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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아이를 재는 기준인 100점과 1등, 또는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이라는 기준에 아이를 맞추려 하지 말고, "살아서 밥이라도 같이 먹자"는 식으로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이 아이를 재는 기준인 100점과 1등, 또는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이라는 기준에 아이를 맞추려 하지 말고, "살아서 밥이라도 같이 먹자"는 식으로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 교육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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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청소년이 하루에 평균 1명 자살한다. 1년에 250명에서 300명이 자살하는 것이 청소년의 현실이다. 게다가 초중고생들 중에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않겠다며 '탈학교' 결단을 내리는 아이들이 1년에 5만 명에서 8만 명이라 한다.

그러면 그나마 다행스럽게 자살도 하지 않고 탈학교 결단도 내리지 않은 아이들, 다시 말해 매일 아침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고 학교가 끝나면 다시 제2의 학교인 학원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은 과연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이 아이들은 부모 아닌 학부모로부터 100점과 1등에 접근하도록, 그리하여 일류대학을 가도록, 그 다음에는 일류직장에 취업하도록 모종의 압박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청소년들이 나름의 꿈을 키우고 삶의 즐거움을 느낄 기회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어른들, 특히 교육당국은 그렇게 살벌한 경쟁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나야지만 교육의 '국가 경쟁력'이 생긴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수단이 일제고사다.

사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외에도 월말고사가 있었고 그 외에도 주초고사, 주말고사까지 있었다. 그러니 하루도 편하게 두 다리 뻗고 자기 어려웠다. 늘 시험의 압박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 시험이 있으니 다른 일(예컨대, 동아리 활동이나 독서 토론, 좋아하는 친구 만나기, 재미있게 놀기 등)을 편하게 할 수 없는 것, 늘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 느낌, 바로 이것이 시험의 본질이었다.

불행하게도 이런 현실은 지난 수 십 년 동안 좋은 방향으로 변하기는커녕 더 나쁜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자살과 탈학교라는 현상 외에도 학교 폭력이나 교실 붕괴, 왕따 현상 같은 게 심해진 것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도, 선생님도, 부모도 인간답게 제대로 산다는 느낌을 가지기 어렵다. 삶의 즐거움과 배움과 가르침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기보다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느낌으로 산다. 살기는 사는데 진짜로 사는 것 같지 않고 그래서 늘 언제 이 지옥 같은 현실로부터 탈출을 하나, 이런 생각이 굴뚝같다.

사태가 이 정도라면, 아이들과 어른들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죽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면, 뭔가 엄청 뒤틀린 것이 아닌가? 인생 살아봐야 80년인데,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만날 "나중에 잘 살려면 오늘은 무조건 참고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산다면 모두 헛것이 아닐까? 그렇게 심각하게 문제를 느낀다면 교육 당국이나 학교, 지역사회나 시민 모두가 나서서 문제의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땜질 처방이 아닌 근본 해법을 찾아 나서야 할 일 아닌가?

"제발, 오늘 저녁밥이라도 같이 먹자" 이런 마음 아닌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된 2012년 1월 26일 오후 서울시교육청 기자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변춘희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운동본부 공동대표, 청소년 인권활동가 '수수', 한상희 정책자문위원장이 활짝 웃고 있다.
▲ 활짝 웃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된 2012년 1월 26일 오후 서울시교육청 기자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변춘희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운동본부 공동대표, 청소년 인권활동가 '수수', 한상희 정책자문위원장이 활짝 웃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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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또 다시 엉뚱하게 흘러간다. 일례로, 누군가 청소년 하나가 성적 때문에 또는 진로 문제로 고민하다가 자살을 했다고 치자. 어른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학교 당국은 "우리 학교의 명예가 실추될 수 있으니 소문이 많이 나지 않도록 아이들 입단속을 잘 하자"는 식이다. 아이가 떨어져 죽은 아파트 단지는 어떤가? "혹시라도 우리 아파트 값이 떨어질 수 있으니 얼른 사태 수습을 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자"는 것이 일반적인 태도 아닌가?

지금부터라도 이래서는 안 된다. 아이들의 유서를 살피고 친구관계를 살피며 평소에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방식과 평가방식을 바꾸고 아이들의 내면세계가 주눅이 들지 않도록, 그리하여 자신만의 꿈과 끼를 맘껏 발산할 수 있도록 학교 안팎에서 노력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성적 문제나 진로 문제로 고민을 하다 떨어져 죽은 아이, 그 아이를 끌어안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한번 들어가보자. 세상에 둘도 없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그 순간에 과연 이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할까?

"이 자식아, 엄마 아빠가 네 장래를 위해 매일 뼈 빠지게 일하며 학원비다 과외비다 모두 대주며 공부 좀 잘 하라고 했는데, 병신같이 그것도 못해서 이렇게 먼저 가버렸느냐, 이 못난 녀석아"라고 말할까? 아니면 "아가야, 내가 정말 잘못 생각했다. 미안하다. 제발, 지금이라도 살아 일어나 오늘 저녁밥이라도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라고 할까? 과연 이 둘 중의 어떤 반응이 부모의 진심을 나타내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두 번째 반응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왜 우리들은 아이가 평소에 팔팔 살아 있을 때 그런 마음을 먹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세상이 아이를 재는 기준인 100점과 1등, 또는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이라는 기준에 아이를 맞추려 하지 말고, "살아서 밥이라도 같이 먹자"는 식으로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왜 우리는 이런 마음을 아이가 죽어야만 먹게 되는가? 왜 살아 있을 때 이런 절박한 마음, 진실한 마음을 먹지 못하고 쉽사리 세상의 기준에 아무 생각 없이 빠지는가?

장관과 교육감만으로는 못하는 '혁명'... 나부터, 부모부터!

인권연대에서 매년 개최하는 청년인권학교
 인권연대에서 매년 개최하는 청년인권학교
ⓒ 대전충남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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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무래도 부모가 경험하는 현실이 사다리 질서 또는 피라미드 구조를 하고 있는 기득권 경쟁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성적이 우수한 극소수의 아이나 업무 성과가 뛰어난 소수의 직장인만이 성공과 출세를 할 수 있는 구조 속에 살다보니, 성공적인 부모는 기득권을 누리면서 중독되어가고(향유 중독), 그 속에서 상대적으로 실패한 사람들, 또는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부모는 기득권을 동경하면서 중독되어 간다(동경 중독).

특히 80% 이상의 부모들은 자신이 못다 이룬 꿈, 즉 기득권층에 편입되지 못함으로 인한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속마음을 편하게 드러내지도 못한다. 평소에 감춘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을 은연중에 자식들에게 전가한다. 그래서 비록 내가 '개고생'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들만큼은 나의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을 깨끗이 씻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니 기존의 잘못된 경쟁 시스템을 근원적으로 고치려 노력하기보다 그냥 그 속에서 한 단계라도 더 올라가는 '파괴적' 경쟁에 동참한다. 부모가 먼저 그런 경쟁을 내면화하고 다음으로 자식들에게 대물림을 한다. 그러니 자식들이 자신만의 꿈을 키울 기회도, 자신의 끼를 발견할 기회도 처음부터 박탈당하는 셈이다.

이런 잘못된 현실(사회 구조와 삶의 태도)을 고치지 않은 채 단순히 겉으로만 아이들을 존중하는 척하는 각종 제도나 규칙을 만들게 된다면, 문제의 참된 해결은 또 다시 유보되고 청소년 인권의 진정한 현실은 갈수록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객관적 사회구조의 잘못된 부분을 냉철히 인식함과 더불어 '나부터' 변화하려는 실천적 의지, 그리고 그러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소통하고 연대하는 집합적 노력들이 풀뿌리에서부터 왕성하게 나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강조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다.

이런 식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없는 상태에서 일부 양심적인 장관이나 교육감, 교장이나 교사만 선각자로 노력한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위로부터 또는 옆으로부터 선량하고 소신 있는 리더가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과 힘을 합해 갈 수 있는 풀뿌리 운동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이다.

나부터 변하되 더불어 갈 수 있는 만남들, 그러한 공간들이 소중해지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급하게 서둘러서도 안 된다. 하루하루, 한 달 두 달, 1년 2년, 5년 10년, 100년 200년, 이렇게 매일 노력하면서도 길게 보면서 느긋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한 발자국씩 변치 말고 걸어가자. 세상에 절대로 공짜는 없으니!

덧붙이는 글 | * 글쓴이는 고려대학교 교수입니다.
* 이 기사는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청소년인권, #청소년자살, #나로부터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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