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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공약이라는 것은 언제나 소수 전문가의 손을 거쳐 만들어져왔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에 많은 영향을 미칠 공약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정작 시민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괄수가제, 영리병원, 의료보험 보장성 등 굵직한 이슈가 가득했던 한 해였지만, 여전히 시민의 목소리는 듣기 힘들다. 이에 보건의료분야의 대표적 시민단체인 건강세상네트워크와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시민들이 함께 모여 직접 건강공약을 개발해볼 것을 제안한다. 앞으로 두 차례에 걸쳐 시민이 정책 형성과정에 참여한 다양한 사례, 그리고 시민이 참여하는 건강공약 개발의 필요성을 싣고자 한다. 그 다음은, 시민이 목소리를 높일 차례이다. [편집자말]
"평범한 시민들이 일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책을 논한다!"

이제는 이상이 아닌 현실이 되어버린 이야기이다. 1989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Porto Alegre)에서 시민참여예산제를 도입한 이래 지구촌 곳곳에서는 지역주민들이 직접 내가 사는 지역의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주민은 공청회의 대상이 아니라 논의 안건의 제안자, 그리고 심의자가 된다.

시민들이 참여하는 방식이나 다루는 주제의 범위도 다양하다. 브라질 사례처럼 시민들이 직접 의제를 제안하는 방식부터, 소수의 시민들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주어진 의제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전개해가는 방식 등 다양한 유형의 시민참여 모델이 있다. 다음에서는 이 중 심의 과정이 강조된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TV 드라마 <골든타임>을 보면 어린이 유괴범과 그를 쫓던 경찰이 동시에 응급실에 들어오는데 둘 중 누구를 먼저 수술해야 할지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둘 다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한 사람은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소생 가능성이 없고, 다른 한 사람은 또 다른 치료법으로 시간을 끌어볼 수 있는 환자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 희망을 걸고 시도해본 다른 치료법이 효과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수술 전 사망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전자가 유괴범이고 후자가 이를 쫓던 경찰이라는 것이다. 누굴 먼저 수술실로 데려가겠는가? 드라마에서 집도 의사는 두 환자 중 수술이 아니면 죽을 확률이 더 높은 이를 치료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결과 유괴범은 살아나고 경찰은 사망했다. 참고로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인턴은 두 생명의 가치를 비교하며 경찰을 먼저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괴범과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의 아버지인 경찰, 두 생명의 가치를.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시민위원회, 보건의료자원배분의 우선순위를 논하다

보건의료와 관련된 의사결정을 할 때에는 이런 윤리적 딜레마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특히 개별 환자에 대한 치료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조성된 공적 자금을 이용하여 보건의료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하는 경우에는 예산의 합리적 사용이라는 조건을 함께 고려하게 된다.

한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나,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건강결과가 미미하다면 공영보험에서 그 비용을 지원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그 예산을 보다 많은 환자의 건강을 증진하는 프로그램으로 돌려야 하는가? 이는 우리나라 건강보험에서도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의사결정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결정은 대부분 전문가들(관료 포함)이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2002년 영국은 좀 색다른 선택을 하였다. 올림픽 개막식을 통해서도 볼 수 있었듯 영국은 국가가 보건의료서비스의 공급을 책임지는 국가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이하 NHS) 체계를 채택하고 있다. NHS는 국가가 직접 자원할당의 책임을 지므로 자원배분의 형평성, 효율성, 공정성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편이다.

2002년에는 NHS 산하기관인 영국 국립보건임상연구원(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and Clinical Excellence, 이하 NICE)에서 시민위원회(citizen council)를 소집하였는데, 이 위원회는 중요한 자원배분이슈에 대해 논의하고 시민의 관점을 제시하기 위해 구성된 기구이다. 시민위원회는 영국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을 대표하는 30명의 일반시민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이 지역의 인구분포를 반영하여 선정된 보통시민들이다.

위원들의 직업도 전기배선공부터 학교 교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나 보건의료전문가나 관련업계에 소속된 사람, NHS에서 일하는 사람은 제외된다. 다른 시민참여모델과의 차이라면 일정한 임기를 보장받은 시민위원들이 보건 분야 자원배분과 관련한 윤리적 주제들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하고, 그 결과가 NICE의 의사결정에 공식적으로 반영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보건연구원 위원회지만 의료 관련자는 '제외'

시민위원회에서 지금껏 논의한 주제는 주로 NICE 의사결정의 근간을 이루는 윤리적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희귀질환에 대해 특별한 우선순위가 부여되어야 할지, 혹은 환자의 연령에 따라 보건의료자원배분의 우선순위가 달라져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들이다. NICE는 평범한 보통의 납세자들이야말로 공적 자금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할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적의 전문가라고 보았다.

회의는 보통 안건에 대해 소개하고, 서로 상이한 관점을 지닌 전문가의 발표를 들은 후 질의응답과 상호토론을 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각자가 가진 견해, 그리고 그러한 견해의 배경 등이 공유된다. 설령 소수의견이라 할지라도 배제되지는 않는데, 이는 하나의 일치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시민위원회의 목적이 아니고 소수의견이든, 다수의견이든 각자의 의견을 듣고 그러한 의견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 보고서에서도 소수 의견이 모두 기록된다. 2005년에는 그간의 시민위원회 논의 결과를 종합하여 '사회적가치판단(social value judgement)'이라는 문서를 발표하였는데, 이 문서에 실린 내용은 NICE에서 운영하는 모든 위원회의 논의 과정에 적극 반영되어야 한다. 시민위원회를 운영한 후의 경험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한 시민위원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제시하며 시민위원회를 옹호하였다.

"위원회 참석 전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연령대의 사람에게 우선순위가 주어져야할 지를 물었더니 대부분 '아이들'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원회 토론에서는 특정한 연령대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도 일종의 차별이고, 차별은 아무리 긍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다수로 나왔죠.

위원회가 끝난 후 위원회 심의결과를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주었더니 다들 수긍하더군요. 제가 시민위원 중 한사람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저는 길거리 여론조사보다 시민위원회 방식이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는 보다 바람직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도 NICE의 시민의회와 비슷한 형태의 시민의회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시민들의 선택을 측면 지원하는 시민패널 보고서

미국 오레곤주에서는 시민 참여의 새로운 형태로 시민발의검토(Citizen's Initiative Review, 이하 CIR)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시험 가동한 바 있다. 이는 오레곤주 유권자들이 실제 투표하게 될 정책안을 소규모의 시민패널이 미리 검토하고, 그 결과를 유권자들에게 전달하여 유권자들의 판단을 돕고자 한 시도였다. 시민패널은 오레곤주 시민들 중에서 무작위로 선발하며, 이들은 다양한 정보를 제공받고 이를 바탕으로 주어진 정책에 대해 판단한다.

예를 들어 2010년 8월 9~13일 사이에 개최된 CIR 패널에서는 반복되는 흉악 성범죄와 음주운전 재범 케이스에 대해 최소형량을 높이는 안을 검토하였고, 이어진 또 다른 CIR 패널에서는 마리화나를 의료적으로 이용하는 경우의 유통체계, 지원, 연구 프로그램, 그리고 마리화나 판매 허용량을 정하는 건을 검토하였다.

패널리스트들은 논의 결과를 정리하여 선거 팜플렛에 게재하는데, 평가결과 일단 팜플렛에 실린 보고서를 본 사람들은 보고서의 내용이 투표에 영향을 미쳤다고 응답하였다. 그리고 이 보고서로 인해 해당 안건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들은 CIR 과정을 알지 못했고, 투표자 팜플렛에 실린 CIR 보고서도 읽지 않았다고 응답하였다 한다. 이는 CIR이 앞으로 극복해나가야 할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차례에 걸친 시민 참여 경험이 있다. 1998년 유전자조작식품의 안전과 생명윤리를 주제로 한 시민합의회의가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주최로 개최되었고, 1999년에는 생명복제를 주제로 한 시민합의회의가 개최된 바 있다.

2004년에는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주최로 원자력 중심의 전력정책에 대한 시민합의회의가 있었고, 음식물 자원화시설 설치를 주제로 한 울산북구시민배심원제도 있었다. 보건의료분야의 경우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의뢰로 진행된 연구에서 건강보험 보장성을 주제로 한 시민위원회가 2007년과 2010년에 각각 열린 적이 있다.

이중 '원자력중심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합의회의'는 원자력발전을 포함한 전력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한다는 취지로 마련된 장으로 1998년, 1999년 시민합의회의의 경험을 토대로 체계적으로 기획된 회의였다. 전문가 발표, 질의응답, 조별토론과 전체회의의 순으로 3박 4일에 걸쳐 공개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사전에 시민패널이 선정한 질문들에 대해 11명의 전문가와 2명의 지역주민의 발표가 있었다.

시민패널 보고서에서는 합의회의를 평가하며 '균형 잡힌 정보가 주어졌을 때 평범한 일상시민이 도달하는 상식적인 결론을 보여줄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나름대로 진단하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건강세상네트워크 운영위원입니다.



태그:#보건의료, #선거, #건강, #공약, #건강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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