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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에 선보일 금강산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박기수 화백
 전시회에 선보일 금강산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박기수 화백
ⓒ 정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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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어느덧 깊숙이 우리들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 왔다. 가로수는 숱한 밤을 함께 보냈던 잎새들과 이별을 하며 다가올 엄동설한을 준비한다. 바람결에 몸을 맡기며 이별의 손을 흔들었던 잎새들은 아픔으로 제 몸을 바삭바삭 말리며 부서져 흩어져 간다. 이 계절에 찜통 같았던 지난 여름내내 자신의 생명불꽃을 태워가며 혼신의 힘으로 작품을 만든 어느 작가의 '渡美 告別展'이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서양화가 박기수

내가 그를 만난 것은 16년전 9월 초 영등포역 근처였다. 청바지와 장발 그리고 배낭을 멘 그는 인천행 지하철 막차를 놓치고 서울-인천을 오가는 장거리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만났다. 당시 나는 약간의 취기와 객기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냉소적일 때였다. 내 눈에 들어온 그는 안광이 빛나고 이마에 외고집이 강한 인상을 풍겼다.

나는 대뜸 그에게 반말로 "너는 화가 같은데 왜 이리 늦게 다녀?"라고 했다. 그는 초면인 내가 반말로 하자 싱긋 웃으며 "나보다 나이가 아래인 것 같은데 왜 반말인가?"라고 점잖게 말했다. 마침 그때 인천행 버스가 정류장을 들어서고 우린 그 버스에 올라타 때아닌 시시비비를 가려야 했다. 우리는 급기야 "민증까서 확인해보자. 나보다 위면 생맥주 한잔 사겠다"며 서로의 주민등록증을 확인해보니 그는 나보다 10살이나 위였다.

우리는 부천에서 내려 그가 단골인 생맥주 집에서 술잔을 기우리며 인연을 맺은 후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서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교분을 쌓았다. 그는 국내에서 최초로 산을 소재로 삼아 서양화를 그리는 작가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깐 미술선생으로 교편을 잡았으나 작가로서의 길에 목숨을 걸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사람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개인전 20여회와 미국 뉴욕, 홍콩, 중국 등에 초청되어 해외 아트페어에 꾸준히 그의 이름과 작품세계를 알려온 한국의 대표적인 중진작가이며, 작가들이 인정하는 산분야의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한 화가이다.

인고의 시간뒤에 탄생하는 그의 작품 세계

산그림만을 그리던 박기수 화백의 작품 중에 드물게 단풍 든 자작나무숲을 그렸다.
 산그림만을 그리던 박기수 화백의 작품 중에 드물게 단풍 든 자작나무숲을 그렸다.
ⓒ 정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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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과거 대작들은 점묘화적인 풍으로 물감을 화폭에 찍어서 형상을 만들었다. 그의 그림이 사실은 지극히 실물적인 그림이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되다보니 추상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의 작품은 물감을 계속해서 덧칠하는 작업을 거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덧칠하는 과정속에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되며 그 이미지속으로 작가의 사상과 생각이 투영되며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원초적인 삶, 생명, 희노애락, 희망 그리고 꿈이다. 그는 벌써 이순을 한참 넘긴 나이지만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마음가짐이 차분하며 늘 긍정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다.

그에게는 아들과 딸이 각각 1명씩 있다. 작품활동에 빠진 그는 생활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생활과 아이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인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이제는 자녀들이 성장하여 학업을 마치고 사회인으로 입지했지만 그동안의 고충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40대와 50대를 거의 작품활동을 하기 위해 산속에서 보냈다. 마땅히 받아줄 곳이나 거처가 있어서 산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산을 그려야겠다는 불타는 예술혼과 젊음이라는 열정으로 버틴 것이다.

산은 그에게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존재였다. 늘 그를 포근하게 품어주고 다독여주고 보살폈다. 가끔씩 도시로 내려올 때도 그는 두고온 산을 그리워했다. 자신이 있을 곳이 도시가 아니고 산이라며 돌아가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국내의 모든 산들을 직접 답사하며 그 속살을 들여다보며 함께 살기도 했다. 또한 외국의 유명한 산들을 여행하며 스케치하며 그의 화폭 속에서 새로운 형상으로 탄생시켜왔다.

산은 때로는 부드럽지만 때로는 엄하게 그를 나무랐다. 산은 그에게 "서두르지 말아라. 천년고송의 발아래 쌓이며 썩어가는 부엽토처럼 켜켜이 너의 인생이 쌓여 우러난 맑은 샘물만이 그 갈증을 해갈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작품에 대한 끝없는 그의 갈증은 30여 년 동안의 작품 활동으로도 해갈되지 못했다.

山이 나를 보고 내가 山을 보니

산의 형세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듯이 정겹다. 어우러진 산들의 형상에서 작가는 세상살이의 근본적인 삶의 철학인 조화와 배려를 이야기하고 있다.
▲ 산 산의 형세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듯이 정겹다. 어우러진 산들의 형상에서 작가는 세상살이의 근본적인 삶의 철학인 조화와 배려를 이야기하고 있다.
ⓒ 정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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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산을 바라보는 관점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산을 본다"라는 관점이다. 그저 산이 좋아 산을 찾았고 산을 보고 산을 그렸다. 그 산을 자신의 화폭에다 옮겨 놓기를 원했다. 자신의 붓아래 새로운 형상이 만들어 질 것만 같았다. 당시의 산은 그에게 넘볼 수 없는 외경스러움이었다. 젊음과 열정 그리고 예술혼이라는 칼로서 넘어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손에 굳은 살이 박히고 터져서 피가 날정도로 산과의 대립과정이 있었다.

당시의 그의 산은 많은 조각과 점들로 이루어져 하나의 거대한 자연을 표현하고 있다. 어떤 작품들은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과 욕심으로 매우 무섭고 어두운 산으로 표현되기도 했으며, 어떤 작품은 一刀兩斷의 기백으로 그려내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당할 만큼의 기운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후 그는 "산속에서 산을 본다"라는 관점으로 진일보한다. 그가 집을 떠나 산속에서 생활하면서 터득한 새로운 관점이며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그는 그속에 또 다른 산이 존재함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그가 그리고자 했던 것이 산의 형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게된다. 산속에서 그는 산이 갖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의 조화로운 삶과 어울림을 보았다. 산의 일부이되 전부일 수 있는 그 작은 생명들의 울림을 그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 때부터 그의 작품세계의 관점이 산과의 어울림이 되었다.

그 속에서 세상이 삶과 희노애락이 표현되었으며 다양한 작품세계가 열린 것이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었던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했다. 다소의 파격의 시도도 거침없이 그의 화폭속으로 녹아들었다. 이시기의 그의 작품세계는 다양한 소재들을 표현하고 있다. 가로수길, 연꽃, 소나무, 꽃 등 산 이외에도 다양한 작품들이 탄생되었다.

왕성한 작가정신은 끊임없이 작품을 쏟아냈으며 수많은 작품과 전시회로 그는 세상에 '산을 그리는 서양화가 박기수'로 입지된 것이다. 아마도 1년에 2~3회의 개인전을 이 시기에 열었다.

"새로운 항해를 위해 닻을 올리다"

이런 다작의 시기를 지나 그는 "산속에서 나를 본다"라는 관점으로 옮겨간다. 산은 그에게는 고향과 같은 곳이다. 무수히 많이 그 산을 뿌리치고 나왔었지만 그는 다시 산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그는 산속을 드나드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가 두고 온 도시의 흔적들과도 상면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니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일어서야겠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새로운 도전일 수 있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 모든 허망함과 세상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찾아야 하는 파라다이스를 향해서 새로운 항해를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예전 프랑스의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처럼 현대예술인들이 자신의 세계를 찾기 위해 모여드는 미국 뉴욕을 향해 희망의 닻을 올린 것이다. 이번 '渡美告別展'은 그의 작품세계를 사랑했던 고국의 미술애호가들에게 올리는 그의 인사이다.

서로를 배려한 조화로운 삶

이번에 선을 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인생을 관조한 작가의 정신세계가 온전히 표현된 수작들이 대부분이다. 표현기법도 다양해지고 자연과의 부드러운 조화가 잘 표현된 작품들이다. 그의 산들은 말한다. "이제는 주변과 어울어져 행복하세요" 라고 말한다. 그가 표현한 산들은 때로는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가 어깨를 좁혀 서로를 끌어안아주기도 하며 서로에게 행복의 생명수를 권하기도 한다.

또한 그가 산속에서 들여다본 또 다른 산들인 형상들도 서로 배려하며 미소를 던진다. 산과 구름, 바다와 암벽들, 꽃과 나무들도 서로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고 조화를 우선한다. 하늘이 열리고 파도는 잔잔한 숨소리를 뱉어놓는다. 나뭇잎은 단풍이 든 채로 그늘을 만들고, 검은 암벽들은 그에게로 와서 따뜻한 형상으로 다소곳이 앉아 있다. 백두산 천지는 5000만의 염원을 담고 갈증난 우리에게 맑은 청청수를 권하고 있다.

아득한 암벽위에 처절한 생명력을 이어가는 노송도는 우리에게 욕심과 열정마저 내려놓고 평온을 찾으라고 권하고 있다. 장대한 폭포와 웅장한 금강산의 만물상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대자연속에서 얼마나 미미한 것인지 알려주려 한다. 서로가 서로의 변을 맞대어 있는 수천개의 다랑이 논처럼 각박하고 혼탁한 세상이지만 희망을 갖고 행복하려면 서로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서양화가 박기수는 산그림만 30여년을 그려온 한국의 중진작가로 이번 도미고별전을 마치고 미국에서 새로운 그림인생을 개척하고자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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