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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지요. 중산층이 만져보기 힘든 금액을 한 번에 날려먹게 생겼으니까요."

지난 10일 오후 서울시 송파구 롯데월드 인근의 한 상가. 이곳 일부를 임차해 커피전문점을 운영하는 박상규(가명)씨는 이날 아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는 27일 예정됐던 상가 건물 경매 일정이 돌연 취소됐기 때문이다. 경매가 성사된다면 최악의 경우, 이 건물 임차인인 박씨는 투자했던 권리금과 보증금 등 최대 2억여 원을 손해 보게 된다.

최근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경매에 부쳐지는 '깡통 상가'들이 늘어나면서 상가 자리를 빌려 장사하던 상인들이 피해를 입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시설 투자비나 점포를 인수하면서 이전 임차인에게 지불했던 거액의 권리금을 손해보는 것은 물론, 보증금을 되돌려받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않다.

서울시 송파구의 한 아파트 밀집지역.
 서울시 송파구의 한 아파트 밀집지역.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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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잘 했는데... 상가 경매로 '2억 원' 날릴 수도

박씨가 이 건물에 점포를 얻은 건 지난해 2월. 박씨 이전에 이곳에서 장사하던 임차인은 만만치 않은 액수의 권리금을 제시했지만 박씨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도로변에 위치해 있고 주차장까지 보유한 커피전문점이란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근에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 몇 생겨났지만 그런 경쟁을 감안하면 장사도 나쁘지 않은 수준을 유지했다. 문제는 그 해 11월에 생겼다. 해당 건물 전체가 경매에 넘어간 것이다.

임차인인 박씨는 이 점포를 얻으면서 두 군데에 목돈을 썼다. 우선 건물주에게 임대계약을 맺으며 보증금을 냈고, 이전 임차인에게 영업권을 이어받는 대가로 권리금을 줬다. 보통의 경우라면 박씨는 이곳에서 임대계약을 마치고 나갈 때 건물주와 다음 임차인에게 각각 보증금과 권리금을 챙겨갈 수 있다. 그러나 경매로 주인이 바뀌어 쫓겨나는 거라면 얘기가 다르다.

누군가 경매에서 박씨의 점포 소유권을 낙찰 받으면 박씨는 일단 새 주인과 다시 임대 계약을 맺어야 장사를 계속할 수 있다. 새 주인이 나가달라고 말하면 그대로 점포를 비워줘야 한다. 이렇게 되면 박씨는 권리금을 회수할 길이 없다.

보증금도 온전히 돌려받기 어렵다. 건물이 경매에 넘어갈 만큼 경제 사정이 나빠진 이전 건물주가 박씨의 보증금을 돌려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박씨는 "건물이 경매에 넘어간 달부터 월세를 아예 내지 않고 보증금에서 제하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회수하려면 한참 남았다"고 말했다.

"등기부등본 떼어봤자 '깡통 상가' 구분 어려워"

박씨는 "피해를 많이 봤다"면서도 아직 영업 중이라는 이유를 들어 구체적인 보증금이나 권리금, 임대료 액수를 밝히는 것을 꺼렸다. "권리금만 해도 2년 장사해야 겨우 '깔까 말까' 한 금액"이라는 게 박씨의 말이다. 그가 밝힌, 경매로 인한 '피해 예상액'은 2억여 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격이지만 박씨는 "계약할 때는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사람들이 임대계약하기 전에 등기부등본 떼어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들어오기 전에 (건물 주인 등기부등본을) 떼어봤는데, 이 건물이 경매에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등기부등본은 부동산에 관한 권리관계 및 현황이 기재되어 있는 공적장부를 말한다. 박씨는 "요즘 건물 치고 빚 없는 상가는 찾아보기 어렵고, 또 상가란 게 임대료가 매달 들어오는 구조이기 때문에 빚이 어느 정도 있어야 안전한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박씨가 말하는 '최악의 상황'은 경매가 성사되고 바뀐 주인이 지금보다 현저히 높은 임대료를 제시하거나 박씨와 아예 재계약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경우 고통받는 건 박씨만이 아니다. 박씨는 "지금 고용하고 있는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이 8명 정도 된다"면서 "그 친구들도 다 실직자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속출하고 있는 깡통 상가들이 동네 고용까지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셈이다.

박씨의 점포가 속한 건물은 1년 새 4차례 경매에 부쳐져 분양 당시 300억 원이던 감정가가 120억 수준까지 떨어졌다. 5번째 경매가 오는 27일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현재는 경매가 취소된 상태다. 박씨는 "일단 올해 안에는 경매가 재개될 것 같지 않아 다행이지만 상황 자체는 변한 게 없다"면서 "무척 불안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의 아파트 상가.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의 아파트 상가.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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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세' 내라는 경매 상가 조심해야

같은 날 오후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의 한 아파트 상가. 이곳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이정균(가명)씨는 종일 착잡한 표정이었다. 며칠간 가족과 휴가를 다녀오자마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휴가 다녀온 사이 이씨가 임차했던 점포가 대법원에서 경매로 팔렸다는 것이었다.

이정균씨가 이 상가에 들어온 것은 약 4개월 전. 경매에 부쳐진 건물이라 임대료가 쌌다. 상가 1층 방 2개를 쓰는데도 임대료는 매달 100만 원. 보통 같으면 보증금 2000만 원에 월 150만 원은 줘야 하는 조건이었다.

건물주는 보증금이 없는 대신 6개월 치의 임대료를 선불해주기를 원했다. 업계 용어로 '깔세'를 내라는 것이었다. 6개월이 지나기 전에 건물이 경매로 팔리면 이씨가 손해를 보는 셈이었지만 이씨는 그럴 가능성을 낮게 보고 계약을 맺었다. 벌써 사는 사람이 없어 두 번이나 유찰된 데다가 가격도 방 하나당 1억 4188만원으로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2~3년은 경매를 하리라는 게 이 부근 부동산 업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너나 할 것 없는 불경기지만 이씨는 과일장사 20년 경력과 성실함으로 활로를 뚫었다. 낮이면 점포는 부인에게 맡기고 용달차로 구로구 곳곳을 누비며 과일을 팔았다. 그렇게 이씨는 최근 3개월간 과일 팔아 약 1억 원 매출을 올렸다.

이씨는 "장사는 잘됐지만 마음 한켠에는 항상 불안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임차한 상가가 경매에 넘어간 '깡통 상가'였기 때문이다. 누군가 경매에서 이씨의 점포 소유권을 낙찰 받으면 이씨는 새 주인과 다시 임대 계약을 맺어야만 장사를 할 수 있다. 새 주인이 나가달라고 말하면 그대로 점포를 비워줘야 한다.

불안감은 마침내 현실이 됐다. 새로 건물을 낙찰받은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씨와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었다. 이씨는 "경매 가격이 좀 더 내려오면 직접 살 생각도 있었는데 내 사정을 아는 사람이 자기 주변 사람을 부추겨서 경매 낙찰을 받아 버렸다"고 허탈해했다.

주인이 바뀌었으니 임대 계약을 다시 맺어야 하지만 이씨는 재계약 가능성을 낮게 봤다. 점포 장사가 잘 된다는 걸 알고 경매 낙찰을 받았으니 임대료를 훨씬 올려 부를 게 뻔하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재계약에 실패할 경우 이씨는 4개월 동안 쌓아놓은 고객들을 잃고 자리를 옮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가 그동안 점포에 투자한 시설비는 900여만 원. 이 부분도 고스란히 이씨의 손실로 남는다. 이씨는 "장사할 맛도 안 나고 새 주인이 언제 나가라고 할지 모르겠다"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상가 담보 대출 중 1/4이 깡통... 자영업자 주의해야

최근 깡통 상가가 속출하면서 이씨나 박씨 같은 임차인 피해자도 덩달아 증가하는 추세다. 경매 전문업체인 더블옥션 이신구 부장은 "경매에 넘어가서 상가 주인이 바뀌면 일단 권리금은 무조건 떼인다"면서 "상가 대출이 많은 경우에는 보증금을 떼이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이 부장은 "이런 분들이 법적인 해법이 없는지 상담해오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이 국내 6대 시중 주요 은행(우리·국민·신한·농협·기업·하나)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월 말 기준 상업용 부동산 담보대출은 196조 8000억 원이다. 이중 25%는 대출금액이 현재 건물 가치보다 높은 '깡통 상가'다. 여기에 상업용 부동산 담보대출에 대한 이자 연체율도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 깡통 상가들이 더 생겨날 수 있다는 얘기다.

깡통 상가와 더불어 자영업자 수도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 5월 말 현재 자영업자 수는 약 584만 명. 올해 들어서만 15.9%나 늘었다. 신규 창업하는 자영업이 대부분 점포를 임차하는 형식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깡통 상가로 인한 임차 상인들 피해가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임차 상인들의 피해를 막으려면 경매에 넘어가는 깡통 상가 자체를 줄여야 하지만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현재 깡통 상가에 대한 정부 대책이 건전성 확보 쪽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깡통 상가' 대책의 일환으로 은행들에게 상업용 부동산 담보대출의 담보가치인정비율(LTV) 기준을 강화하고 위험 관리에 힘쓰도록 지도할 예정이다.

정부의 이같은 대책은 장기적으로 부실 확산을 막고 건전성을 관리하는 데는 효과가 있지만 상가 담보 대출로 자금을 충당하던 건물주들의 돈줄을 옥죄는 셈이라 당분간 '깡통 상가' 수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태그:#깡통상가, #경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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