나 멱살을 잡히는 물리적인 폭력도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폭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폭력을 당한 사람은 마침내 극복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몸 안에 폭력의 자국이 남아 있다. 폭력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몸소 경험한 바 있다. 두 살, 네 살배기 아들을 같은 어린이집에 보내는데, 형이 동생을 때리는 강도와 방식이 심해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심지어 작은 아이까지 아빠를 때리거나 미는 모습을 보였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형뻘의 아이가 큰애를 좀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어린아이들도 받은 폭력을 대물림한다.

그것이 사회적 폭력일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최근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묻지마 폭력'과 '묻지마 살인'은 폭력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말해준다. 가정에서의 폭력은 또 어떤가? 가정은 사람의 인격이 형성되고 고양되는 공간이다. 가정에서 만들어진 습관은 사회에서 그대로 쓰이기 쉽다. 성희롱이나 인종 차별 같은 행위는 가정과 사회에서 방임되었거나 길러졌을 때 생긴다.

박지리의 장편소설 <맨홀>은 가정폭력에 시달린 미성년자인 소년이 오래 삭힌 분노를 배출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대물림해 살인을 하게 되는 과정을 날카로운 심리묘사로 표현한 소설이다. 특히 우리 가정과 사회에 퍼져 있는 폭력의 구조를 심층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나는 <맨홀>에서 적어도 세 가지의 폭력을 보았다. 표면화된 폭력과 내면화된 폭력, 그리고 반복된 폭력이다. 즉, 아버지의 폭력이라는 표면화된 폭력과 엄마와 누나에게 받은 내면화된 폭력, 그리고 신분이 불완전한 약자인 '파키'들에게 대물림하는 폭력이 '맨홀' 안에 담겨 있다. 아버지는 소방직 공무원이며 상습적인 가정폭력을 일삼고 가족을 감시하기 때문에 '괴물'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런 아버지가 10명의 목숨을 구하고 순직하면서 이야기는 엇나가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죽었지만 폭력은 계속된다.

엄마는 아버지의 폭력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아이들을 챙길 여력이 없었던 것일까?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아버지'이다. 주인공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누나는 아버지로부터 달아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어느새 동생의 손을 놓쳐 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동생을 맨홀에 버려두고 혼자 살아남은 것이다. 이런 가족들의 모습은 주인공에게 이중 삼중의 폭력이 되었다. 주인공이 지독히 외로워 보였다. 주인공이 누나와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외국인노동자를 죽이게 된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맨홀>의 맨홀에 주목한 독자들

<맨홀>을 읽은 페이스북 친구들은 꽤 인상적이었다는 평가다. 성동식씨는 "흡입력도 강하고 여러모로 이야기 나눌 부분이 많은 책"이라고 호평했다. 구유리씨는 "심리묘사가 너무 적나라해서 읽는 동안 많이 움찔거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청소년의 심리묘사가 마음 아프게도 잘 표현된 소설"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특히 작품의 제목인 '맨홀'이 많은 관심을 끌었다. 상징적인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장재호씨는 '지상세계에 오만 가지 오수와 찌꺼기가 흘러 들어오는 구멍이며 세상의 추함과 더러움이 빗물과 함께 흘러들어오는 흡입구이자 배출구'라고 담담히 정리했는데, 이 말에 소설을 잘 정리해주는 듯했다.

큰 비가 내릴 때면 나무들은 비바람에 시달린다. 자갈돌과 모래, 풀잎들도 그렇고 빵봉투 같은 쓰레기도 이리저리 휘감긴다. 하지만 큰 비와 쓰레기, 흙더미 등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는 것은 '맨홀'이다. 가장 마지막까지 비의 흔적이 남아 있고,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맨홀. 아버지의 폭력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엄마와 감시견 역할을 하며 시달려야 했던 누나, 그리고 표면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았던 주인공이 폭력의 가장 큰 희생자가 되었다.

김영헌씨는 '맨홀'을 다르게 해석했다.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맨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맨홀을 가지고 있으며 맨홀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소설에서처럼 맨홀은 언젠가는 자신이 감춰뒀던 치부를 온천하에 드러낼 운명을 가지고 있다.

김성은씨는 사회문제와 관련해서 맨홀을 해석했다. 얼마 전 초등학교에 난입해서 야전삽으로 아이들을 때린 아이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자신은 그저 까만 어둠 속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쓰레기 맨홀이라는 걸 아마 그 아이도 알겠죠"라는 말을 들으며 내 마음속의 맨홀과 내 주변에 있는 맨홀들이 만져지는 것 같았다. 박정민씨는 맨홀과 아버지, 그리고 괴물을 연결해서 생각했다. "그렇게도 싫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어느새 자신에게 투영되어 안식처인 맨홀 주변을 맴도는 괴물을 창조했다는 대목에서 마음이 짠했다"고 말했다.

<맨홀>이라는 작품의 주요한 사건을 가지고 글을 써봤지만, 1985년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완성도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각 에피소드를 절묘하게 삽입한 전형적인 액자식 구성인 형식의 치밀함은 작품의 극적 효과를 높여 주었다. 소년원에서의 상담 장면과 장례식장에서의 모습, 법정에서의 모습, 순간적으로 사랑이 배신으로 바뀌었던 인간의 나약함 등 폭력의 전체 모습을 포착하기라도 할 것 같았던 작가의 야심에 혀를 내두른다.

<맨홀>이 남다른 작품처럼 다가왔던 까닭은 우리 사회와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잘 그려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폭력의 경험을 안고 있던 유년 시절을 자극해줬기 때문만도 아니다. 마치 우리 사회를 삼켜 버린 것 같은 이 폭력의 공기와 이를 의식하지 못한 채 나날이 폭력을 재생산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한심해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아이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물어보고 싶다. 무엇이 가장 아팠느냐고.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소셜북스(https://www.facebook.com/socialbook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맨홀

박지리 지음, 사계절(2012)


태그:#박지리, #맨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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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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