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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은 기억박물관이다. 발전이 더딘 탓에, 사람들 관심에서 벗어난 탓에 오래된 풍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간혹 골목을 거닐다 1960, 7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낡았다' '고쳐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각이 많지만 몇 백년 전 집과 길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럽이나 미국의 유서 깊은 도시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을 보면 완전히 수긍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좀더 애정을 갖고 바라보고 가꾸면 골목은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오랫동안 골목을 탐험하면서 발견한 보물들을 여기에 소개한다. - 기자 말

공터에 울려 퍼지던 '뻥'소리를 기억하십니까

오랫동안 사람들 입을 심심하지 않게 만든 뻥튀기. 고압력 밀폐용기를 이용해 만드는 뻥튀기는 압력을 가한 뒤 한쪽 구멍을 열면 '뻥'하고 터져, 이런 이름이 붙었다.
 오랫동안 사람들 입을 심심하지 않게 만든 뻥튀기. 고압력 밀폐용기를 이용해 만드는 뻥튀기는 압력을 가한 뒤 한쪽 구멍을 열면 '뻥'하고 터져, 이런 이름이 붙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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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동네에 가끔씩 뻥튀기 장수가 나타났다. 뻥튀기 장수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는데, 팔기만 하는 부류와 만들어서 파는 부류가 있었다. 팔기만 하는 부류는 고물수집이 목적이었고, 만들어서 파는 부류는 뻥튀기 판매가 목적이었다.

첫 번째 부류는 고물 수집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주로 '구루마'라 불리던 손수레를 밀고 다녔다. 내가 군침을 삼키면 어머니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버릴 만한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못쓰게 된 그릇이나 바가지 같은 것들을 말이다. 종이나 술병도 좋았다. 고무신도 뻥튀기와 교환 가능한 품목이었다. 외가에 갔을 때 외할아버지가 주신 고무신을 들고 나가 뻥튀기와 바꿔 먹은 기억이 있다.

아저씨는 가지고 다니는 저울로 무게를 단 뒤 과자를 교환해줬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고물과 과자가 몇 대 몇으로 교환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오로지 아저씨 마음이었다. 그래서 항상 그 자리엔 어른들이 따라나왔고, "조금만 더 달라"며 흥정을 벌였다.

"장마가 끝나고 화창한 날 헛간을 정리하던 내가 부상당한 비닐우산을 한 아름 꺼내 옥수수튀김과 바꾸었다... 동생 이름이 새겨진 그 우산이 옥수수 장사로부터 큰 고물상에, 거기서 또 우산공장으로 넘어가서 재생돼 상점을 거쳐 또 우리집에 들어온 셈이다..." - <동아일보>(1963년 7월 4일 치)

이들 뻥튀기 장수들은 실제 뻥튀기보다는 고물을 팔아서 이득을 취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공짜로 뻥튀기를 나눠주면서 환심을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뻥튀기를 얻기 위해 아이들은 집에 널린 고물을 들고 나왔다.

무엇보다 제일 값이 나가는 건 쇠붙이였다. 셈이 빠른 뻥튀기 장수들은 아이들에게 집에 못 쓰는 금속 제품이 있는지 물었고, 뻥튀기에 눈이 먼 아이들 중에는 버릴 게 아닌 것들을 고물이라며 들고 나오기도 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어머니가 달려나와 손수레를 뒤지고 아이가 야단을 맞는 모습은 진풍경이었다.

아이들에게 더 인기가 있었던 것은 즉석에서 뻥튀기를 만들어 팔던 장사치들이었다. 이들은 장구 모양으로 생긴 기계를 갖고 다니다 공터나 하천 같은 데 자리를 잡았다. 공터나 하천은 평소에는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는 데다 시야가 트여 있어 뻥튀기 장수들이 애용했다. 시야가 트여 있다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이점이 있었다. 하나는 이목을 끌기 쉽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미리 보고 큰소리에 대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뻥튀기를 만드는 장구 같은 기계는 아주 단단하며 튼튼해 보였고 한쪽에는 압력계가 달려 있었다. 뻥튀기 아저씨는 손으로 천천히 기계를 돌렸는데, 바닥에 놓인 가스 불로 기계를 달궜다. 대략 10여 분 정도 돌리면 아저씨가 철망을 한쪽 구멍에 댔고, 주위에 둘러선 아이들한테 "귀 막아라"고 지침을 내렸다. 혹시나 주변을 걸어가다 봉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아저씨가 내는 목소리는 꽤 컸다. 가끔 딴 생각을 하던 사람이라면 미처 귀를 막지 못해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드물었다.

아저씨가 "귀를 막아라"라고 하면 아이들은 있는 힘껏 두 손으로 귀를 막았고, 곧이어 '뻥' 하는 소리와 함께 철망 한쪽 끝에 이어진 가마니에 뻥튀기가 가득 찼다.

압력을 이용해 부풀린 곡물과자가 '뻥튀기'라는 이름을 얻게 된 건 오로지 압력용기의 '뻥'소리 덕분이다. 뻥튀기는 내부와 외부압력 차이를 이용해서 만드는 과자다. 단단한 밀폐용기 안에 곡물을 넣고 밖에서 가열하면 용기 안에 있는 공기가 팽창하면서 압력이 높아진다. 가열하면 할수록 압력은 점점 더 높아진다. 마침내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한쪽 구멍을 열면 그쪽으로 공기가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데, 워낙 압력차이가 커 '뻥'소리가 난다. 따라서 용기가 견딜 수 있는 압력을 확인할 수 있도록 압력계가 달려 있다.

뻥튀기 재료는 사람들 입맛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쌀이며 보리, 밀, 옥수수 등을 들고 와 튀겨달라고 했다. 그중에는 어머니 허락도 받지 않고 쌀을 들고 와서 튀겨가는 아이도 있었다. 뻥튀기는 간식으로 먹는 과자였기 때문에 적당히 단맛이 필요했다. 단맛을 내는 데는 주로 사카린(당원)이 많이 쓰였다.

뻥튀기의 역사, 일제시대부터 시작됐다

튀밥, 뻥과자, 뻥튀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 뻥튀기.
 튀밥, 뻥과자, 뻥튀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 뻥튀기.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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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튀기는 이름이 여러 가지다. '튀밥'이라 불리기도 하고 '뻥과자'라도 불린다. '뻥튀김' 또는 '펑튀김'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나는 주로 경상남도에 살았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주로 뻥튀기라 불렸던 기억이 난다.

휴대용 밀폐용기를 이용해 만든 뻥튀기는 대략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시작됐다고 여겨진다.

1946년 10월 9일 치 <경향신문>에는 옥수수 뻥튀기를 그린 삽화가 실렸다. 뻥튀기 용기를 돌리는 아저씨와 바구니에 옥수수를 담아 가져가는 어린이들이 배경인물이다. 용기 모양이나 뻥튀기를 만드는 모습은 지금 우리들에게 익숙한 풍경과 다를 바 없다. 해방 이전부터 이런 방식으로 뻥튀기를 만들어 먹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그림이다.

1950년대 작품인 김내성의 소설 <애인>에도 뻥튀기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소설에서는 뻥튀기를 '쌀튀김' '옥수수 튀김'이라 표현했는데, 아이들 사이에서 꽤 인기있는 간식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런데,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 곡물을 과자로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사실 사치에 가까웠다 한다. 쌀은 물론이거니와 콩이나 옥수수도 귀했다. 상황이 바뀐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미국에서 구호물자로 옥수수가루와 옥수수 씨앗이 대거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이전보다 곡물을 많이 볼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아이들도 옥수수로 만든 뻥튀기 과자를 맛볼 수 있게 됐다.

간식 권력의 이동... 그래도 뻥튀기는 살아 있다

고압력 밀폐용기를 이용해 만들던 뻥튀기는 한 때 폭발사고가 일어나 종종 사람들을 다치게 만들었다.
 고압력 밀폐용기를 이용해 만들던 뻥튀기는 한 때 폭발사고가 일어나 종종 사람들을 다치게 만들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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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튀기는 고압력 밀폐용기를 이용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이따금 사고도 일어났다. 1958년 8월 5일, 대전에선 뻥튀기를 만들다 밀폐용기가 과열 압축되면서 폭발하는 바람에 주인이 파편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압력조절을 못해서거나 용기가 불량이어서 벌어진 사고였다. 1962년 충청북도 진천에서도 옥수수를 튀기던 밀폐용기가 과열로 폭발해 행인이 중상을 입었다. 1976년에도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밀폐용기가 폭발하면서 구경하던 아이 두 명이 화상을 입는 일이 있었으니 뻥튀기 폭발사고의 역사는 꽤 길었다.

1970년대까지 큰 인기를 끌던 뻥튀기는 1980년대가 되면서 차츰차츰 잊히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소득 수준이 크게 높아진 게 원인. 주머니가 두둑해진 아이들은 뻥튀기 대신 기업에서 만든 과자를 사 먹기 시작한다. 포장된 과자들은 보기에 더 그럴듯했고 더 달았다. 특별한 첨가물을 넣어 아이들 입맛을 돋우는 재주도 있었다. 뻥튀기가 이런 과자들의 상대가 되긴 어려웠다.

게다가 똑같이 옥수수를 원료로 했지만, 더 세련돼 보이고 달콤한 팝콘이 대학생들과 부유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인기를 얻었다. 한 번 맛을 본 아이들은 뻥튀기보다 팝콘이 맛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1980년대는 뻥튀기에서 팝콘으로 아주 빠르게 간식 권력이 이동하던 시대였다. 뻥튀기는 빠르게 몰락했고, 팝콘은 순식간에 간식의 황제로 군림했다. 극장에서 뻥튀기가 놓인 자리에는 팝콘이 들어섰다.

"엄마 몰래 바가지에 쌀을 담아 튀겨먹던 일도 이젠 어릴 적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자동식 팝콘기계에서 계속 쏟아져 나오는 팝콘이나 군것질용 과자류가 뻥튀기의 단골손님을 몽땅 빼앗아 갔기 때문." - <동아일보>(1981년 12월 15일 치)

간식으로서 뻥튀기는 이제 희귀한 존재가 돼버렸지만 그 강렬한 인상은 우리 언어 속에 강하게 박혀버렸다. 몇 배나 이익을 부풀렸다든지,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서 자신을 내세울 때 흔히 '뻥튀기'라는 이름을 갖다 붙인다. 비록 '팝콘'이라는 훨씬 인기 있는 과자가 대세가 됐고, '뻥튀기'라는 과자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고 해도 말이다.

처음 이 땅에 뻥튀기 기계가 나타났을 때, 밀폐용기 안에 들어간 곡물이 조금 뒤에는 몇십 배나 부풀려져서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그 놀라움이란 처음 영화를 접했거나 자동차를 접한 사람들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비록 지금은 추억의 간식이 돼버렸지만 뻥튀기는 애초 첨단기계(?)의 도움을 받아 태어났으며 한 때는 일부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귀한 먹을거리가 됐으니 혹시나 원조 뻥튀기가 남아 있다면 제 대접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가끔씩 오래된 골목을 걷다 보면 '튀밥'이라는 이름이 붙은 간판이나 글자를 보게 된다. 오일장에서 듣게 되는 '뻥'소리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옛 추억을 만나서이기도 하고,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게 고마워서이기도 하다.

사실 한동안 뻥튀기 다이어트가 유행이라는 소식을 듣긴 했다. 크기에 비해 칼로리가 무척 낮기 때문에 배만 부르고 실제 살은 찌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면서다. 실제 강냉이 100g은 100kcal이며, 감자깡(100g)은 481kcal, 건빵 1봉(90g)은 344kcal, 꼬깔콘 1봉(95g)은 520kcal, 쌀밥 1공기는 300kcal쯤 된다고 한다. 솔직히 직접 뻥튀기 다이어트를 해보지 않았고, 주변에서 이를 해봤다는 사람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렇게 뻥튀기가 아직도 주목을 받는구나 싶어 신기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세대교체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단지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지는 건 슬픈 일이다. 이렇게 살아남았으니 앞으로도 종종 보게 되지 않을까.


태그:#뻥튀기, #튀밥, #뻥과자, #뻥튀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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