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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강물은 바다로 향하고 작은 강물은 더 큰 강을 향해 흘러간다. 흥국사터를 거친 섬강의 물줄기는 부론면 흥호리에서 남한강과 합수한다. 여기서 충청도 물이 강원도물과 만나 경기도물이 된다.

흥호리는 합수머리로 교통의 요지였다. 예전에 우리나라 12조창중에 하나인 흥원창이 있었던 자리이다. 흥원창은 고려 성종, 지방 호족세력이 와해되고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되어가던 때에 설치되었다. 우리가 가는 법천사터의 성격을 암시하고 있다.

법천사터는 합수머리에서 남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부론면 법천리 서원마을에 있다. 서원마을은 이 절터에 서원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초 유방선이 이곳에 머물며 강학을 하였다 전해지며 한명회, 서거정 등을 제자로 두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곳은 지명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도는 곳이다.

법천사터는 절 입구가 아닌 절 뒤쪽(법천2리) 길로 안내되고 있다. 법천리에서 서원마을로 들어가야 당간지주를 거쳐 법천사터로 가게 된다. 산은 사람을 나누고 물은 사람을 모이게 한다. 서원마을은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물가를 따라 자리 잡았고 그 마을 산기슭에 법천사가 있다. 당간지주에서 법천사터는 아득하게 보인다. 그만큼 이 절의 규모는 컸다.

아득히 보이는 하늘색 지붕 건물이 있는 곳에 당간지주가 있어 절터는 아주  넓었다
▲ 법천사터 정경 아득히 보이는 하늘색 지붕 건물이 있는 곳에 당간지주가 있어 절터는 아주 넓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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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 주변은 농가 건축물이 바짝 들어서 있고 냇가로 이어지는 길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지 이미 오래되어 주변이 어수선하다. 사람의 손길, 발길이 끊기면 제일 먼저 주인행세를 하는 것이 개망초다. 당간지주 밑에는 개망초만 무심히 자라고 있다.

개망초는 예전엔 시골에서 풍년대라 했는데 도시로 떠난 시골 폐가나 주인 잃은 논·밭이면 어김없이 풍년대가 그 터를 점령한다. 옹기종기 뭉쳐 꽃을 피우면 겉보기에 예뻐 보이기도 하고 이름처럼 풍년이 들 것 같으나 이면엔 쓸쓸함이 묻어 있는 꽃이다.

밑에는 ‘풍년대’, 주변엔 농가가 있어 당당함을 잃었다
▲ 당간지주 밑에는 ‘풍년대’, 주변엔 농가가 있어 당당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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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를 조금 벗어나면 시야가 탁 트인다.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너른 벌판이 있고 그 벌판을 가로지르는 폭 10m는 돼 보이는 흙길이 있으며 그 길 한 가운데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먼 과거로 갑자기 떨어진 느낌이 든다.

느티나무 우측 산기슭을 보면 축대위에 까만 석물이 눈에 들어온다. 지광국사현묘비(부도비)다. 산의 생김새에 맞춰 몇 단의 축대를 쌓고 맨 꼭대기 단에 지광국사현묘비를 모셨다. 축대는 현묘비의 격에 맞게 막돌이 아닌 잘 다듬은 돌로 쌓았고 중간에 계단을 정성스럽게 내었다.

잘 다듬은 돌로 몇 단의 석축을 쌓고 맨 위에 지광국사부도비를 모셨다
▲ 법천사터 석축 잘 다듬은 돌로 몇 단의 석축을 쌓고 맨 위에 지광국사부도비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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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바짝 쳐들고 서쪽 전방을 응시하는 용머리와 까만 비석을 등에 업고 세련된 갓처럼 보이는 이수를 이고 있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해하려는 자는 반드시 멸하리라' 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그 경고는 외적이나 종교적·정치적인 반대세력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 감히 누구도 함부로 해할 수 없는 정기가 서려있다.

고개를 바짝 들고 서쪽을 응시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장엄하다
▲ 지광국사현묘탑비 고개를 바짝 들고 서쪽을 응시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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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은 오므리고 목을 쳐든 채, 꼬리는 바짝 치켜 올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 모습이 넓은 지대석을 배 삼아 물 위를 항해를 하는 것 같다. 목 주변의 비늘은 생생하여 마치 뱀이 내 몸을 기어가는 듯 섬뜩하다. 이수 부문은 조각을 했다기보다는 가는 붓으로 그림을 그린 듯 정교하다. 귀부와 이수, 부도비를 만드는데 무한 정성을 다하였다.

목 주변의 비늘이 생생하여 마치 뱀이 내 몸을 기어가는 듯 섬뜩하다
▲ 지광국사현묘탑비 용머리 목 주변의 비늘이 생생하여 마치 뱀이 내 몸을 기어가는 듯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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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등에 '왕(王)'자를 새긴 점, 비신 측면에 두 마리의 용을 위아래에 조각하고  비신의 상단 양쪽 네모 틀 안에 봉황을 조각하여 놓은 점은 지광국사의 지위를 알려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거의 왕과 같은 예우를 한 것이다.

꼬리는 치켜 올려 긴장하는 모습이고 등에는 ‘왕(王)’자가 새겨졌다
▲ 지광국사부도비 귀부 꼬리는 치켜 올려 긴장하는 모습이고 등에는 ‘왕(王)’자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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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광국사는 고려성종4년(984)년에 태어나 1067년에 열반에 든 분이다. 고려 성종 때부터 문종에 이를 때이니 고려 정치사회환경은 지방호족세력이 약화되고 중앙집권체가 수립되던 때이다. 불교계에서도 고려초 지방호족세력과 결합한 선종의 세력이 약화되고 화엄종과 법상종이 부상되는 시기이다.

고려 현종 때에는 법상종이 부상하여 법상종의 중심사찰인 현화사가 왕실의 원찰로 창설되었으며 지광국사는 이 절의 지주로 수년간 머물렀다. 지광국사가 출가하고 열반에 든 법천사가 법상종 사찰인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지광국사현묘비가 모양과 품격에서 다른 부도비와 차이가 나는 점은 선종에 대한 법상종의 우월성을 강조한 산물이다. 종교적인 면을 뛰어넘어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지광국사현묘탑(부도)이다. 너무 부서져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시 용산으로 따라가지 못하고 그냥 경복궁 고궁박물관 옆에 주저앉았다. 부도형식이 이채롭다. 층탑형식의 부도도 아니고, 석종형도 아니요, 팔각원당형도 아닌 특수형식의 부도다.

부도의 정형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형부도다
▲ 지광국사현묘탑 부도의 정형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형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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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도는 세밀히 조각된 커튼이 드리워진 가마를 보는 것 같다. 실제로 지광국사 장례 때 사리를 운반하던 화려한 외국풍의 가마를 본떠 만든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기단부는 용의 발톱이 길게 뻗어있어 안정감이 있고 꽃무늬, 덩굴무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기단 상층부에는 사자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지광국사현묘탑은 커튼조각은 물론 전체적인 장식이 화려하고 이국적이다. 예전에는 사자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 지광국사현묘탑 커튼조각 지광국사현묘탑은 커튼조각은 물론 전체적인 장식이 화려하고 이국적이다. 예전에는 사자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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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돌부터 지붕, 상륜부까지 신선, 보탑, 불보살, 창문, 봉황, 가릉빈가 등으로 풍부하게 장식하였다. 전체적으로 웅건한 맛은 없는 가운데 이국적이면서 조각이 섬세하고 묘하다. 기존 선종의 정형적인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지광국사가 주지로 있었던 현화사석등도 기존 석등의 정형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일반적으로 석등의 불발기집은 팔각인데 현화사석등은 사각이며 불빛창도 따로 없이 사방으로 시원하게 트여있다.

 지광국사가 지주로 있었던 현화사 석등으로 기존 석등의 정형에서 벗어나 있다. 지광국사 부도와 같이 선종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 현화사 석등 지광국사가 지주로 있었던 현화사 석등으로 기존 석등의 정형에서 벗어나 있다. 지광국사 부도와 같이 선종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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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광국사부도비와 부도, 현화사 석등의 모습은 선종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법천사의 이름은 언제 어디서 유래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법천사(法泉寺). 원래는 진리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의미이겠지만, 부도비와 부도의 격을 생각하면 '법상종이 샘처럼 솟아 번창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폐사지에서의 상상은 역사의 틀에 구애받지 않는다. 폐사지 답사의 제일 큰 즐거움이다.

몇 동강난 석물이지만 평범하지 않다
▲ 법천사터의 석물들 몇 동강난 석물이지만 평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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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비와 걸맞게 한곳에 모아놓은 석물은 비록 몇 동강으로 몸이 부서져 있지만 조각조각마다 평범한 석물은 없다. 활짝 핀 연꽃, 연봉우리, 광배, 석탑조각이 옹기종기 무심히 모여 있다. 석물은 말하지 않아도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법천사는 남한강변에 세워진 선종사찰인 고달사, 흥법사터, 거돈사터와 다른 법통이라는 걸 피부로 느껴진다.


태그:#법천사터, #지광국사현묘비, #지광국사현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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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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